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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정치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의 갈등, 시인의 갈등
—안도현의 시세계
오전에는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일기」전문
서두부터 거두절미하고 「일기」의 전문을 인용한 것은 이 시의 정서가 『북항』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짧은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근원적인 삶의 문제라서 의미의 범위가 정치성으로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화자의 일상적 삶이지만, 정서에서 삶의 원천적인 문제가 도드라져 나와 시인 또는 화자의 윤리적 정서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정치성향까지 드러나게 된다. 시의 내용은 단순하다. 풀어쓰자면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라주고,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와 “감나무 그늘의 수리”를 하던 화자가 먼 시선으로 “기러기 일흔 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 두”는 사이 하루가 저물어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이런 생활을 영위하다말고 문득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라는 독백을 결구로 내뱉는다. 하지만 시인은 화자가 이 독백을 하기 전에 시의 연을 나누어 진술과 진술 사이에 여백을 만들고 그 여백으로 인해 독백에 어떤 의미가 부가되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통찰의 울림을 주고자 한다. 이때 느끼게 되는 통찰로 인해 독자들은 자조적인 화자의 독백이 화자 개인의 사연에 머물지 않고 독자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각성하게 된다. 이 각성으로 인해 개별자인 화자의 정서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일상의 소소함을 감각적인 비유로 드러내는 「일기」의 시적 진술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런 일상적 일들을 가능케 하는 먹고 사는 문제의 본질을 독자들에게 환기시켜 시의 의미가 불러오는 연상(聯想)은 정치적 문제로 환유된다. 이때 드러나는 삶의 근원적 물음에 해당하는 정치의 윤리성으로 인해 독자들은 화자의 독백을 정치적 항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까 먹고사는 문제는 그것이 예술, 또는 그 무엇이라고 해도 그것들보다 우선하는 지위를 갖게 돼 정치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화자의 진술에 동화돼서 각자 나름으로 이 진술에 부합되는 서사를 상상하게 된다. 이렇게 정치성은 그것이 존재론적인 문제가 될 때 시에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동인(動因)이 된다. 그런데 「일기」에는 그런 먹고사는 문제가 방해를 받고 있는 정황이 비유적 진술로 드러나 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온다는 진술과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는 발설이 그것이다. ‘부엌’은 배고픔을 없애는 장소로서의 기표다. 따라서 부엌은 우리 삶의 최후의 보루를 상징한다. ‘저녁’ 역시 안식을 누리는 시간으로서의 상징이며 저녁을 맞는다는 것은 저 약육강식의 세상으로부터 무사 귀의(歸意)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녁은 그 무사함에 감사해 반성과 겸손을 배우는 시간을 은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온다는 것은 그 부엌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다. 먹고사는 문제는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문제지만, 또 이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없기 때문에 화자의 감정이 ‘사무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을 감추기 위해 화자는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으로 대충 한 끼를 때우다가 먹고사는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서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하는 독백을 하는 것이지만, 시인은 여백을 통해 그 독백을 자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되묻는 방식의 진술이 되게 함으로써 이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공통의 문제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로써 화자의 개별적 처지는 집단적 정치성으로 비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가 정치성을 갖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제목에 있다. 