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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 : 지배계층의 모순에 맞선 “임꺽정”을 소설로 불러내다
1. 선비이자 자유주의자
1928년에 연재가 시작된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소설 「임꺽정」은 피지배 계층의 다양한 인물과 성격, 사건을 버무려 막힘없이 이야기를 끌고나간다. 언뜻 보면 조선 시대에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구조를 떠오르게 하지만, 실록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정밀하게 그려낸 점에서 터무니없는 과장을 일삼던 영웅적 고대 소설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임꺽정」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는 충청도 괴산에서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증조부는 이조 판서를, 조부는 참판을 지낸 바 있으며, 아버지는 경술년에 국치를 당하자 자결한 홍범식이다. 이 풍산 홍씨 문중은 자체로 문고를 이룰 만큼 많은 저술을 남긴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한중록」의 혜경궁 홍씨, 「순오지」 등 비평적 업적을 많이 남긴 홍만종, 그리고 바로 「임꺽정」의 홍명희를 꼽을 수 있다.
홍명희는 두 살 나던 해에 어머니가 병사하고 증조모와 대고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다. 어릴 적에 한학을 익힌 그는 일곱 살 때부터 한시를 지으며, 「삼국지」 등의 중국 소설을 섭렵한다.
소설은 그 해 정월 노는 때에 대고모부의 집에서 「삼국지」 한 권을 빌려다 놓고 첫권서부터 두서너 권은 집안 노인 한 분과 같이 보았다느니보담 배웠고, 그다음 십여 권을 나 혼자서 보았다. …… 그 뒤로는 길래 소설 보기에 반하여 『논어』, 『맹자』보다도 『동주열국전』, 『서한연의』 등속을 탐독하게 되었던 것이다.
— 홍명희 「자서전」, 《삼천리》(1929. 6.)
열두 살이던 1900년, 홍명희는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민영환과 재종 관계인 민영만의 딸과 결혼한다. 이 부부는 매우 금실이 좋았다고 한다. 홍명희는 당시 가장들이 “일반적으로 몹시 근엄했던 것과는 달리, 자제들이 보는 앞에서까지도 부인을 아끼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으며, 개화기 이후 많은 지식인이 조혼한 부인을 버리고 신여성과 사귀어 재혼하던 풍속과 달리 부인과 평생을 해로한다.
홍명희는 열네 살에 서울 중교의숙(中橋義塾)에 입학하여 다소 늦게 신학문을 접한다. 1903년에 장남 기문을 얻는데, 이때 아버지가 된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기문의 할아버지 또한 서른두 살 젊은이였다. 홍명희 스스로 “망발로 형제와 같은 부자”2)라고 말할 만큼 그는 아들과 줄곧 동지 또는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다. 두 사람은 부자 사이에 담배도 마주 피우고 술도 같이 마셔서 한동안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한다.
열여덟 살 때 그는 일본으로 가서 중학교 진학을 준비한다. 여느 유학생들이 속성으로 간판을 따곤 했지만, 일본말을 철저하게 배우고 신학문을 기초부터 다지러 준비 기간을 가진 것이다. 1907년 그는 대성중학 3학년에 편입하여 1910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 이 무렵 일본과 서구의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중학교 3학년 2학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독서에 매달린다. 그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한 책을 보는 동안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 되도록 속히 읽는다.”는 자신의 독서법을 지키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과 바이런의 시, 자연주의 계열의 일본 작가들의 작품뿐 아니라, 금서로 분류된 좌파 사상가들의 저술과 풍기 문란 딱지가 붙은 책까지 가리지 않고 섭렵한다. 이광수, 최남선 등과 만나 교유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 세 사람을 ‘동경 유학생 중 삼재사(三才士)’ ‘조선 삼재’ ‘조선 문학을 창조한 세 분’이라고 일컫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인 셈이다. 1910년 스물두 살 나이의 홍명희는 돌연 귀국길에 오른다.
우리 조선 청년의 생활 내용은 전에 없이 고답하고 공소하다. 그 원인은 ‘일부소거(一部小擧)’ ‘양반조신(兩班操身)’ 사람을 따라 가지가지 원인 근인이 있을 것이나 일반적으로는 장자의 간섭, 유린이 심한 것을 최대의 근인이라 할 것이다. 간섭 유린이 청년들에게 고통이 될 것은 정한 일이라 청년들이 고통을 면할 수단으로 ‘후레자식 구락부’ 같은 것을 모으면 어떠할까 이것이 일종의 묘안이 아닐까?
— 홍명희 「청춘을 어찌 보낼까」, 《별건곤》(1929. 6.)
