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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주는 선물
박수빈
사람들은 세월이나 나이를 이중적인 잣대로 대한다. 일례로 시비가 붙었을 때 한 살이라도 많으면 싸움의 본질이나 원인을 논하기에 앞서 나잇값을 먹고 들어간다. 그렇지만 취업은 젊은 사람이 유리하다. 기업은 어린 사람을 뽑아 정년을 보장할 것도 아니면서, 나이 많은 사람을 홀대한다. 경력자들의 노하우를 대접해주자면 비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어느 연령층이나 힘든 연유가 있기 마련이고, 복합적이거나 거시적인 문제는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된다. 기득권을 누리는 일각에서는 이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무심한 것 같다. 울분과 불편을 해소해주려면 말로만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기성세대는 우리도 힘든데 왜 젊은 애들 밥그릇까지 신경을 쓰나 싶고, 젊은이들 역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젊은이는 우리 사회의 미래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불굴의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출신이 부족해도 꿈을 이룰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못하는 시스템이다. 애초부터 불공평해서 느끼는 절망은 사회에 대해 분노의 화살을 쏠 것이다. 전반적인 것들을 돌아보고 우리보다 먼저 겪은 북유럽 사회가 미래 세대에 투자한 노력을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난 계절에 각종 문예지에 발표된 시를 읽다가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군상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연배마다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이 눈길을 끌었다. 경험은 숙련을 낳고 쌓인 통찰력은 시간이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르고 연륜이 쌓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아가 삶을 사랑하는 자세는 어떤 것일까. 이 시대를 사는 나이면서 당신이고 또는 우리의 이면이 여기에 있다. 자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타자와 통하려는 언표들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살펴보자.
흰 낙타는 속눈썹도 흰색이었다 원 달라, 원 달라, 쉰 목소리에 고삐가 묶여 있었다 바람이 올 때마다 사막의 마른 빵 냄새를 풍겼다 바싹 마른 다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견디고 있었다 앞무릎을 꿇고 언제라도 뒷무릎마저 굽힐 자세였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이 한 번 앉아보고 내리는 낙타의 잔등은 비어서 외따로 높았다 한 무리 관광객이 빠져나갔다 살구꽃이 풀리고 있었다 하얗게 어둑발이 내렸다 저녁기도 시간이 왔다 무엇일까요, 무엇일까요, 집게손가락을 제 귓구멍에 넣고 묻고 있었다 마지막 장이 찢어진 경전처럼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했다 낙타의 눈동자에 물기가 돌았다 흰 빛이 된 말이 길고 가는 속눈썹에 내려앉았다
- 한영수,「숨은 신」,『모든시』, 2017년 겨울호
이 시는 객관적 상관물인 낙타를 통해 ‘숨은 신’과의 관계 혹은 의미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시앙 골드만은 그의 저서『숨은 신(The Hidden God)』에서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숨은 신’의 개념을 빌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극적 세계관이 바탕을 이룬다고 말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아 ‘숨은 신’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의 제목과 내용을 연결해 보면 낙타가 지내는 모습은 ‘숨은 신’ 찾기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숨은 신’의 자리에 “저녁기도 시간”을 대입해도 무난해서 결국 숨어있는 내 안의 소망 내지 타자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고 보면 종교는 인간이 절대자에게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처절한 체제로부터 고통 받는 삶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시의 화자는 관찰자 시점으로 숨어 있고 낙타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진행하는데 낙타의 입장만 읽는 것은 일차적이라 깊이 있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낙타이든 사람이든 고달픈 생의 궁극에는 숨어있는 내 안의 자신을 찾는 과정으로 귀결이 된다. “사막의 마른 빵 냄새를 풍”기면서 “바싹 마른 다리” 그 지친 낙타의 모습은 힘든 현실을 견디는 필부필부들의 모습이라 해도 진배없다. 인간이 ‘숨은 신’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과정은 숨어 있는 진실을 찾는 과정과 닮았다. 그런 면에서 “낙타의 잔등은 비어서 외따로 높았다”는 표현이 역설적이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진정성을 찾아 부단히 애쓰는 삶은 일찍이 시인 백석이 표현했듯이,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그야말로 낙타의 소슬한 잔등 이미지는 시인의 고결한 모습과 겹쳐진다. “무엇일까”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는 대목은 생의 문제의식을 찾아가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힌다. 마지막의 “흰 빛이 된 말이 길고 가는 속눈썹에 내려앉았다”는 알레고리의 맥락으로 무화된 말이 떠오른다. 우직한 낙타를 통해 물질화된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소시민의 나날들과 연동하여 감상해도 좋겠다. 관광객의 관점에서 보면 고삐 묶인 낙타에 불과하지만, 낙타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면 폭력적으로 짐을 얹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를 이끌어가는 숨어있는 화자는 담담한 듯 따스하게 바라보는 안목으로 돋보인다.
