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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훈련 ] : 삼학 (11과목)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아야한다.
( 과목)
1.정신수양 : 염불(念佛). 좌선(坐禪) : 2과목
2.사리연구 : 경전(經典)·강연(講演)·회화(會話)·의두(疑頭)·성리(性理)·정기 일기(定期日記) : 6과목
3.작업취사 : 상시 일기(常時日記)·주의(注意)·조행(操行) : 3과목
(경전)
우리의 지정 교서와 참고 경전 등을 이름이니, 이는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
지정 교서:
1. 7대교서 : 교전,정산종사 법어,예전,불조요경,교사,원불교교헌,성가
2. 9대교서 : 교전(정전,대종경),정산종사 법어(세전,법어) 분리,예전,불조요경,교사, 원불교교헌 ,성가
*교헌을 제외한 것을 전서라 한다.
정법시대--->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실지로 훈련하여 구전 심수의 정법 아래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함.(수행품22장)
구전 심수 :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말로 전해주고 마음으로 가르쳐 주는 것
참고 경전 :
원불교의 관련자료, 타종교의 경전
(강연)
사리간에 어떠한 문제를 정하고 그 의지를 해석시킴이니, 이는 공부인으로 하여금 대중의 앞에서 격(格)을 갖추어 그 지견을 교환하며 혜두(慧頭)를 단련시키기 위함이요.
*대소유무와 시비이해 해석(단련)
(회화)
각자의 보고 들은 가운데 스스로 느낀 바를 자유로이 말하게 함이니, 이는 공부인에게 구속 없고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하며 혜두를 단련시키기 위함이요.
(의두)
대소 유무의 이치와 시비 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의 화두(話頭)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하는 것이니, 이는 연구의 깊은 경지를 밟는 공부인에게 사리간 명확한 분석을 얻도록 함이요.
*법강항마위 이상, 교전(사리간 명확한 분석)
(성리)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요.
(정기일기)
당일의 작업 시간 수와 수입 지출과 심신 작용의 처리건과 감각(感覺) 감상(感想)을 기재시킴이요.
의두요목(疑頭要目):방길튼 교무
1. 세존(世尊)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제도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세존이 왕궁가에 태어났으나 도솔천을 여의지 않았다는 불교설화입니다. 도솔천은 고락초월의 극락이라면 왕궁가는 고락 상반의 사바세계라 할 것입니다. 또한 태어나기 전 모태 중에서 중생 제도를 마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제도할 중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태산은 봉래정사 주재 시 한 스님이 ‘의두요목 1조’에 해당하는 화두에 대해 물으니 “그대가 실상사를 여의지 아니하고 몸이 석두암에 있으며, 비록 석두암에 있으나 드디어 중생제도를 다 마쳤나니라.”(대종경 성리품 16장) 답하십니다. 개념적으로 ‘도솔천’은 무엇이고 ‘왕궁가’는 무엇이며 ‘모태에서 중생제도를 마쳤다’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생각만 이어 굴리면 분별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러한 생각에 붙잡혀 있으면 그러한 생각을 드러내는 자리는 망각되고 맙니다. 지금 당장 ‘세존, 도솔천, 왕궁가, 모태, 중생제도’라는 심상에 붙잡혀 있는 그 생각을 내려놓고, ‘도솔천’이라 알아차리고 있는 그 자리, ‘왕궁가’라 알아차리고 있는 이 한 자리에 그쳐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솔천을 드러내는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왕궁가가 드러나는 이 자리’가 두렷한 것입니다. ‘모태’라는 한 생각이 드러나는 자리가 본래 온전하기에 ‘중생제도를 다 마친 자리’이고, 이 자리에서 ‘중생제도를 다 마쳤다’는 자각도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디에 있든 어느 때가 되었든 불리자성(不離自性)하는 것입니다. ‘도솔천’이란 한 생각에도, ‘왕궁가’라는 한 생각에도 자성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2. 세존이 탄생하사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세존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족이라 선언하였다는 이야기로, [원불교교전]에 새롭게 추가된 조목입니다. 여기서 일곱 걸음은 육도 윤회를 벗어났다는 것이며, 그렇게 벗어난 일곱 발걸음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을 것이 아니라, 곧바로 지금 당장의 이 현존이 유아독존 자리임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할 때 앞에 역력하게 드러나 있는 현존처 여기를 직시하면, 이 자리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천상’이다 ‘천하’다 할 분별마저도 붙을 수 없는 청정한 자리로, 성주의 만세멸도 상독로(常獨露)의 자리입니다. 항상 홀로 드러나 있는 자리로 비교할 것이 없는 독존의 절대 자리입니다. 자학도 자만도 붙을 수 없는 원래마음 자리입니다.
