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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목회 이렇게 하라
여는 글
이 책은 철저하게 작은교회를 중심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것은 최소한 300명 이상 목회하는 분들에게는 솔직히 목회자 나름 교회나름대로 교회를 부흥시키며 나가는 그들만의 멋진 목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안에서 잘하는 목회에 대하여 왈가불가할 필요도 없다.
항상 우리의 관심은 작은교회이다.
오늘도 힘들고 어려움속에서도 주님앞에 굳굳하게 서잇는 정말 주님의 신실한 작은교회
주의 종들에게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의 모든 관점은 그들을 격려하고 지지하고 그들을 축복하기 위한 의도이지 큰교회들을 지적하고 깍아내리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책은 성령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책은 아니다.
성령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의 지식적인 면은 이미 수없이 많은 책들이 나와있다.
성령이란 주제를 가지고도 좋고 많은 책들이 나와 있고 그 책들은 성령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러한 책들과 중복해서 성령님에 대한 신학적인 것이나 성령님의 은사나 은혜부분을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성령목회를 어떻게 하는가
그것도 오늘 주님의 가장 관심이 많은 작은 그러나 정말 멋진 주님의 교회를 향하여 그 주님의 종들을 향하여 그돌 속에 일어날 성령목회를 목표로 기술하고 잇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님에 대한 자세한 이런 저런 기술이 없더라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교회안에서 목회자들이 성령목회를 할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쓰는 성령목회 방법론적인 책이다.
부라우니 물어!
개그콘써트의 정여사 코너에 나오는 개 인형인 부라우니는 결코 물을수 없다.
그런데도 열심히 “정여사는 부라우니 물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리고 정여사코너에서 늘 결론처럼 끝내는 말이 있다. “있는 사람이 더하네”
그렇다. 있는 사람이 더하다.
대형마트가 들어오면 소형가게나 구멍가게 그리고 재래시장이 한꺼번에 다 죽는다.
상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결국 서민의 삶은 더욱 고달프다.
나는 이것은 목회속에서도 정확하게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을 한다.
대형교회가 개척교회나 작은교회와 상생 거의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대형교회가 개척교회나 작은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실질적인 대형교회의 세미나가 정말 개척교회를 위한 세미나가 있는가?
사실 대형교회중에서도 작은교회나 개척교회를 도울려고 노력하는 세미나를 개최할떄가 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참이상한 것은 그러한 세미나가 많다고 하는 이시대 개척교회 하기는 정말 어렵고 작은교회는 생존의 위치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왜 정말 있다면 한국교회속에 개척교회가 잘되는 그런 시대가 있어야 하지않는가?
지금은 없다. 작은교회, 개척교회가 점점 안된다. 대형교회에서 하는 거의 모든 세미나는 왜 개척교회는 안되어야 하는 그 명백한 증거들을 말할뿐이다.
이제는 작은교회목회를 위해서는 징검다리에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작은교회도 이제는 좀 깨달아야 한다.
실질적인 작은교회를 도울수 있는 것은 작은교회에게 징검다리 역할을 할수 있는 중소형교회들의 실질적인 코칭이다.
이제는 실질적으로 작은교회를 돕는 그리고 섬기며 주님의 귀한 교회를 함꼐 세워나가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수 있는 책들이 나와야 한다.
성령목회 이렇게 하라 ! 그런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오직 오늘도 주님앞에 몸부림을 치는 작은교회를 실질적으로 돕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교회
주님이 규정한 가장 작고 아름다운교회가 있다.
(마 18: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은 모든 공생애 사역이 집중하신 것이 있다. 그것은 작은 모임이다. 12명의 제자들을 집중하여 훈련시키고 그들에게 세상을 복음화 하는 놀라운 사명을 맡기셨다.
작은 소자하나에게 한 것에 주님은 크게 칭찬하시며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 한것라고 확정하셨다.
오늘 다시 주님은 말씀하신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중에 있다.
가장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교회이다. 어쩌면 교회 개척멤버의 수라고 보아도 좋다. 그들에게 있는 비밀을 아는가?
(마 18: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기도의 응답의 비밀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는 것이 있다. 두 세사람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 다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교회가 오늘 최소한 두 세사람정도만 되고 아니 그 이상만 되면 다 된다. 이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작은교회 무시하면 안된다. 가장 강력한 교회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반드시 부흥한다.