다시 올까? 썩은 가지는 떨어져 부서지고,
목이 없는 해바라기 대궁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발아래
부서지는 서릿발
장다리 꽃필까? 얼음 박인 봄동
밤나무 가지에 비닐 걸려 날리고,
다시 싹틀까?
저수지
살얼음 위에 날리는 눈발
물오를까? 뒹구는 새의 부러진 뼈
머리는 부리를 달고
육탈을 기다려
다시 날아오를까, 연두는
우화(羽化)처럼
- 장철문,「연두생각 – 춘화첩」,『시로 여는 세상』, 2017년 겨울호
‘춘화첩’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계절이 지나버린 시점에서 봄의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썩은 가지”, “목이 없는 해바라기 대궁”, “서릿발”, “얼음 박인 봄동”, “새의 부러진 뼈” 등은 모두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하며 스산한 풍경화를 그리는 대상들이다. 이들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쇄락과 소멸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늙어가는 심정은 미처 모르다가 그 나이가 되어야 피부로 실감할 것이다. 열애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온정이 흐르고 휴식 같은 여유가 노년에 찾아올까. 이 시는 비감과 위로가 섞여 그리워지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심경이 복합적으로 읽힌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관대해지고 고상해지길 기대한다. 마법처럼 생의 비의를 알게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바란다. 그러나 그 나이를 먹고 나서도 여전히 이상과 다른 현실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초췌할 때 있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꾸어서 나이를 먹을수록 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는 것이니 내려놓는 심정으로 무심해지면 어떨까. 노년이 되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뉜다. 다사다난한 일들을 겪은 몸의 한계를 인식하는 데에서 지혜는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한다. 젊은 날에 비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무모한 것을 내려놓으면서 혜량은 커진다. 화자 역시 젊은 날에 비하여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체득하고 있다. 이 깨달음은 그동안 마음을 다스려온 덕분일 것이다. “연두”로 상징되는 풋풋함은 앞으로 겪게 될 질풍노도와 좌충우돌을 가리키고 맨 마지막의 “우화(羽化)처럼”은 지난한 점철들로 이루어진 탈바꿈을 가리킨다. 한계를 시인하면서 역설적으로 지혜는 출발하고 있으니 이는 새로운 변이가 아닌가.
인생의 여름을 보내고 나면 즉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시간이 격렬하게 지나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느끼고 찾아오는 것은 무상감과 허무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 인생의 정답은 생각하기 나름일 텐데, 다음의 시를 보면 질문이 양산된다.
우리는
아직 아버지는 아니고
어머니는 더더욱 아니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에 적당할 나이
책상 위에 놓인 청첩장의 디자인을
살펴볼 나이 예쁘고 작은 종이에서 단서를 찾아
남의 삶 전반을 추리하는 나이 그럼 그렇지 그렇다면
대봉하는 나이
나는 오늘 저녁 좋은 아빠의
상징인 베스킨라빈스에 갔다
단단하게 얼어버린 설탕 덩이를 뜨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손목을 애처롭게 여기는 나이지만 카드를 내밀기 전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나이이며 포인트 적립과 사은품을 챙기며 드라이아이스가 되는 나이이다
초콜릿과 녹차가
섞이고 가운데는 단단한데
한갓진 데는 녹기 시작한 나이가 됐다 이렇게
얼마나 이렇게 더 살아야 하나 20년 지나 30년
나는 은행과 약속을 했다 죽지
않기로 성실히 살기로 이 약속은 녹지
않는다 동료의 조모상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우리 할머니가 몇 살이더라
남의 삶 전반이 가늠되지 않는
나이 우리는
단 것을 먹으면 혀가 간지럽고
쓴 것을 먹으며 혀를 긁는다
건강을 위해 이렇게
내가 좋은 아빠다 죽지 않는 아빠다
노인의 빈소
모락거리는 연기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다
드라이아이스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30년의 장례를 준비한다
삼가, 열심히 녹으면서
- 서효인,「서른을 훌쩍 넘어 아이스크림」,『시인동네』, 2017년 10월호
화자가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다가 거기서 벌어지는 소회를 다루고 있다. 서른을 훌쩍 넘었으나 이 나이는 아직 부모가 되지 않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에 적당할 나이”라고 언급한데서 요즘 결혼 적령기나 출산이 늦어지는 세태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봉하는 나이”이므로 있는 자체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신하여 받기에 대리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다가 아이스크림은 연기가 모락거리며 드라이아이스가 된다. 고체가 녹아 액체가 되는 중간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화되어 사라지는 드라이아이스. 이 현상은 “30년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으로 연결이 되면서 허망하다. 독자로 하여금 오랫동안 시선을 붙잡게 한다.