3.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대중이 다 묵연하되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만이 얼굴에 미소를 띠거늘, 세존이 이르시되 내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 가섭에게 부치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연꽃이 드러난 자리’를 돌이켜 직시하면 그 자리가 온전한 자리이고, ‘미소 짓고 있는 마음당체’를 직면하는 염화미소처가 온전한 자리입니다. 꽃이 드러난 자리이든 미소를 보인 자리이든 그 당체가 바로 본래마음으로 정법안장입니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의 연꽃도 마음에 떠다니는 언어명상의 모양입니다. 이 심상(心相)에 붙잡혀 있으면 그 배경으로 현존하는 정법안장은 모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섭존자만이 미소를 띠었다.’ ‘정법안장을 마하가섭에게 부치노라’ 등도 다 심상(心相)이므로, 이에 걸려 있으면 무슨 수를 써도 염화미소처인 정법안장은 소용없게 됩니다. 염화시중의 연꽃이나 구지일지의 손가락이나 정전백수자의 나무나 다 이 한 자리로, 소리 지르는 할 또는 경책의 방망이질인 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고 있는 이 자리, 듣고 있는 이 자리가 한 자리로 역력한 정법안장입니다. 마치 탁자위의 물건에만 집착하면 탁자를 망각하듯이, 우리 마음의 심상에만 집착하면 그 바탕자리는 영영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탕을 놓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바탕의 전개로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대종경 성리품 1장의 淸風月上時 萬像自然明처럼 시원한 바람에 둥근 달이 떠오르니 만상이 밝게 드러나는 격입니다.
4. 세존이 열반(涅槃)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라는 말에서 이 의두는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뒷말은 경계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함정이요 또는 시험인 것입니다. 열반은 일체의 언어명상이 돈공한 寂靜處에 들었다는 것이므로, 실은 ‘열반’이라 할 것도 없고 뒤이어지는 ‘녹야원’이다 ‘발제하’다 라는 일체의 언어명상의 흔적에 물들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 법을 펴신 녹야원(구시나가라)을 논할 것도 열반에 드신 발제하(베나레스)를 논할 것도 없는 자리입니다. 또한 ‘한 법이다’할 분별도 다 탈락된 자리입니다. 이 열반처를 금강경에서 “여래께서 설하신 바 법은 다 가히 취할 수도 없으며 가히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니”(불조요경 금강경 7장)라 하십니다. 이처럼 열반에 들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에 들었다는 것으로, 만일 마음의 심상 어디에라도 끌리어 분별하고 집착하면 이 열반처에서 삼천리 밖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아 증득했다 법을 설했다는 흔적마저도 없는 자리입니다.
5.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만법귀일 일귀하처’는 소태산께서 자칭 석두거사로 변산 주석 시에 제자들에게 물었던 의두이며 익산총부 공회당 선방에서 제자들에게 던졌던 의두입니다. 선문답 상에서는 한 스님의 ‘만법귀일 일귀하처’의 질문에 조주가 "나는 청주에 있을 때 베 적삼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벽암록 제45칙)라 선문답합니다. 여기서 청주는 청정한 자리며 적삼 하나는 하나 자리이며 일곱 근은 만법이라는 등의 분별에 빠지면 안 됩니다. 이러한 선문답도 분별을 유도하는 장치요 함정입니다. 본래 의도는 이렇게 분별하는 그 본래처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육근문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만법인데 그 만법은 어디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반조하라는 것입니다. 만법인 줄 아는 자리, 하나라고 하는 자리가 둘이 아닌 한 자리입니다. 보는 자리도, 듣는 자리도, 냄새 맡는 자리도, 맛보는 자리도, 감촉을 느끼는 자리도 다 이 자리이며, 이 한 자리에서 감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온갖 생각을 나투는 것입니다. 만법귀일처는 대종경 서품 1장처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입니다. 이처럼 보고 듣고 말하고 하는 것이 다 한 마음의 작용인데, 이 한 마음에도 붙잡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법이다’ ‘하나다’도 다 마음의 형상이기에, ‘하나다’에 매여도 만법이 드러나는 자리는 망각되기 때문입니다.