유학 시대를 회고한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루한 인습의 굴레를 답답하게 느낀 나머지 ‘후레자식 구락부’를 생각해낼 만큼 그의 내면에서는 주체할 길 없는 반항 정신이 뻗쳐오른다. 이러한 그가 민족 차별이 따르던 일본 유학에 회의를 느끼고 귀국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엄청난 사건과 맞닥뜨리는데, 바로 그의 아버지가 1910년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것이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는 어떻게 하나 조선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홍명희는 아버지가 남긴 이 유언을 액자에 끼워서 책상 앞 벽에 걸어놓고 평생 이를 지키려고 애쓴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 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는 말은 그의 이러한 마음가짐을 잘 나타낸다.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홍명희는 1913년에 집을 떠나 만주·베이징·상하이·난양 등지를 떠돈다. 이때 중국에 망명중이던 신채호, 정인보 등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들의 자주독립 사상에 감화받고 떠난 지 6년 만에 돌아온다. 1919년 3·1운동에 앞장선 그는 1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1920년 만기 출소한 그는 쇠약한 몸으로 집안 형편이 기운 데 따른 생활고와 셋째아들 기하의 죽음까지 겪는다. 그러다가 1923년 좌익 사상 단체인 ‘신사상연구회’4)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며, 1924년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거쳐 <시대일보>의 사장을 지내는 등 언론계에 종사한다. <동아일보>에 있을 당시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쪽이 문학 분야다. 1924년 12월 <동아일보>는 2천 원이라는 거금을 걸고 「춘향전」을 현대소설의 수법으로 개작한 작품을 공모한다. 또 1925년 1월에는 우리 신문 사상 최초로 신춘문예 제도를 시행, 한국문학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 앞장선다.
얼마 뒤 <시대일보>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그는 휘문고보, 오산중학, 경신고보, 연희전문, 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 교직 생활을 하는 한편, 1926년 1월 카프의 기관지 《문예운동》 창간호에 「신흥문예의 운동」을, 제2호에 「예술기원론의 일절」을 발표한다. 아울러 그는 ‘신간회’ 창립 때 발기인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신간회는 1927년 홍명희를 비롯하여 문일평, 신채호, 안재홍, 한용운 등 28인의 이름으로 창립이 공포된다. 신간회의 강령과 규약 등은 홍명희의 지시로 제정됐으며, 신간회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도 홍명희다. 처음에는 ‘신한회’라고 했으나 총독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한(韓)’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간(幹)’으로 바꾸어 신간회가 된다. 신간회 부회장을 맡은 홍명희는 1928년 11월 20일 <조선일보>에 「임꺽정(林巨正)」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1928년에서 1940년 사이에 「임꺽정」은 몇 번이나 연재가 중단된다. 이 가운데 한 번은 홍명희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대회 사건에 연루, 다른 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교도소에 갇혔을 때 일이다. 연재가 중단되자 독자의 항의가 빗발쳐서 신문사에서는 경찰과 교섭하여 유치장 안에 책상과 원고지를 마련해 주어 작가에게 소설을 계속 집필하게 한다. 이로써 「임꺽정」은 중단 11일 만에 다시 연재한다. 물론 이러한 상태로 집필을 오래갈 수는 없어서, 홍명희는 3년 남짓 옥고를 치르고 나와 1932년 12월부터 다시 연재를 시작한다. 이후에도 몇 차례 연재 중단과 집필 재개가 이어지다가 1940년 10월 ‘조선 초유의 대작’이자 ‘조선 현대 문학의 거탑’이라는 찬사를 듣던 대하 역사소설 「임꺽정」은 미완성인 채로 막을 내린다.
해방 직후 홍명희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며, 1947년에는 중도 좌파에 속하는 민주독립당의 결성을 주도, 지도자가 된다. 이미 몇 차례에 걸쳐 평양행을 감행한 바 있던 그는 1948년 남북 연석회의를 계기로 당원들을 이끌고 월북한다. 이러한 결정은 그가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즉, 제거되어야 마땅할 친일 세력이 오히려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하는 남한의 정국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월북 이후 그는 부수상과 과학원장 등을 역임하며 임화와 김남천 등을 비롯한 대부분 문인이 숙청의 비운을 맞는 가운데서도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걷는다. 벽초 홍명희는 1968년 여든을 일기로 숨진다. 그의 묘소는 북한의 혁명 열사릉에 안치되어 있으며, 빗
돌에는 “홍명희 동지 내각 부수상 1888년 7월 3일생 1968년 3월 5일 서거”라는 간단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문학이 현실에 응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은 검열 같은 노골적인 방법으로 의식을 옥죄는 일제의 압박에 점점 위축된다. 현실 비판 발언은 은유나 우회적 풍자 등에 의지할 때에만 가능한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다각적으로 돌파구를 모색하는데, 이윽고 상상력을 옥죄는 현실에 응전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 바로 역사소설이다. 동질감이라는 정서적 토대 위에 역사 속의 인물과 공간을 끌어들이면 검열을 피하면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홍명희의 「임꺽정」 역시 이러한 의도와 배경 속에서 수태된 작품이다.