한국교회속에 가장 놀라운 축복
한국교회가 세계속에 이렇게 교회를 자랑했다. 드디어 우리교회들이 너무 많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전세계속에 가장 큰 교회의 10개중 5교회가 한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것이 자랑이 되는가? 우리는 지금 이러한 상황속에서 가장 복음의 빛을 잃고 세상에서 선한 증거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축복은 대형교회가 아니라 이 땅에 70-80% 작은교회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작은교회만이 성령사역을 온전히 할수 있다.
정말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맞고 교회가 에수그리스도의 몸이고 주님의 교회가 맞다면 아니 오늘도 하나님은 살아서 주님의 교회를 친히 주관해 가시는 분이 맞다면 작금의 이러한 상황이 인간편에서 온것이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인것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아무것도 모르는 대형교회들이 망쳤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끊임없이 한국교회속에서 교회는 이정도는 되어야 하지 라는 잘못된 관점을 심어주었고 작은교회의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엄청난 복을 성장위주의 잘못된 관점을 가진 대형교회들은 일부러 그 복을 숨겨버렸다.
더나아가서 아주 나쁜 경우는 마치 교회가 작으면 목회가 실패인양 잘못된 인식을 너무 강하게 심어주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을 슬며시 호도하였다. 작은교회는 마치 하나님의 역사와 복이 없는 것처럼 너무 심한 말인가? 물론 대형교회가 다 거렇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정말 일부의 잘못된 관점을 가진 소수의 대형교회를 두고하는말이다.
교회크기가 목회의 성공의 척도는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이 땅에 대부분의 주님의 교회를 많이 작은교회로 만드셨다.
그 이유는 작은교회사이즈가 대형교ㅗ히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실질적인 성령목회를 할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임하셨던 마가다락방에 모인 숫자가 120명이다.
이것이 실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령목회의 중요한 사이즈다.
그러면 말할 것이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해서 3000명 모으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들이 교회가 되엇는가 3000명이 하나의 교회가 된것이 아니라 교회는 또 가정교회로 나뉘어진 것이 초대교회의 핵심이다.
각 가정에서 모인 무리가 교회를 이룬 것이다. 3000명이 나누어진 것이다.
물론 그당시 3000명을 실질적으로 모일수 있는 공간이 없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작고 아름답고 강력한 성령목회를 할 작은 교회사이지를 갖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어느날 주님이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신 것이다.
주님은 일부러 한국교회를 작은교회로 대부분 만드셨다.
왜 성령목회를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이즈가 30명에서 50명 나아가 120명, 이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면 그 다음 한번 역사에 3000명 모일수 잇는 폭발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분명히 확신하자 당신의 교회가 30명 50명 120명 사이즈라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지금 성령목회를 강하게 하라고 부르신 것이다.
지금 당장 일부 대형교회가 슬며시 준 잘못된 인식에서 탈피하라
하나님은 마지막떄를 위하여 지금 당신의 교회를 이러한 하나님의 가장 성령충만한 축복된 사이즈로 만들어놓으셨다.
우리가 실패하고 실수한것이 있다면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모든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앞에 우리가 마치 지금의 교회 상황을 하나님의 실패작이라고 잘못 규정한 것이다.
목회자가 못나서도 아니고, 현상황이 좋지 못하여서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바로 이렇게 작은 사이즈로 많은 교회를 일부러 만드셨다.
이 비밀을 깨닫고 성령목회를 위하여 힘있게 일어나자
목회의 여러 가지 방법
① 우왕좌왕목회
뭐 이런 목회가 있나? 초창기 내가 해던 목회이고 대부분 개척교회가 하는 목회이다.
어쩌면 이 성령목회를 해도 이런 느낌이 먼저 들지 모른다.
개척교회는 목회를 성공하고 싶은 나머지 목회가 된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개척교회 성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목사님이 쎄미나 다녀오는 것이라고 한다.
세미나만 다녀오면 교회가 변한다.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다 또 다른 세미나를 다녀오면 또 방향이 바뀐다.
솔직히 내가 개척교회때 이렇게 목회를 하였다.