6.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은 것이 그 무엇인가.
이는 방거사가 마조에게 질문한 화두로, 소태산 대종사가 방언공사를 마치고 휴양처를 물색차 변산 월명암을 찾았을 때 접했던 화두입니다. 이때 소태산은 벽에 걸려 있던 ‘불여만법위려자시심마不與萬法爲侶者是甚麽’를 보고 한 생각에 그 뜻이 떠오르지 않아, 차 한 잔을 대접받고 음미하시는 동안 혼연히 그 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선문답의 형식에 익숙하지 못했고 특히 시심마是甚麽라는 절집용어에 당황하신 듯합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좋아하면 싫어하는 것이 있고 마음에 들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습니다. 이때 좋고 싫어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그 자리를 직각하면 이 자리는 상대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줄 아는 당체’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에 국집된 자리가 아니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 물들지 않는 자리입니다. 좋아하는 줄 알아차리고 싫어하는 줄 알아차리는 자리, 좋아함이 역력하고 싫어함이 역력한 이 자리는 좋고 싫음에 짝할 것이 없는 不與萬法爲侶者로, 상대가 끊어진 절대 자리입니다.
7. 만법을 통하여다가 한 마음을 밝히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통만법명일심’은 최초의 교서인 [수양연구요론]의 권두에 있는 표어입니다. 만법을 통해서 만법이 드러나는 마음당체인 한 마음의 일심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되었든, 듣는 것이 되었든, 맛보는 것이 되었든, 감촉으로 느끼는 것이 되었든 육근으로 감지되는 모든 것은 다 만법입니다. 이러한 만법을 통해서 만법이 드러나는 본래처는 밝히라는 것입니다. 보고 있는 자리를 돌이켜 보고, 듣고 있는 자리를 돌이켜 듣고, 맛보고 감촉하고 있는 자리를 돌이켜 감지하라는 것입니다. 이 본래처는 한 마음인 한 자리로 일심입니다. 정산종사는 "통만법 명일심(通萬法 明一心)의 뜻을 해석하여 주십시오."라는 질문에 "우주의 대소유무와 인간의 시비이해, 이러한 만사 만리를 보아서 나의 마음을 밝히고 또 밝혔으면 이것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만법하여 명일심하기도 하고 명일심하여 통만법하기도 한다.”([한울안한이치에] 제1편 3.일원의 진리 66절) 응답하십니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 한 마음으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통해 만법을 드러내고, 안이비설신의 육근에 드러나는 만법을 통해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한 마음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일심인 한 마음은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 성품자리입니다. 결국 만법과 한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한 마음을 깨치면 만법에 통달하며, 한 마음으로 만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조~4조가 같은 성향의 의두요목이라면, 5조~7조가 같은 계열의 의두요목이라 할 것입니다.
8. 옛 부처님이 나시기 전에 응연(凝然)히 한 상이 둥글었다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송대 자각선사의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이란 화두입니다. 지금 보고 듣고 있는 이 자리, 이 당처, 이 落處가 응연(응결)하게 두렷한 한 자리입니다. 지금 의심이 일어나는 당체가 한 상으로 어리어 두렷한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 한 자리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여기를 직면하면 생멸에 청정한 한 상이 두렷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가운데를 포착하면 증애에 물들지 않는 두렷한 한 상이 역력하며, 좋아죽겠다가 괴로워죽겠다는 이 순간 이전을 포착하면 고락에 부동한 한 상이 두렷합니다. 깨닫기 전에도 한 상이 두렷하고 깨달아도 한 상이 본래 두렷하게 어려 있는 자리입니다. 천지만물 일체 현상이 드러나 있는 이 자리를 돌이켜 반조해 보면 한 상이 두렷하게 어려 있습니다. 이 一相圓 자리는 즉각하는 자리로, 이 자리를 소태산 대종사는 우리에게 일원상으로 일러 주시었습니다.
9.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 몸은 그 어떠한 몸인가.