또한 행간을 걸쳐 진행함으로써 이 시는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나는 은행과 약속을 했다 죽지/ 않기로 성실히 살기로 이 약속은 녹지/ 않는다 동료의 조모상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우리 할머니가 몇 살이더라”에서 갈등하고 불편한 심정이 드러나고 있다. 서른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한갓진 데는 녹기 시작하는 나이”라는 좌절감의 표현이다. 우리는 보통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이 무언가 성취를 이루었을 때 나는 그동안 뭐했나 싶고 이룬 게 없다는 생각에 열패감을 느낄 때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스스로가 미워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과 같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 것이므로 이 시의 정서를 공감하는 독자가 많다면 이것은 비단 개인의 일이 아니라 사회로 확대되며, 처한 상황은 더 불리하게 다가온다. 다수의 시선을 의식하면 나의 처진 모습을 격려하기보다 초라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런 환경 속에서 나마저 자책하면 누가 날 사랑할 것인가. 자신을 힘들게 하지는 말았으면....... 이 시의 화자도 다짐을 하고 있지만, 맥락상으로 애처롭다. 아직 눈에 띄게 이룬 것이 없다면 상대와 내가 걷는 걸음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위안을 해 보면 어떨까.
이 시를 음미하다가 고개를 들어본다. 훌쩍 날아가는 새로 치환해 감상해 본다. 기러기는 기러기의 방식으로 날고 독수리는 독수리의 방식으로 산다. 그 어떤 비둘기도 참새처럼 날지 않고 종달새가 부엉이처럼 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인간도 같은 나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는다. 개체마다 어울리는 속도와 몸짓이 있기 마련인데, 가늠하는 일은 왜 이리 어려운가. 이어지는 시에서 새의 자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작은 플로리캉 새가//
겅중겅중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다//
제 몸보다 몇 배나 높이 뛰어올랐다가//
날개가 채 접히기도 전에 비상한다//
비상이 걸린 날개//
위험에 노출된 이 숨찬 간극이 구애법이다//
무성한 풀숲에서 풀보다 더 높이//
더 깊이 제 심장을 쫀다//
위험이 코앞일수 있는데//
적의 그물망이 두려울 만도 한데//
제자리를 맴돌며 뛰고 또 뛴다//
죽을 만큼 사랑해 본 적 있는가//
나는 대답할 입도 귀도 없다//
온 허공이 새장인 것처럼 갇혀서//
수백 번을 맹목으로 뛴다//
수직낙하 충격 잊고//
망가진 무릎으로 뛰고 또 뛴다//
- 김상숙,「사랑의 자세」,『시와정신』, 2017년 겨울호
플로리캉 새의 수컷은 짝짓기 상대를 유인하기 위해 공중으로 2~3m까지 날아올라 재빨리 날개를 거두고 땅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를 하루에 500번까지 한다고 하니 가히 놀랍다. 구애하는 동안 포식자에게 노출이 될 수도 있고 관절에 무리가 될 수도 있고 숨 쉬기가 힘들지라도, 오로지 사랑만을 생각하면서 “뛰고 또 뛴다”고 한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러할까. 지극해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고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죽을 만큼 사랑해 본 적 있는가”하고 자문하는 화자에 견주어 최선을 다하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심혈을 기울이는 동안 우울과 좌절이 따를 수 있다. 만약에 성공과 패배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말한다면 그 말에 무게가 실릴까. 성공한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잘될 거라고 조언한다거나 저렇게 하면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공하거나 실패해본 적이 없다면 그들이 하는 말은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흘러간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쯤이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노력 끝에 느끼는 우울함이나 허망함과 같은 감정들은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원하는 것은 “이거야” 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려갔지만 막상 당면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더라도 경험해 보고 후회하는 것이 경험해 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꿈꾸었던 것과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집착이나 아집을 내려놓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에 행복하고 슬퍼하는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정열의 시간을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열정을 다한 시간은 넓어지고 깊어지는 사유의 시간이며 값진 선물이다.
