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영국 카페 풍경 (당시에는 coffee-house라고 불리웠다
카페라고 하면 프랑스 파리를 연상한다.
그러나 유럽 최초의 카페는 1652년 런던에서 문을 연 '파스카 로제 하우스'다. 영국은 홍차의 나라라고 하지만 네델란드와 더불어 일찍이 커피 무역을 거의 독점하였다.
영국 사란들은 1730년경까지 홍차보다 커피를 훨씬 더 즐겼다,그러던 것이 차차 커피 하우스에서도 홍차가 주류로 변하고 커피 하우스는 영국 홍차 문화의 기초가 됐다.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 ‘파스카 로제’의 주인은, 터키 상인의 마부였던 보만으로 알려져있다. 그에게는 터키 여행에서 데리고 온 그리스 태생의 파스카 로제라는 하인이 있었다. 로제는 아침마다 주인을 위해 커피를 끓였다. 그것이 이웃간에 큰 화제가 되고 결국 주인은 로제를 시켜 커피 하우스를 열었다.
그 간판에는 ‘영국 최초로 공적으로 만들어 파는 로제의 커피-드링크의 효능’이란 글귀가 적혀있었다. 어느 커피 사가(史家)는 그 엉성한 점포의 역사적 의의를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비유하기도 했다. 커피 하우스는 우후죽순처럼 급속도로 퍼져 1683년 당시 런던에만도 3000 곳이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 상업지구에 있었다.
그러나 커피 문화는 지식인의 문화였다. 그래서 영국 제일의 학도(學都) 옥스퍼드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옥스퍼드 최초의 커피 하우스 주인은 유대계의 야코프라는 사나이였다. 야코프는 사귀던 터키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커피 열매를 갖고 커피 하우스를 개업했다. 이에 앞서서 옥스퍼드에서는 커피를 둘러싼 한 에피소드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
크레타 출신의 한 학생이 고향에서 보내 준 커피 콩을 기숙사에서 몰래 끓여 마시다가 발각되어 퇴학당했다. 그 이방의 ‘자극제’는 당시 수도원풍의 칼리지 생활에서는 금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학생의 부친과 상인간에 커피 거래가 이루어지고 옥스퍼드에서는 단시일 안에 많은 커피 하우스가 생겨났다. 그 배경의 하나로서 우리들은 당시 학생들의 폭주를 들어야 할 것이다.
당시 학생들은 칼리지(학사·學舍)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매일 일정량의 포도주를 지급받아 마셨다.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풀려나는 자유시간에는 선술집(테이번·tavern)에 몰려들었다. 폭음포식은 예나 지금이나 타박할 수 없는 학생들의 악습. 당시 그 작은 학생 거리에는 350개나 되는 선술집이 있었다고 한다. 폭음한 뒤에는 주마(酒魔)를 쫓기 위해 학생들은 으레 무리를 지어 커피 하우스에 몰려갔다.
어디 취기를 쫓기 위해서뿐이었을까. 그 이방 오리엔트의 검은 콩은, 그들이 조석으로 머리를 싸매며 읽는 라틴어의 세계와도 유사하게, 오묘한 픽션의 세계로 학생들을 유혹한 것이 아니었을까. 커피와 차가 일상적인 것이 된지 오랜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달리 당시 젊은 학도들은 그 ‘신비스러운’ 향과 빛깔, 맛 속에 그들의 꿈을 아스라이 투영(投影)했으리라 상상해본다.
커피의 집에서 꿈을 키운 것은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1655년 옥스퍼드에서 ‘티리야드’라는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그곳은 학생들과 교수 및 교양있는 신사들의 단골집이 됐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당시 명성이 높은 건축가이며 옥스퍼드 교수이기도 한 크리스토퍼 렌을 중심으로 ‘티리야드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그룹에는 때마침 청교도 혁명이 몰아친 폭풍을 피하여 런던으로부터 옥스퍼드에 피신해 온 많은 과학자들도 가세하였다. 영국의 왕립 한림원(1662년 창립)은 이 ‘티리야드 그룹’과 1645년 런던의 한 선술집에서 결성된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의 대표자인 과학자 로버트 보일의 그룹이 합쳐서 성립되었다.
이처럼 왕립 한림원이 커피 하우스를 산실로,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게 될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살롱을 모체로서 태어났음은 카페나 살롱의 문화, 더 나아가서는 유럽의 차 문화 및 유럽풍의 지성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참으로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할 것이다.
커피 하우스는 초창기에 지식인의 담론하는 사교장이었다. 사람들은 그 단골들을 ‘커피 하우스 인텔리’라고 부르며 우러러 보기도 하고 경원하기도 하였다.
이제 커피 하우스의 실내 풍경을 들여다보자. 건물은 엉성한 목조 건물이며 대개 2층에 자리잡고 있어 손님은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점포 바깥에는 아름다운 유리등이달리고 안에는
1738년 제작 영국 조지2세왕의 순은제 커피포트, 경매가 4백5십만 파운드
미녀가 있어 밝은 인상을 준다. 그 미인은 교태있는 눈동자로 담배 연기 가득한 안으로 유인한다.” 이 미인에 속아 로맨틱한 장면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서기에 앞서 자옥한 담배 연기와 소란스러움에 놀란다. 여자 웨이터는 때때로 남장이었다. 살풍경한 홀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여기저기 놓이고 고객은 어디에나 앉을 수 있다. 한쪽에서는 빌리어드와 포커를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 놓인 큰 테이블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원래는 커피 하우스의 패트런을 위한 특별석이었으나 차차 담론석이 됐다. 테이블에는 관보·신문·잡지와 함께 갖가지 상품광고, 극장 안내지 등이 놓여 있었다. 당시 주간이던 신문은 부수도 적고 값이 제법 비싸서 상류층 교양인이나 지식인이 아니고서는 매주 사서 읽지 못했다. 일상적으로 신문을 읽고 신간 서적을 한달에 2권 정도 구독하면 교양인이며 학식이 높은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던 시대였다.
17∼18세기 회화작품과 19세기에 사진에 담긴 커피 하우스의 실내 풍경(그것은 당시 풍속화의 좋은 화제·畵材였다)에서 한사람이 신문잡지를 읽어주고 그를 둘러싼 많은 객들이 귀기울이는 장면을 자주 본다. 지식인들의 담론의 사교장은 어느덧 지식에 눈을 뜬 민중들의 열린 정보센터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양사학자 이광주 교수>
출처: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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