부모출생전(父母出生前)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는 어떠한 몸일까? 태어나기 전에는, 전생에는 어떠한 몸을 받고 있을까? 죽으면 영혼만으로 있는가? 이런 등등의 생각이 일어날 때, 이러한 생각을 따라 또 다른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분별할 것입니다. 이때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그 당처를 돌이켜 반조해 보라는 것입니다. 생각의 방향을 돌려보라는 것으로, 마음의 후레쉬를 돌려 마음의 바탕을 비춰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별하는 생각을 돌이켜 보면 그 자리가 바로 부모출생전의 자리로, 모태 중에서 중생제도를 마친 자리로써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에 중생제도가 끝난 자리입니다. 부모-자식이라는 고정집착된 생각을 내려놓으면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부모출생전 자리입니다. 부모에 의해 자식이 태어나지만 또한 자식이 있기에 부모가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없다면 부모라는 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도 본래 없는 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자리, 어머니가 없는 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일체의 분별이 떨어진 자리, 어머니라는 일체의 분별이 탈락된 자리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별이 일어나는 당체를 돌이켜 직관하면 본래 어버지라는 권위도 어머니라는 위안의 기대도 본래 없는 청정무애한 자리가 드러납니다. 이 자리가 바로 부모-자식이라는 분별에 고착되지 않는 부모출생전의 본래면목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의 몸을 전생의 몸이라 한다면 또 그 전의 전생의 몸이 있어야 되므로, 이렇게 계속 소급하다보면 끝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의 몸은 태어나기 전의 시공의 몸이 아니라 시공의 조건과 한계를 초월한 법신(法身)입니다. 부모에게 몸을 받기 전의 몸은 청정무애한 법의 몸이요, 법이라 할 것도 없는 몸입니다.
10. 사람이 깊이 잠들어 꿈도 없는 때에는 그 아는 영지가 어느 곳에 있는가.
꿈은 낮에 있었던 억압된 마음이 드러나는 것으로, 이러한 억압된 마음의 나타남인 꿈이 끊어진 자리가 영지입니다. 꿈에 끌려가지 않으면 신령하게 아는 영지가 역력하게 드러납니다. 감수작용과 사고작용이 끊어진, 대상의식이 멸절된 상태(滅受想定)에 들어도 그 아는 영지는 묘하게 있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이 대상이 없으면 비추는 그 자체로 있는 격입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고 이런 저런 행동을 할 때도 다 영지의 나타남입니다. 꿈도 끊어진 깊은 잠에 들거나 또는 잠에서 깨어나 활동하는 중에도 그 아는 영지는 변함없이 여여합니다. 거울은 대상에 따라 그 대상을 온전히 비추듯이 화가 나면 화가 난줄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 아는 영지는 대상이 있으면 있는대로, 대상이 없으면 없는대로 여여한 것입니다. 아는 영지는 거울이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을 비추고, 대상이 없으면 비추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격입니다. 잠자기 전 그 아는 영지를 반조해 보고, 기상하는 순간 그 아는 영지를 반조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11.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대종경] 교의품 27장에서 인의화 여쭙기를 「어떤 사람이 너희 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원래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되는 이치를 스스로 깨쳐 알게 하는 교이니 그 이치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하면 될 것이요, 그 이치를 알고 보면 불생불멸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이치까지도 다 해결되나니라.」 [한울안한이치에]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심을 밝게 해석하여 주십시오. 심이란 관념입니까, 물질의 원소입니까, 일원과 통용입니까?" 정산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도 마음이 들어서 길흉화복과 생로병사를 지어 나가며, 천지도 근본되는 형상 없는 진리 곧 심이 들어서 성주괴공과 풍운우로상설과 유무 변화가 된다. 그러므로 천심이 곧 인심이요, 이는 일원과 같은 의미다. 심이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한 것이다.”(제1편 3.일원의 진리 67절) 불생불멸한 마음자리에서 인과보응이 역력하게 드러나며, 인과보응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불생불멸한 자리입니다. 일반적으로 세계가 밖이라면 마음은 세계를 인식하는 안이라고 여깁니다. 일체유심조의 심은 원래 바깥이 없는 무외(無外)의 마음이요, 한계가 없는 무변(無邊)의 마음, 모든 현상은 이러한 心의 境界입니다. [대적공실]의 ‘大地虛空心所現’처럼 대지와 허공이 다 마음의 나타남입니다. 텅 비어 고요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드러나는 대지허공입니다. 이 마음자리는 대지허공의 바탕인 청정한 심체(心體)이며, 또한 이렇게 청정한 심체에서 대지허공이 두렷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12. 마음이 곧 부처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마음은 희로애락 등의 모든 감정과 생각으로 전개됩니다. 지혜도 자비도 마음의 직용이요 탐진치도 마음의 작용입니다. 있어지는 온갖 마음에 卽해 있는 자리가 텅 비어 고요하여 신령하게 아는 부처의 경지입니다. 탐심의 즉처, 진심의 즉처, 치심의 즉처를 곧장 돌이켜 보면 본래 깨어있는 부처의 경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에 즉해 있으면서 탐심인줄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깨어있는 부처요. 진심에 즉해 있으면서 진심인줄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깨어있는 부처요 치심에 즉해 있으면서 치심인줄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깨어있는 부처입니다. 온갖 마음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마음에 즉해 있으면서 두렷이 깨어있는 자리가 곧 부처의 경지입니다. 부처는 깨어있는 경지로, 이러한 깨어있음은 마음에 卽覺할 때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즉해 있는 깨어있는 경지를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마음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즉해 있는 ‘곧’의 경지로, ‘곧’ 卽은 卽位처럼 이르다, 오르다는 뜻으로 지금 일어나는 마음에서 곧바로 이 마음자리에 즉위하라는 것입니다. 정산종사법어 경륜편 1장에서 “불(佛)은 곧 깨닫는다는 말씀이요 또는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부처(佛)은 마음에 즉해 있는 ‘깨어있음’입니다. 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라 할 때 마음이라 하면 마음에 사로잡히고 부처라 하면 부처에 사로잡히니 마음이랄 것에도 부처라 할 것에도 붙잡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곧 부처라 하면서 또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것입니다.