정말 개척해서 무엇을 정확하게 할지를 몰랐다.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모르고 오늘은 이렇게 내일을 저렇게 목회를 한 것이다.
② 프로그램목회
많은 교회들이 프로그램으로 목회를 한다. 예배도 전도도 봉사도 다 프로그램화한것이다. 대형교회일수록 교회는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 매주 매일 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가 있다. 성경공부 시간도 여럿, 제자훈련, 각종 문화활동, 다양한 모임, 심지어는 예배도 프로그램화하여 진행한다. 너무도 인위적인 상태로 돌아가다보면 성령님이 역사할 공간은 거의 없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신앙생활이 강력한 역사와 감동보다는 종교활동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③ 이벤트목회
이것은 어느 특정한 날짜들을 정하여 프로그램을 이벤트화한 것이다. 예를 들면 총동원 전도, 강사를 특별히 초청하여 하는 간증이나 다양한 문화활동 즉 문학의 밤이나 가을음악회등, 경로잔치, 좀 심한경우는 부흥회도 이러한 이벤트성 목회와 가깝다.
순간 많은 것들을 한순간에 동원하여 교회를 소개하고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벤트 목회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수 있지만 정작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것에는 많은 아픔과 손실이 따른다.
총동원전도주일에 실제로 수백명씩 올지라도 정작 몇 달지나면 본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심심치 않는 고백들이다.
그리고 이 이벤트 목회는 작은교회에서는 거의 할수도 없고 해도 별효과가 없다.
이벤트자체가 이미 대형화를 기준으로하고 있고 대형이 즉 성공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④ 성경공부나 제자훈련목회
많은 교회들이 말씀을 가르친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제자훈련을 한다. 한국교회가 세게속에서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이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에 있다고 할만큼 탁월하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도 조금은 한계를 느낀다. 성경공부의 탁월함이 잇음에도 불구하고 강함 말씀의 적용이 부족할때는 자칫 귀만 커지는 우를 범할수 있다. 즉 말씀의 너무 지식화를 가져온다. 삶의 적용해서 부딪치는 말씀보다는 책상에서의 말씀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것을 제자훈련으로 극복해보려고 한다. 제자훈련은 너무 탁월하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단계가 신앙의 단계가 아니며 많은 교회의 제자훈련은 결국 성경공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⑤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회는 성령목회이다.
성령목회는 특별한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목회였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한 분이다. 에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부터 시작하셨다.
(눅 4: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행 10: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 말씀들은 예수님이 하신 목회를 정의하는 말씀들이다.
에수님이 하신 목회의 전부는 바로 성령목회이다. 단 한번도 인간적으로 인위적인 방법으로 목회를 하신 것이 아니다.
(요 5: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14: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에수님의 말과 행동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아버지를 따르고 그분의 말을 하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성령목회의 가장 핵심이다. 성령목회란 결코 인간적이거나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마 7: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천국문앞에서 우리의 목회를 점검할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말씀 아닌가?
(마 7: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여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해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을 불법이라고 하신다.
지금이라도 다시 목회를 점검해보고 성령목회를 하여여 한다.,
성령목회
예수님은 3년반 동안 12제자들을 집중해서 훈련시키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자 제자들은 낙심하고 절망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그들에게는 한줄기 희망이자 셍명이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아주 깊은 하늘의 비밀을 이미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보좌로 가시고 에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밀의 말씀을 들어보자
(요 16: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님이 오심이 예수님과 함꼐 있는 그 유익함보다도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눅 24: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에수님이 가서 보내실 성령님은 훈련받은 제자들에게 하늘의 능력을 입히울 것이다.
성령님이 오시면 나타날 역사인 것이다.
(행 1: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에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은 바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에수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도행전은 우리는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도 이처럼 우리의 목회를 성령목회를 하여야 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다 성령으로 목회를 한다 ?
성령목회를 하라면 혹자는 이렇게 말할것이다. 아니 목회를 성령으로 하지 않는 목회자도 있는가? 맞다. 목회는 성령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왜 또 성령으로 목회하라는 것인가?
성령목회를 한다고 하나 진실로 성령목회를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성령목회의 놀라운 특징은 기적과 변화와 부흥이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기적과 놀라운 변화와 부흥이 반드시 일어났기 때문이다.