일기는 삶의 구체적 기록물이며 그 기록은 연속성을 가지게 돼 개인에게 역사적 사건이 된다. 역사는 당연히 정치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일기는 반성을 수반하게 되고 그 반성이 ‘그렇다고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라는 진술을 불러오지만, 독자들은 이런 화자의 시적 진술에 공감하면서도 비유의 모호성 때문에 시적 진실성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런 모호성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의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호한 시적진술에 담겨있는 은유의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이 이 시를 해석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이제 그 비유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는 시구에는 어떤 의미가 은유돼 있는 걸까? 가을에 피는 꽃 국화는 서정주 시인의 「국화꽃 옆에서」의 ‘국화’처럼 어떤 삶을 상징한다는 가정 하에 “국화”와 “웃자란 눈썹”이 매치되어 있다면 그 삶은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고 있는 삶을 뜻하며, 한편 깡말랐다는 것은 그 삶이 수확의 시기가 지나간 것이어서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국화는 꽃의 색깔에 따라 상징하는 바가 다른데 여기서는 그 색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국화’는 특별하고 개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삶이 아니라 보편적 삶을 상징하게 된다. 그리고 서정주의 ‘국화’가 여성의 삶을 상징한다면, “눈썹이 웃자란 국화”는 남성적 삶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눈썹이 웃자라는 것은 남성들에게 나타나는 생리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눈썹이 웃자라기 시작하는 시기는 대략 오십 대 이후다. 생의 계절이 이미 가을로 접어든 시기다. 이 시기에 남성들은 생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삶의 무게를 느껴 생에 대한 회의성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런 눈썹을 가위로 자르는 행위는 회의적인 지금의 삶을 개선하고 싶은 심리상태를 실현시키려는 행동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려는 인간의 심리는 이기심에서 발원한다. 이기심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뒤로 미루고 다시 시편으로 돌아와서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본분에 속하는 도리라는 것을 은유하기 위한 것이다. 사슴벌레는 성질이 매우 급한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마루 끝에 머물다 갔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사슴벌레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슴벌레다. 따라서 이 사슴벌레는 메타포다. 이렇게 의인화된 사슴벌레는 그러니까 성질이 급해서 마루에 있다가 간 게 아니라 화자의 어려운 처지를 배려해 방안까지 들어오지 않고 돌아갔다는 의미의 알레고리다. 그래서 화자는 아무 대접도 하지 못하고 보낸 사슴벌레가 마음에 걸려서 엽서를 써서 안부를 묻는 사람의 도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사슴벌레의 배려나, 그런 사슴벌레에게 안부를 묻는 화자의 마음은 모두 삶에 대한 도리이며 이런 도리는 곤충과 사람의 관계일지라도 삶의 본분이라는 것을 은유하게 된다. 즉 이 메타포에는 삶을 통한 관계의 정치성이 은유되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고장 난 감나무”는 그 나이의 삶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감나무 그늘”은 그런 삶의 슬하를 일컫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이 아니다. 감나무다. 잘 살펴보면 감나무에는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나무가지는 보기에는 튼튼하고 멀쩡해 보여도 하중이 얹히면 의외로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쉽게 부러지기 때문이다. 삶도 그런 것이고 특히 늦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의 삶은 더욱 그렇다. 이런 삶이 우리의 보편적 삶이고, 삶이 이럴 때 우리가 종종 먼 산을 쳐다보는 것처럼 화자도 먼 눈빛으로 기러기를 세다가 그만두는데, 그만둔 이유를 유추해보자면 기러기들이 집의 추녀 끝으로 스며들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 시행의 의미는 가족과 떨어져 외지에 나가있거나 아직 귀가하지 않은 슬하들을 생각하는 화자의 애틋한 감정의 은유다. 그럴 때, ‘저녁’은 ‘부엌’으로 ‘사무치게’ 온다. 이처럼 『북항』에는 처음부터 삶에 부여되는 존재론적 정치성을 은유하는 시가 등장하며, 이런 정서는 여러 시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되다가 급기야는 현실정치로의 참여를 시도하게 된다. 