졸업식 날에
오늘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인 삼일 중고등학교의 졸업식이다. 아마 내가 참석하는 마지막 졸업식이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졸업식에 일찍 참석한 편이다.
내가 졸업식장에 처음 참석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67년2월이었다.
3학년 때부터 나는 밴드 부였다. 내가 담당한 악기는 심벌즈였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서 왜소한 체격인 내가 큼직한 심벌즈를 치는 것은 좀 안 어울렸을 것 같다.
특히 애국가를 연주할 때는 심벌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심벌즈가 그 끝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나, 둘, 셋~창(네박자에 정확하게 심벌즈를 울리고 다음 박자부터 둘째 소절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나, 둘, 셋 ~역시 네박자 째에 심벌즈를 치고 셋째 소절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앞소절과는 달리 네박자 째에 심벌즈를 치는 것이 아니라 한 박자를 더 쉬고 다섯 번째 박자이면서 네 번째 소절의 첫 박자”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의 첫 번째 대에 심벌즈를 쳐야한다.
또 심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때가 국기에 대한 경례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의 주악은 일반적으로 애국가의 마지막 소절을 연주하는 것으로 첫 박자에 심벌이 우렁차게 울려 주어야 했다. 이박자를 맞추는 것이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나로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밴드 부를 지도하시는 선생님이 조기일 선생님이셨다, 예술가적인 기질이 다분히 있어서 성격이 상당히 급하고 직선적이셨다. 따라서 조기일 선생님에게 단체로 매를 맞을 때는 가급적이면 늦게 맞는 것이고는 절대적으로 이익이었다. 처음에 화가 나서 때릴 때는 거의 풀스윙으로 매를 휘두르시다 보니 나중에는 지쳐서 힘이 빠지셔서 홈런 스윙, 3루타성 스윙, 2루타성 스윙, 1루타성 스윙 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번트성 스윙이 된다.
그러니 뒤에 맞는 것이 백번 이익이다. 특히 음악 분야는 더 예민하셔서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시는 게 없었다. 당시 밴드부에는 2살 위인 누나도 하모니카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졸업식 행사 중에 재학생 송사와 뒤이어 졸업생 답사 순서가 있다. 이때부터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주로 여학생들 사이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뒤이어 졸업식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있는데 1절은 재학생이 부른다“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2절은 졸업생이 부르는데“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바로 이 대목에 이르면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아주 통곡을 하기 시작을 해서 졸업식장은 거의 난장판이 되고 만다.
아주 어수선한 가운데 졸업식이 끝나고 졸업생들이 퇴장하여 각기 자기 교실로 돌아가는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담담하게 퇴장을 하는데 여학생들이 퇴장하는 모습은 울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들인지 앞서 나가는 친구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머리를 숙인 채 엉엉 울면서 교실까지 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던 졸업식 장면이 우리가 졸업할 무렵에는 많이 변했다. 우선 졸업식장에서 우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고창북중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울었던 여학생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다시 졸업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0년 1월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로
학생들을 졸업시켜 보내기 시작한 해였다.
당시는 아직 강당이 지어지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인근 삼척여고 체육관을 빌려 졸업식을 했다. 아무래도 다른 학교를 빌려 졸업식을 하다 보니 졸업식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문화예술회관에서 졸업식을 했다 문예회관은 거리가 좀 멀어서 행사가 끝나고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않고 앨범 등 배부할 물품 들을 아예 전부 차에 실고 문예회관에 가서 졸업식 후 현장에서 나누어주고 해산하여 졸업식이
너무 간단하게 끝난 적도 있었다.
기억에 남는 졸업식은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줄 장미꽃을 한 송이씩 투명 셀룰로이드지로 돌돌 말아서 레이블 용지에 해주고 싶은 말을 한두 줄 적어서 교실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졸업식이다. 학생들이 전부 하교한 다음 텅 빈 교실에 들려 책상과 그 주인을 맞춰가며 내가 혹시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지는 않았는지 회상과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교사로서 조금 발전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첫댓글 중학교 졸업식 난 기억도 없다.
마지막의 특별한 졸업식은 인상에 남겠다.
요즈음은 졸업 시즌이다. 시의 성 있는 무열의 글에서 여러가지를 생각나게한다.
나의 졸업식장에 부모님이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애들의 졸업식에는 참석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도 우리동네엔 꽃을 들고 다니는 학보모들이 보인다.
다음 주까지 계속될 것이다. 졸업=꽃의 등식이 나에겐 피지 못한 꽃봉오리다.
사실은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장미 꽃 값을 아직까지 주지 않음 영원히 떼어 먹을 심산임
왜? :당시 꽃집 사장이 마누라니까.
첫 결혼 기념일에 집사람이 근무하는 삼척의료원으로 장미꽃 100송이를 보냈다. 그런데 집사람이 다시는 꽃 같은 것 절대 보내지 말라고 했다.
왜?: 집사람 단골 꽃집에서 외상으로 주문해서 보냈거든
집사람이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자두가 먹고 싶다고 자두를 사오라고 했다. 시장에 가서 과일가게에서 자두를 400개를 사가지고 집으로 가져다 주었다.
그날 이후로 뭐가 먹고 싶다고 사달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