내 목회가 기적과 변화와 부흥의 역사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좌절과 낙심과 침체속에 있다면 바로 이제는 성령으로 목회할 때인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얼마나 놀라운 많은 훈련받은 것에 집중을 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훈련받은 제자라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그는 에수님이 원하시는 땅끝까지 복음화 에수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는 쓰임받을수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충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로 충만한 바로 그 사람은 숫자에 관계없이 이땅에 하늘의 정복자로 살아가는 위대한 사람이다.
어떠한 환경과 조건도 위기와 고난도 그를 막지못한다.
작은교회에 이제 일어나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기적을 맛보다
성령으로 목회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작은교회는 그저 작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역사하는교회로 부흥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성령목회하는 목회자들
성령목회를 할려면 먼저 목회자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하는가?
① 자신이 예수님안에 에수님이 자신안에 있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님을 이렇게 소개하셨다.
(요 14: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 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4: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 1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의 자기인식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 안에 있고 하나님은 예수님안에 있다. 그러므로 에수님을 본자는 바로 하나님을 본자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확증하신 말씀이 그날에 성령님이 오시는 날에는 에수님이 하나님아버지안에 너희가 네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에수님이 바라시던 제자들에게 자기 인식이다.
너희가 네 안에 내가 너희안에
성령으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은 바로 철저한 이 진리의 인식함이 있어야 한다.
예수믿는 나는 누구인가?
②두 번째, 정말 이 진리에 대한 인식이 정확하게 있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대부분 성령목회를 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이 진리를 확정하지못하고 여기서 실패하기 때문이다.
모든 목회자들이 이미 신학대학교와 신대원과정에서 성령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정확한 신학을 배운다. 목회를 하면서 성령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목회자들은 없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성령목회를 하는 것은 다르다.
성령으로 목회를 하려면 지식뿐아니라 자기의 삶속에 확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확증
에수님은 내가 아버지안에 아버지가 내안에 있는 것을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증거하셨다.
(요 14: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오늘 우리 목회자들이 확장하여야할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말 성령님이 내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그다음 말씀이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요 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왜 성령목회가 어려운가?
아니 왜 성령목회를 한다면서 우리의 목회가 세성속에서 힘을 잃어가는가?
그이유는 이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우리가 믿음으로 선포하고 증거하여 나가는 대신 슬며시 내려놓고 일반적인 목회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성령목회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령목회라하면 일반적인 생각이 불로 불로 든지 아니면 강력한 치유와 축사가 나타나는 역사를 생각하거나 방언이나 예언등 은사위주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무엇인가 지식적인고 교양적인 목회를 생각하는 분들은 좀 표현의 문제가 있지만 성령목회그러면 조금은 무식하게 생각되는 경향이 강하다. 품위잇고 격조가 높고 그럴려면 성령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을 하는 오해에서부터 성령목회를 풀어가기 때문이다.
에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오직 성령으로만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의 증명은 오직 성령으로만이 가능하다. 아니 하나님은 철저하게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시안할수도 없다고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성령목회는 바로 하나님의 원하시고 계획하신 바로 그목회이다.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러 오신 분이시다.
그러고 분명한 것은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권능을 받는다. 성령은 하나님과 권능이 영광이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분명히 말하였다.
(고전 2: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사람의 지헤에 두지않고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두게하여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교회속에 목회속에서 예수님이 하신 동일한 일들과 그보다 큰일들이 나타나야하고 우리는 그것을 당당하게 기대하고 증거하여야 한다.
이 비밀을 따라하기
조용기목사는 어떻든 분명하게 성령목회를 하는 분이시다. 그분도 인간인지라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수 있으나 그분은 성령목회를 하시는 분이다.
조용기목사는 어떻게 성령목회를 해나갈까?
그분이 쓴 책중에 이것을 살짝보여준 적이 있다.
그분은 37년동안 매일 아침 새벽마다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고 한다. 하루도 빠진적이 없다.
① 성령하나님을 인정합니다.
② 성령하나님을 사랑하고 환영합니다.
③ 성령하나님을 지금 내안에 나의 왕 나의 주권자 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인도자로 초청합니다.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④ 성령하나님을 의지합니다.