이에 합당한 시적 진술들을 살펴보자면,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에서는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간다거나, “기적 소리처럼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을 견뎌야” 한다는 진술로 나타나기도 하고 「북항」에서는 “〔……〕한자로 적어본다, 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이라고 쓸쓸히 자조하다가 「연륜」에서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자꾸” 묻게 되고, 「찔레꽃」을 보면서는 “〔……〕봄비는 하얗게 질렸다〔……〕// 자책, 자책하며 봄비는/무려 오백 리를 걸어”, 「익산고도리석불입상」까지 가서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향과 현실의 거리를 자탄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 거리의 간격을「폭」을 통해 “〔……〕사랑이여/ 너하고 나 사이 허공의 폭을/ 자로 재기만 할 것인가” 따져만 묻는, 소심함을 벗어나려고 「배꼽」에서 몸의 중심에 있는 배꼽을 눈의 이미지로 읽어내는 놀라운 비유법으로“〔……〕내 조국은 이십대의 배꼽을 가리려고 군복을 입혔고/ 나는 제일 늦게 마르는 습지의 울먹이던 웅덩이를 삽으로 메웠다”는 감동을 주면서 “꽃에도 배꼽이 있나, 살펴보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고 담담히 술회하지만, “몸 바깥으로도 나가지 못했다/ 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배꼽처럼 살았다”는 것을 자각하자 “〔……〕내가 배꼽을 달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배꼽 끝에 달린 마대자루가 바로 나였다/ 언제까지 배꼽을 파먹으며 영위할 것인가?/ 그러니 부디 배꼽을 풀어주자, 배꼽을 풀어주자”고 굳게 다짐하다가도, 「사다리와 숟가락」을 회상할 때면 “〔……〕달의 복숭아를 몰래 야금야금 퍼먹는/ 어떤 아이가 있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운”게 기억나면서 “〔……〕수천 개의 달이 복숭아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그 아이네 집에서 달을 갉아먹는 벌레가 되고 싶”어하던 ‘나’는,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어 나를 때리는 아버지의 꿈(다행이다)을” 꾸고 난 뒤 “움푹한 숟가락으로 매일 국물을 떠먹으면서도/ 내 숟가락은 망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필자가 화자가 꾼 아버지 꿈에 왜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이냐면 그 꿈은 실현될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꿈이라서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복숭아나무로 자식을 때리는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관습에 따르면 복숭아나무로는 회초리를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부리는 능력이 있어서 복숭아나무 로 자식을 때리면 자식이 미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꿈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꿈은 해석의 전복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꿈이 시인에게 사유의 전복을 불러와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로 하여 조바심을 내게 되는데 그 이유가 “요즘 아이들은 그 누구도 달을 따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나부터 지붕에 오르는 일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런 화자 또는 시인의 갈등은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처럼 “〔……〕구름 한 점 없는 밤마다 풀숲에서 자지러지던 별들은 떠났다 이제 별들과 풀벌레는 교접하지 않는다 별들이 풀밭에 설치했던 보면대(譜面臺)를 별자리라고 우기며 운명을 맡기는 자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다 땅에서 풀벌레가 울고 하늘에서 별이 운다고 믿던 단결과 연대의 시절은 분명히 갔다 나도 자주 아프면서 나이를 먹었다”고 고백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바라건대 우리 동네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악보를 떠올리는 아이들이 부디 없었으면 좋겠다 얘들아, 풀벌레 소리를 까마중 따먹듯이 따먹어다오 너희가 폐허에 숨은 음표잖니? 풀벌레 소리만 듣고도 그 풀벌레가 경작하는 풀잎을 그려 나에게 보여”달라는 정치적 희망을 놓지 않는다. 위의 시편들의 이런 시구들에는 인간 본성으로서의 정치적 정서가 은유되어 있는 것이지만, 보다 직설적이고 분명한, 시인의 정치의식을 드러내는 시편들도 다수 있다. 