임꺽정은 1559년(명종 14)에 등장, 관리들과 토호 세력에 대항하여 의적 활동을 벌이다가 조정 토벌대와 치열한 싸움 끝에 포살된 실존 인물이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기재잡기』와 『명종실록』 등에 나오는 사료들을 축으로 하고, 여기에 다시 야담과 야사들을 섞어 버무린 장편 역사 소설이다. 홍명희는 임꺽정이 실존한 시대와 자신이 몸담은 시대는 4백 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여전히 지배 계층의 억압 밑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삶과 현실에 내재한 모순을 눈여겨본다. 바로 이러한 모순 구조를 불가사의에 가까운 역사 속의 한 실존 인물을 내세워 보여준 것이다.
총 5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전반부인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은 화적패가 결성되기 이전인 연산조의 갑자사화부터 명종 때의 을묘왜변에 이르기까지 약 50년 동안에 있던 일들을 주로 다룬다. 후반부인 「의형제편」, 「화적편」은 다양한 출신의 하층민들이 청석골로 들어와서 화적패가 된 경위와 일곱 의형제가 조정과 양반 무리를 상대로 펼치는 활동상이 중심을 이룬다.
첫 편인 「봉단편」은 임꺽정이 태어나기 이전, 연산조 시절에 벌어진 일들을 주로 담고 있다. 홍문관 교리 이장곤은 갑자사화 탓에 유배 생활을 하던 중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떠돌다가 우연히 머물게 된 고리백정의 집 딸인 봉단과 혼인한다. 이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장곤은 신분을 밝혀 동부승지로 천거되고, 봉단은 왕의 배려로 숙부인으로 봉해지며, 봉단의 외삼촌 임돌은 양주 소백정의 데릴사위가 되어 임꺽정을 낳는다. 한편, 양주팔은 묘향산에서 도술을 배운다.
다음 편인 「피장편」은 임꺽정이 갖바치가 된 양주팔의 집에 머물며 이봉학, 박유복 등과 사귀고 학문과 검술을 익히는 과정, 불도에 입문해 병해 대사가 된 양주팔을 따라 전국을 유람하는 과정을 그린다. 유람 도중 이황, 서경덕, 정희량 등과 만나며 조광조에게 정변을 예시하고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양주팔의 행적, 그리고 백두산에서 살던 처녀 운총과 결혼하는 임꺽정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어 「양반편」은 중종 말년에서 명종대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의혹에 싸인 인종의 죽음, 승려 보우를 둘러싼 불교의 부패상, 명종의 외척 윤원형이 꾸미는 갖가지 음모를 비롯한 궁정 안팎의 권력 다툼, 여기에서 비롯된 을사사화와 을묘왜변 등 혼란스러운 시대 배경 속에서 임꺽정, 이봉학, 배돌석 등이 펼치는 활약상이 소개된다.
작가의 수감과 병환으로 중단되었다가 연재가 재개된 「의형제편」에서부터 이 소설의 옹골진 재미와 진면목이 드러난다. 여기에서는 청석골 패거리가 강탈한 봉물을 선물로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다양한 출신의 하층민들이 청석골에 들어오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담는다. 행랑어멈의 유복자 박유복, 빈농 출신 머슴 곽오주, 임꺽정의 처남이자 백두산으로 도망친 관노비의 자식 황천왕동, 역졸 출신 배돌석, 양반의 서자 이봉학, 가난한 소금장수 길막봉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통하여 지배층의 부패와 가혹한 수탈로 말미암은 민중의 피폐한 실상을 드러냄과 동시에 순박한 백성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을 보여준다. 임꺽정을 비롯한 일곱 사람은 곧 의형제를 맺고, 여기에 아전 출신의 서림이 합류하여 화적패를 결성한다.