“나는 대답할 입도 귀도 없다”에서 보건대 지나간 삶은 미흡하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상실감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소외되기도 한다. 일상에 쫓겨서 즉 어제 충실하게 살지 못하고 오늘을 맞는 경우도 많다. 과거의 일이나 기억이 소멸하며 오늘이 되는 것도 아니라 아쉬운 채로 하루하루를 보낼 때도 있다.
행갈이를 하면서 천천히 음미하게 한 의도를 따라서 절실함을 돌이켜 보게 된다. 좌충우돌하거나 지름길을 돌아서 먼 길을 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타협하며 대충 사는 것과 소신이란 무엇일까. 섣불리 진단하는 것은 오만이겠다. 몸부림치는 플로리캉 새의 자세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극한의 상황에서 막연한 희망을 찾기보다 우리가 내일을 향해 꿈을 꾸고 실행하는 오늘이 사실은 스스로를 벼리는 귀한 시간이겠다. 잔꾀를 부리지 않는 치열함이 참될 것이다. 플로리캉 새의 몸짓을 떠올리니 너무도 절절해서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하다. 타자의 고통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시인의 감수성이 와 닿는다.
공원 벤치에 다소곳이 앉은
청년의 목에 무언가 걸려 있다
산뜻한 청색줄이다
청년 실업자 53만 명의 이 팍팍한 시대에
용케도 직장을 잡았구나
가까이 다가서니
눈코입이 한쪽으로 몰린
흐릿하게 촉수 낮은 눈빛
목걸이에는 커다랗게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언제쯤 이 세상에 입사했을까
언뜻 보아 이십 년은 넘어 보이는데
완벽과 속도만이 최고인 이 치열한 현장에
어느 날
문득 낯설게 떠밀려 왔을
고군분투하며 걸어왔을
이름표 하나에 자신의 직함을 걸어둔
명예퇴직도 정년도 걱정 없는
'이세상지구주식회사'
청년의 입가에 말없이 번져나는
저! 비(非)웃음
- 엄정옥, 「입사」,『애지』, 2017년 겨울호
내리읽어갈수록 앞부분의 긍정성이 뒷부분으로 가면서 “비웃음”으로 바뀌며 반전을 이룬다. 이 시는 “공원 벤치에 다소곳이 앉은” 청년의 모습을 통해 살기 “팍팍한 시대”를 스케치하고 있다. 태어나면서 “이세상지구주식회사”에 신입이 되었고 “완벽과 속도만이 최고인 이 치열한 현장”은 견디기 어렵다. 어릴 때부터 대학에 가기 위해서 밤낮없이 공부를 해야 해서 힘들고, 대학을 가더라도 졸업 후에는 좁은 취업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취업 후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그 뿐만 아니다. 내 집 마련까지 생각하면 한 고개를 넘고 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고개의 수순이 숙제처럼 기다린다. 대학 등록금이 비싸고 결혼자금도 부담이 가고 집 장만은 더더욱 버거운 현실에서 젊은 세대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꿈과 희망을 포기하고 나아가 인간관계까지 포기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언제쯤 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올까? 좌절했다가도 다시 일어서서 행복하려고 “고군분투하며 걸어왔을” 개개인을 생각하면 감상자 역시 어깨가 무거워진다. 청년의 목에 걸린 이름표는 고독과 불안이 뒤섞인 표상이다. 집단인 회사에 속해 있으나 외로운 개인이며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웅크린 채 감정들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연상된다.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고독한 단독자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생활에 얽매여 있고 사회 조직에 속한 일원으로서 움직이니 자유롭지 않다. 그러다 보니 자아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 시처럼 태어나는 순간의 “입사”는 개인을 잃어버린 체제 속의 세상에 편승하는 것이다. “용케도 직장을 잡았”으나 “눈코입이 한쪽으로 몰린” 상황이니 단체생활에서 개인의 정서를 인정하지 않고 몰아가는 것으로도 독해된다. 사회의 일방적인 질서로부터 개인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독과 불안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를 읽으며 질문이 가지를 뻗어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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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빈 약력 : 전남 광주 출생,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 활동 시작, <열린 시학> 평론 등단, 시집『청동울음』, 평론집『스프링 시학』, 『다양성의 시』, 상명대 강사, wing28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