방관자적 태도를 비판하는 「명궁」이 그렇고 농활을 빗대어 세대 간 이념의 갈등을 보여주는 「송찬호 형네 풀밭에서」와 「울진 금강송을 노래함」도 그러하며, 무엇보다 「靑莊館全書」 와 「강」은 특정인과 특정인이 벌인 정책을 대놓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처럼 시인이 드러내 보이는 정치성향의 명분은 대체로 작고 보잘 것 없는 대상들에 대한 혹애(惑愛)에서 비롯된다. ‘두더지’ ‘올빼미’ ‘땅강아지’ 같이 시대와 불화해 퇴화를 진화의 방식으로 택하거나, ‘영산홍’ ‘채송화’ ‘풀벌레’ 같이 쉽게 다치고 꺾여 업신여김 받는 것들로부터 발원한다. 이런 상대적 약자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시인의 정치성향은 정치의 이상(理想)으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마땅히 당연하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는 비현실적인 것이 되고 마는 정치성이다. 따라서 시인은 상대적 약자들의 기능이나 권리가 침해당하는 현장에 대해 저항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시인이 어떤 정치성을 보이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 동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 약자에 대한 시인의 이타적 정치성향도 그 이기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시에서 화자 또는 시인의 이타심은 이기심으로서의 이타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의 입장에서의 정치성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이 점을 모를 리 없는 시인은 그런 것들에 대한 끔직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정신으로 시인은 「노점(露店)」을 통해 길가의 꽃밭에 갇힌 꽃들과 공공근로를 나와 그 꽃밭을 돌보는 노인들과 자신의 시를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냉정히 생각해 본다면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정치성향을 갖는 것이며 시인도 인간인 이상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집단사회의 통제와 구속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지만, 이런 통제와 구속을 벗어나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게 또 예술의 본질이므로 인간 본성의 욕망은 어쩔 수 없이 또 자유를 갈구하게 된다. 이런 인간 본성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욕망의 갈등이 예술을 창조하며, 예술의 창조성은 그 갈등 너머를 지향할 때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와 문학은 길항하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시가 위치해야하는 지점이 정치든 그 무엇이든, 그것 너머에 있을 때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정치가 뜻밖에도 이성적이지 못하다는데 원인이 있다. 절대적으로 이성적이어야 할 것이 이성적이지 못한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이기심이다. 한편 인간의 이성이 이성적이지 못할 때 표출되는 감정 또한 이기심의 발로다. 이런 감정들이 시로 견인될 때 인간의 본성적 욕망은 갈등하게 된다. 안도현은 이런 갈등을 「술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라고 명명하지만, 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갈등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예술의 가치가 이런 혼란스러운 현실 너머에 존재했을 때 우의를 점할 수 있다는 점과 시인도 한 인간으로서 참여하게 되는 정치적 정당성과의 갈등에 대한 논의는 인간 본성의 기반이 이성에 있는 것인지 감정에 있는 것인지의 해묵은 논쟁의 연장선에 있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의 입장에서는 이성과 감정 중 어디에 우위를 두든 작품에 국한해 말해져야하는 것이니까 실재하는 상황과 실제적 경험, 그 너머를 우선적으로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비평의 입장에 따라가다 보면 『북항』을 생산해내기 이전까지의 안도현의 시편들에 드러나는 정치성은 관념적요소가 많았다면, 『북항』에서는 구체적인 실체(實體)를 드러내 시적 진실성이 높아졌다는 판단에 동의하게 만든다. 지명도에 비례해 사실 안도현의 작품들이 다른 시인들 보다 비평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안도현의 시들이 어떤 비평가들로부터는 공감을 얻어내는데 실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것은 안도현의 그동안의 시적 작업이 해직교사로서 세상을 바꾸려는 ‘싸움’이었다 하더라도, 해직교사라는 신분이 시의 무기는 될 수 있어도 예술의 무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어떻든 안도현의 이번 『북항』은 『북항』 이전의 시편들과 차별화된다. 그 차별성은 이전까지는 시인이 시적 대상과의 싸움의 도구로 삼았던 사랑이 구체적이지 않았다면, 이제는 구체적 사랑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시인에게 「문경 옛길」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쓰게 했을 것이다.