다음 「화적편」에서는 이렇게 결성된 청석골의 화적패 사이에서 임꺽정이 두령으로 추대된 이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힘이 장사인 백정 출신 임꺽정은 여러 화적 세력을 규합하고, 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지를 휩쓸며 조정에서 임명한 지방 수령들을 상대로 의적 활동을 벌인다. 임꺽정 패거리는 지방 수령들이 서울로 보내는 봉물을 중간에서 강탈하고 마패를 위조, 금부도사로 위장하여 군수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가 하면, 관청의 옥을 부수고 동료를 구출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쳐 조정과 지방 수령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 과정에서 두령 임꺽정이 서울 장안의 이름난 기생집에 드나들며 기생 세 명을 첩으로 삼는 등 다소 안일한 향락에 빠지면서 청석골 화적패는 위기를 맞는다. 어느 날 기생집에 있던 임꺽정은 포교들의 습격을 받고 치열한 싸움 끝에 가까스로 빠져나오지만 세 여자는 붙잡히고 만다. 아전 출신 서림의 배신으로 평산 군수를 살해하려던 패거리는 곤경에 빠지고, 관군과 결전을 벌인 끝에 산속의 근거지로 돌아오지만 수를 늘려 뒤쫓은 군졸 무리 때문에 다시 위기에 빠진다. 이내 패거리는 청석골에서 나와 구월산성으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갑자기 여기에서 이야기가 중단된다. 무려 12년에 걸쳐 2백 자 원고지 1만 3천 장이 넘는 규모로 쌓이던 이 대하 역사소설은 결국 미완성인 채로 막을 내린다.
의도한 대로 홍명희는 역사 소설 「임꺽정」을 통하여 지배 계층의 모순에 맞서는 민중의 힘을 당대의 거울에 비추어 옮겨놓는다. 이로써 작가는 식민지 치하에서 억압받는 기층 민중의 분노와 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의적의 활약상과 곤경에 빠져 허둥거리는 지배 계층을 보여주어 우회적으로 대중의 갈증을 풀어준다.
장편 「임꺽정」을 구성하는 다섯 꼭지는 한 묶음마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도 전체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작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부침하는 여러 왕조를 이야기 속에 담으면서 궁중의 여러 법도와 세태를 꼼꼼하게 되살려 보여준다. 게다가 출신만큼이나 각양각색인 임꺽정을 비롯한 화적들의 성격, 각 지방의 민간 풍속과 전설, 속담과 속어 등이 곳곳에 깃들여 소설의 세부를 풍성하고 맛깔스럽게 만든다. 이로 말미암아 「임꺽정」은 “한 시대의 생활의 세밀한 기록이요 민속적 자료의 집대성”, “조선 어휘의 일대 어해(語海)”8), “깨끗한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9)라는 찬사를 듣는다. 당시 역사소설을 집필한 작가들이 흔히 현실 도피의 방안으로 잠시 나들이를 하는 데 그친 정도에 비해, 홍명희는 10년이 넘도록 오직 역사소설 한 장르에, 그것도 「임꺽정」 한 편을 위해 많은 양의 책을 읽고 자료를 수집하는 등 온갖 열정을 쏟아붓는다.
이러한 찬사와 대조적으로 임화는 「임꺽정」을 “작품을 관류하는 정열” 없이 “그 시대의 인물들과 생활상의 만화경과 같은 전개”를 보인 세태소설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한다. 하층 계급의 핵심인 농민의 삶과 생활이 소홀히 다루어진 것, 소설의 후반부에서 임꺽정이 부하들을 산채에 남겨두고 혼자 서울의 기생집에 드나들며 첩을 셋이나 두는 등 향락에 젖어드는 것, 무고한 평민에게까지 뚜렷한 동기 없이 약탈·방화·살인을 자행하여 의적과는 거리가 먼 행적을 보이는 것 등은 애초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가의 의도가 굴절되었거나 훼손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측면은 작가가 왕조에서 편찬한 실록을 지나치게 충실히 따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무식하고 투박하며 때로 잔인성이 드러나기도 하는 도적을 도적답게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도식성에서 탈피, 작품에 현실감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렇다 해도 당대 사회의 계급적 갈등과 사회에 내재한 여러 모순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작가 자신의 혼돈 때문에 약화하거나 김이 빠져버린 느낌이 있다. 계급을 타파하자며 모인 화적 패거리 내부에도 또 하나의 지배·피지배 계층이 형성되고, 이는 곧 현실 세계의 강자와 약자의 모순 관계를 재생산한다. 게다가 일곱 두령급을 제외한 나머지 졸개들의 삶과 활동은 거의 무시됨으로써 임꺽정의 울분이 사회적 모순을 인식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천한 신분에서 비롯된 개인적 분노와 복수심으로 떨어지고 마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임꺽정」의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