13. 중생의 윤회되는 것과 모든 부처님의 해탈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경계에 끌리면 윤회하는 것이고, 경계를 자각하여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경계를 굴리면 해탈하는 것입니다.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1장에서 “중생은 소소영령한 영지가 경계를 대하매 습관과 업력에 끌리어 종종의 망상이 나고, 부처는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하는지라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아니하고 오직 청정한 혜광이 앞에 나타나나니,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래 선악 염정이 없는 우리 본성에서 범성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데, 이때 소소영령한 영지가 가리면 윤회하는 중생이며, 소소영령한 영지로 굴리면 해탈자유하는 부처인 것입니다. 결국 윤회 또는 해탈하는 원인은 우리 본성에 소소영령한 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14. 잘 수행하는 사람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하니 어떠한 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인가.
조송광은 ‘조옥정백년사’에서 불리자성(不離自性)을 놓고 소태산 대종사와 문답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년(시창14년) (己巳)동선 시에 종사님이 하루는 “너희는 공부 중 ‘불리자성’이라 하였으니 어찌하면 너희 마음이 일시라도 떠나지 못할 자 있느냐”하시거늘 여러 선객이 의향대로 대답이 분분하였다. 본인은 “주야로 일분일초라도 떠날 수 없는 것은 오직 호흡 一氣라 이 이치를 알아 주의하면 불리자성이라”고 대답하였다.」 소태산 당대의 동선 시에 이 의두요목 14조가 문답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소태산은 ‘일원상 법어’에서 불리자성 공부를 자세하게 제시해 주십니다. 바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은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할 때 쓰는 것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이로다.”처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 성품으로 눈을 비롯한 육근을 사용할 때 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의 실제입니다.
15. 마음과 성품과 이치와 기운의 동일한 점은 어떠하며 구분된 내역은 또한 어떠한가.