가파른 벼랑 위에 길이, 겨우 있다
나는 이 옛길을 걸으며 짚어보았던 것이다
당신의 없는 발소리 위에 내 발소리를 들여놓아보며 얼마나 오래 발소리가 쌓여야 발자국이 되고 얼마나 많은 발자국이 쌓여야 조붓한 길이 되는지
그해 겨울 당신이 북쪽으로 떠나고
해마다 눈발이 벼랑 끝에 서서 울었던 것은,
이 길이, 벼랑의 감지 못한 눈꺼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문경 옛길」전문
이 시를 읽는데 문득 안도현의 출문작(出文作)「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역사에서 성공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결국에는 실패함으로써 그 사실이 엄중히 기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역사는 미화됨으로써 왜곡돼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성을 상실한다. 이 시에는 어떤 정치적 수사나 정황도 없지만 역사성이 은유돼 있어 정치성 또한 당연히 은유하게 된다. 필자는 이 시를 통해 안도현의 시들이 보여주는 사물과 인간에 대한 미쁨의 정치성이 하루아침에 발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시인은 「문경 옛길」을 오래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에서든 현실세계에서든 시인 자신이 꿈꾸는 정치의 이상향이 이루어질 수는 있는 걸까? 시인은 「설국」에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한다. “나의 불명을 탓하며 저녁을 굶는” “나”를 통해 그 책임의 일단을 같이 하려는 결의를 보인다. 왜냐하면 권력의 향일성(向日性)을 상징하는 “호랑이”의 본질이 고양이 과(科) 포유류라는 것은 바뀔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아놓은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었고,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사지를 뻗고 쓰러져 있었다”는 발설을 보자면, 그것이 실패할 것임을 알고도 ‘나’는 호랑이의 주살을 명령한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성은 그것이 행동으로 이행될 때만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불명을 탓하며 저녁을 굶는’, 다소 과장된 ‘나’의 결기에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의 문제에 있어서 감정의 과잉은 공감에 장해가 되기도 한다. 물론 전체적 맥락에서 시인의 감정 토로는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오는 매개가 되는 건 분명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감정의 과잉은 시적 진실성과 진정성을 약화시키는 반작용도 가져온다. 그만큼 시에서의 감정처리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진지하고 세심해야 한다는 논지를 필자는 따른다. 그런 입장에 따라 「일기」에서도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다는 진술에 독자인 필자는 적극 공감하면서도 감정의 과잉을 느끼는 모순을 경험했다. 물론 화자 또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던 게 분명하고 진지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낼 정도의 여유가 있는 일상이라면, 그런 여유조차 없는 독자들에게는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칠 정도로 온다는 감정 표현은 과장된 느낌으로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이 진실 된 감정이라도 시인은 감정에 도취되기 보다는 객관적 입장에서 보다 순화된 감정처리를 하는 것이 진정성 면에서 공감대의 폭을 넓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시를 읽을 때 그것이 명백한 것이라도 필자는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오독을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서 줄곧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지만, 받아드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핑계로 스스로를 정당화 시킨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실례되는 일이지만 「일기」에서도 ‘기러기 일흔 세 마리’를 세다마는 화자의 세밀한 감정처리에 푹 빠져들던 필자는 이어 나오는 ‘사무치’는 감정에 공감했으면서도 감정의 과잉도 느끼게 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무치게’를 여러 번 다른 감정 표현으로 오역하고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사실 시에서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기발한 감각은 독자들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감정의 과잉이 시를 왜소하게 만드는 약점인 것만은 틀림없고, 또 종종 시가 목적했던 바를 이루는데 방해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안도현은 필자의 이런 염려까지도 충분히 염두 했던 것을 나중에 「시인의 말」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독자이기 이전에 비평의 우둔함이 앞선 탓이다.
시인은 『북항』을 펴내면서 고심했던 것 같다. 그 고심은 시에 드러나는 정치성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서사적 구조로 인해 시인의 서정이 침해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안도현의『북항』은 이전의 시집들 보다 의미 있는 시적 성공을 거뒀다고 해도 마땅하지만, 시인은 이런 시적 현실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예술성과의 갈등에 대한 고민을 「아득하기만 한 당신」을 통해 이렇게 토로한다. “( ……〕아득하기만 한 당신아, 서정아, 이 몹쓸 년아,/ 너는 어느 유곽에서 또 몸을 팔고 있느뇨?” 참여의 정신을 서정의 정서로 온전히 구현하지 못하는 시인의 자탄일 수도 있는 이 진술은 「시인의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투명과 불투명 사이, 명징과 모호함의 경계쯤에 시를 두고 싶었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개판 같은 세상을 개판이라고 말하지 않는 미적 형식을 얻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말과 문체를 갱신해 또 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 소출이 도무지 형편없다. 저 들판은 초록인데 나는 붉은 눈으로 운다.” 그렇다, 저 들판의 초록은 조화로운 균형을 잃지 않으나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어 붉어진 눈으로 울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안도현은, 어느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성보다 감정에 충실한 낭만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