대종경 성리품 28장에서 “대종사 선원 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 하나를 놓고 심·성·이·기(心性理氣)로 낱낱이 나누어도 보고, 또한 사람 하나를 놓고 전체를 심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고, 성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고, 이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고, 기 하나로 합하여 보기도 하여, 그것을 이 자리에서 말하여 보라.」 ”하십니다. 정산종사는 ‘한울안한이치에’서 "이 네 가지를 사람 하나에 나누어 보면 성(性)은 일념미생전으로 꿈도 없는 때요, 심(心)은 희로애락의 분별심은 없어도 분별 낼만한 요소가 있는 것으로 대중심이 있고 영령함이 있는 것이며, 기(氣)는 성과 심을 담아 있는 육체요, 이(理)는 행하는 것과 보는 것과 숨 쉬는 것과 희로애락이 발하는 이치이다.”(제1편 3.일원의 진리 42절)하며, 또한 “성은 체, 심은 용, 이는 체, 기는 용이다. 그러므로 성과 이는 정(靜)한 것이며, 심과 기는 동(動)한 것이다. 성이란 심과 성으로 대립할 때에는 체만 말한 것이요, 그대로 자성(自性)이면 체·상·용을 겸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성 자리에 돌려 온 몸을 성에 붙일 수 있다. 또한 심에 붙이려면 심이 좌선할 때 본연심, 불심, 도심, 진심(眞心)이 되면 전신을 심에 붙일 수 있다. 이理라 하면 모든 것이 이理를 바탕하였으므로 여기에 붙일 수 있다. 기는 우리 온 몸이 또한 기 덩이이다. 호흡도 기이다. 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이理에 도달한다. 우리가 눈을 감고 보면 모든 것이 나 하나뿐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보면 안, 이, 비, 설, 신, 의가 역연歷然하듯이 나누면 심, 성, 이, 기로 나누어 볼 수 있고, 합하면 만법귀일로 하나에 돌아간다.”(제1편 3.일원의 진리 65절)고 밝혀주십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성리품 28장에서 심성이기에 대해 질문하신 후 대중이 말씀에 따라 여러 가지 답변을 올리었으나 인가하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예를 들면 한 사람이 염소를 먹이는데 무엇을 일시에 많이 먹여서 한꺼번에 키우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절차와 먹이는 정도만 고르게 하면 자연히 큰 염소가 되어서 새끼도 낳고 젖도 나와 사람에게 이익을 주나니, 도가에서 도를 깨치게 하는 것도 이와 같나니라.」라고 당부하십니다. 심성이기를 연마할 때도 염소를 키우는 것처럼 한꺼번에 키우는 것이 아니라 새끼 때는 젖을 먹이고 차차 풀을 먹도록 하여 어른 염소로 키우면 자연 새끼도 낳고 젖도 나오듯이, 우리도 각자의 상황와 근기에 맞게 심성이기를 단련하여 깨치면 되는 것입니다.
16. 우주 만물이 비롯이 있고 끝이 있는가 비롯이 없고 끝이 없는가.
우주만물이 역력한 이 자리는 비롯이다 끝이다 할 시종이 본래 없는 자리입니다. 시작이라는 규정에 한정될 것도 없고 끝이라는 규정에도 한정될 수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이다할 것이 없는 자리에서 또한 시작이 있고 끝이 드러납니다. 유상으로 보면 시작과 끝이라는 규정이 없는 무시무종이면서, 무상으로 보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다시 시작이 있는, 시종이 종시로 이어지는 순환무궁의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만유는 시종이 본래 없는 자리이면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 무궁한 자리입니다. 이처럼 시종이 본래 없는 유상 중 시종이 무궁하게 무상하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 무상 중 시종이 본래 없는 유상한 것입니다. 무시무종 중 유시유종하고 유시유종 중 무시무종하며, 불생불멸 중 인과보응하고 인과보응 중 불생불멸합니다.
17. 만물의 인과 보복되는 것이 현생 일은 서로 알고 실행되려니와 후생 일은 숙명(宿命)이 이미 매하여서 피차가 서로 알지 못하거니 어떻게 보복이 되는가.
지금 이 자리는 숙명도 없고 피차도 없고 보복도 없는 자리입니다. 과거의 업보가 어찌 할 수 없으며 미래의 업보가 관여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지금 현생 일은 서로 알고 실행한다’는 이 마음이나 ‘후생 일은 숙명이 이미 매하여서 피차가 서로 알지 못하여 어떻게 보복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미지의 마음’이나 그렇게 드러나 있는 마음자체는 선악인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한편으로 선악인과의 흔적이 공적하면서 또 한편으론 그렇게 분별하는 마음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신령한 영지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선악업보의 분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선악의 분별이 드러나고 죄복의 분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태산 친제인 ‘열반전후에 후생길 인도하는 법설’ 중에서 “이 세상에서 네가 선악 간 받은바 그것이 지나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와 인연되어 있고 미래는 현재와 인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눈앞에 초가 여러 개 있다고 합시다. 지금 촛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 촛불을 옆 초에 붙이고 다시 그 불붙은 초로 그 옆 초에 불붙였을 때, 촛불은 동일할까요? 아니면 초마다 각각 다를까요? 만일 같다면 촛불이라는 항상 하나인 주체가 연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며, 만일 다르다면 각 촛불은 서로 단절된 다른 촛불로, 뒤 촛불은 앞 촛불과 관계가 없는 관계가 단절된 촛불입니다. 이 촛불에서 저 촛불로 불붙는 것이 같은 촛불이 옮겨가는 것이라고 보면, 이것을 상견(常見)으로 상일주재한 주체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이와 반대로 앞 촛불과 뒤 촛불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앞 촛불은 앞 촛불이고 뒤 촛불은 뒤 촛불이라는 견해는 단견(斷見)이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앞뒤의 촛불은 완전히 단절된 것도 아니고 어떤 주체가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앞뒤의 촛불은 서로 인연되어 있어 앞의 촛불이 있기에 뒤의 촛불이 있고 뒤의 촛불이 있기에 앞의 촛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앞의 촛불과 뒤의 촛불이 같은 것도 아닙니다. 어떤 촛불이라는 주체가 있어 앞에서 뒤로 옮겨온 것도 아닙니다. 앞과 뒤의 촛불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앞과 뒤의 촛불은 단절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주도 아닙니다. 단멸도 아니고 상주도 아닙니다. 인연으로 상속될 뿐입니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는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연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인연의 존재입니다.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나와 인연되나 어제의 내가 그대로 오늘로 옮겨온 것도 아닙니다. 또한 내일의 나와 관계되나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로 그대로 옮겨가는 것도 아닙니다. 어제로 인연해서 오늘이 있고 오늘을 인연해서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도 현재에 있고 내일의 나도 현재에 있으니 현재에 충실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보복 여부도 현재에 있는 것입니다. 고로 지금 해탈하면 과거도 미래도 해탈되고, 지금 윤회하면 과거도 미래도 윤회되는 것입니다. 인과보응은 인연의 과정이요 결과입니다. 인과보응이 역력한 자리가 불생불명의 자리이고 불생불멸에 바탕하여 인과보응이 역력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과보응은 불생불멸에 바탕되어 있으므로, 인과보응은 인과에 자유롭자는 것이 본의입니다. 소태산은 대종경 천도품 23장에서 “생사거래와 고락이 구공한 자리를 알아서 마음이 그 자리에 그치게 하라. 거기에는 생사도 없고 업보도 없나니, 이 지경에 이르면 생사 업보가 완전히 멸도 되었다 하리라.”고 당부하십니다. 과거 업보는 생사업보가 구공한 이 자리에서 참회하여 받아버리고 미래에 다시 짓지 않으며, 과거는 단절하고 업보에 걸림 없는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것, 이것이 인과에 해탈자유하는 것이요 죄복을 임의로 하는 것입니다. 생사고락이 돈공한 자리에서 받아버리고 다시 짓지 않으면 인과에 해탈자유하는 것이며, 만일 생사고락이 돈공한 자리를 망각하고 보복하면 다시 보복하게 되어 인과에 구속되는 것입니다.
18. 천지는 앎이 없으되 안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지금 이렇게 드러나 있는 천지는 마음 밖의 대상이 아니라,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닌 자리입니다. 지금 이렇게 드러나 있는 천지는 텅 비어 고요한 자리에서 드러나는 천지요, 신령하게 아는 자리에서 드러나는 천지입니다. 자기 욕망이나 기대나 신념이나 이해관계에 물들지 않는 물들 수 없는 본래마음에서 드러나는 천지입니다. 지금 이렇게 드러나는 천지는 텅 비고 고요한 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생멸도 없는 어떠한 앎도 없는 천지입니다. 또한 지금 이렇게 드러나는 천지는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자리로, 성주괴공으로 춘하추동으로 생장이멸로 변화하는 안다할 것이 없는 가운데 훤히 아는 천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드러나 있는 천지는 한편으론 불생불멸하고 또 한편으론 생멸변화가 두렷한 자리입니다. 지금 역력하게 드러나 있는 천지는 앎이 없는 불생불멸의 천지이면서 또한 생멸변화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천지입니다. 대종경 변의품 1장 말씀입니다. “땅은 일체 만물을 통하여 간섭하지 않는 바가 없고, 생·멸·성·쇠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땅뿐 아니라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요, 일월성신과 풍운우로상설이 모두 한 기운 한 이치어서 하나도 영험하지 않은 바가 없나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짓는 바 일체 선악은 아무리 은밀한 일이라도 다 속이지 못하며, 또는 그 보응을 항거하지 못하나니 이것이 모두 천지의 식이며 천지의 밝은 위력이니라. 그러나 천지의 식은 사람의 희·로·애·락과는 같지 않은 식이니 곧 무념 가운데 행하는 식이며 상 없는 가운데 나타나는 식이며 공정하고 원만하여 사사가 없는 식이라,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천지의 밝음을 두려워하여 어떠한 경계를 당할지라도 감히 양심을 속여 죄를 범하지 못하며, 한 걸음 나아가 천지의 식을 체받은 사람은 무량 청정한 식을 얻어 천지의 위력을 능히 임의로 시행하는 수도 있나니라.” 텅 빈 자리에서 드러나 있는 천지요 고요한 자리에서 드러나 있는 천지요 신령하게 아는 자리에서 드러나 있는 천지는 응용무념의 도로써 천지의 지극히 밝은 도입니다. 이처럼 천지의 식은 앎이 없는 가운데 아는 식으로, 무념 가운데 행하는 식이며 상없는 가운데 나타나는 식이며 사사가 없는 식입니다. 이러한 천지의 식이 내 마음에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영주의 천지영기아심정(天地靈氣我心定)입니다.
19. 열반을 얻은 사람은 그 영지가 이미 법신에 합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개령(個靈)으로 나누어지며, 전신(前身) 후신(後身)의 표준이 있게 되는가.
정산종사는 ‘한울안한이치에’서 "개령(個靈)이 우주의 본체에 합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자성에 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는 사념이 없으므로 우주의 본체와 합해서 그 기운을 쓸 수 있으나, 중생은 사념이 있어서 합할 수 없다."고 응답하십니다.(제1편 5. 지혜단련 16절) 열반이 핵심입니다. 열반은 모든 분별망상이 떨어진 텅 비어 고요한 자리입니다. 열반이다 영지다 법신이다 개령이다 할 것이 없는 자리로, 언어명상이 앞에 역력하되 그러한 분별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역력하게 전개되는 분별의 본래처에 계합해 있는 경지입니다. 이와 같이 寂靜한 열반에 들었으니 법신이다 개령이라 할 것도 없고 전신 후신의 분별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열반적정의 자리를 법신이라 하고, 법신의 현현顯現을 개령이라고도 하고, 적정열반의 법신자리에서 오늘도 작용하고 내일도 작용하는 것을 전신이다 후신이다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일체의 분별망상이 멸진한 열반자리는 곧 청정법신의 자리이며 공적영지의 자리입니다. 즉 열반=법신=영지로, 이러한 법신의 현현을 개령이라 하며, 법신의 작용에 따라 전신 후신이라 한 것입니다. 한 자리를 열반이라고 하고 그 작용을 개령이다 하고 전신 후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주만유의 본체인 대자리를 법신이라 한다면 그 법신이 형형색색으로 드러나는 것은 개령이요 또한 법신이 이렇게 저렇게 또는 오늘도 내일도 변화작용하는 것을 전신 후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열반에 드는 것입니다. 열반에 든다는 것은 공적영지가 앞에 나타내어, 이 영지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20. 나에게 한 권의 경전이 있으니 지묵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광명을 나툰다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의두요목 20조는 西山大師((淸虛休靜)의 雲水壇歌詞에 등장하는 선시로 [원불교 정전]에 새롭게 추가된 의두요목입니다. 나에게 있는 한 권의 경전은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언어명상이 완연하게 나타나는 마음경전을 뜻합니다. ‘지묵(紙墨)경전’은 언어명상의 경전이라면 ‘마음경전’은 한 글자에도 규정되지 않는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에서 지혜광명이 충만한 마음자리입니다. 즉 언어명상의 규정에 한정되지 않는 공적영지의 광명입니다. ‘한 글자도 없으나 항상 광명을 나툰다는 것’은 언어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써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언어명상이 완연하게 나타나는 일원상 자리로써, 육근문을 통해 나투고 있는 자리입니다. 한권의 마음경전은 ‘일원상 법어’처럼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일원상을 육근으로 사용할 때 쓰는 것입니다. 지묵경전은 공적영지의 마음경전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손가락인 지묵경전을 보라는 것은 곧바로 달인 마음경전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지묵경전도 공적영지의 마음경전을 직면토록 하여, 세상 모든 현실을 산 경전으로 삼도록 하는 지혜입니다.(대종경 수행품 23장) 이처럼 마음경전은 안도 아니요 밖도 아니며, 안에도 찾을 수 없고 밖에서도 찾을 길이 없으되 안팎을 관통하는 현존(現存)입니다. 결국 마음경전은 순간순간 현존하는 지금여기입니다. 끝으로 의두요목 20조목을 총괄하면, 사리 간 의심나는 제목이나 화두를 통해서 안팎이 둘이 아닌 성품 자리를 명확하게 분석 통찰하는 공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