⑤ 성령하나님 나를 통하여 역사하여 주옵소서
⑥ 주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이러한 기도를 매일 고백하고 선포한다고 한다.
나는 이것이 성령목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물론 이렇게 계속하고 있다.
오늘 당신이 성령목회를 할려고 하면 동일한 이 고백을 매일 고백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성령목회의 핵심은 결국 인간이 내가 아니다. 모든 것을 다이시고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는 성령하나님에게 그 목회를 맡기고 그 성령님을 의지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다.
나의 목회의 왕좌에 내가 앉지 말고 성령하나님을 모셔 성령님의 지도와 인도를 명령을 받고 목회하는 것이 기본적인 성령목회이다.
이렇게 선포하고 기도할 때 성령님을 나의 목회의 주권자의 자리에 앉혀놓을때 우리의 목회는 성령목회를 항하여 출발한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속에 게속적으로 의식적으로 있어야 한다.
나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면 30분정도 나가서 이렇게 기도하고 요한복음 14장을 목상한다. 특히 요한복음 14장 20절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선포한다.
(요 14: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결국 목회는 이것을 알고 이대로 하는 것이며 목회의 열매는 이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② 성령목회를 하는 목회자는 모든 삶의 우선순위와 모든 목회사역의 주권의 자리를 성령님께 내어드리는자이다.
목회가 사실 나와 상관이 없다. 내 능력 내 실력 인격 조건 달란트 만약 인간의 이러한 것과 목회가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목회이지 하나님의 목회는 아니다.
나의 나된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고백되어야 한다.
성령목회는 내어드림의 문제이다.
목회를 하면서 왜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을까? 왜 목회가 힘들까?
철저하게 주님은 우리의 목회에서 다듬고 깎기를 원하시는 것은 주재권의 문제이다.
제자훈련의 마지막단계가 무엇인가 누가 주인되시는 것인가 주재권의 문제이다.
제자훈련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내 삶에 인정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본적이 있는가?
나와 아무 상관없이 주님의 오늘도 교회를 이끌고 나가신다.
목회자가 게으르라는 말이 아니다. 목회의 주권을 교회의 주인되심의 권리를 오직 성령님꼐 내어드리라는 말이다.
배드로가 배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 배드로는 에수님에 사랑과 충성을 맹세했다. 내가 죽기지 따르겟습니다.
주님은 그 배드로를 항하여 네가 닭울기전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경험한것은 셩령으로가 아닌 인간으로 아무리 배워도 결국 주님을 즉기까지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드로가 성령을 받자 어떻게 변했는가?
예수를 증거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죽일려고 하는 자들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행 4: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행 4: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행 4: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하나님앞에서 너희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옳다.
이것이 성령님꼐 주권을 드린 변화된 자의 외침이다.
(행 5: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 5: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행 5: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이것이 성령의 사람들이다.
우리가 우리의 교회를 주님의 주권으로, 우리의 목회를 주님의 주권으로 내어드리면 중요한 문제 하나가 해결된다. 교회의 부흥 목회의 성공이라는 외형적인 모든 조건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주님의 교회가 내가 목회하는 것이 하나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가? 내가 지금 인간앞에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순종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고돔과 고모라 성은 의인이 열명없어서 망햇다.
수많은 사람들가운데 의인이 없는 것이다. 목회는 교회는 하나님앞에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후안까르로스가 쓴 책 제자입니까? 비대중에 걸린 교호를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오늘 많은 교회가 단지 살이 찐 비만에 걸려있을 뿐이다.
성령목회를 이렇게 하라 주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외형을 지충할려고 한다. 당장 숫자가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주님은 12명의 재자에 당신의 공생새 삶을 집중하셨다. 결코 숫자놀음을 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함꼐 하고 결국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
오늘 이 놀라운 역사는 죄송하지만 대형교회에서는 일어나지못한다.
정말 작은교회속에서만 가능하다. 오늘 한국교회를 왜 주님은 당신의 핏값으로 산교회를
작은교회와 시켜는지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대충 한국교회의 최소한 100명미만의 작은교회가 50-60%는 되지 않을까?
한국교회를 5만에서 6만으로 본다면 적어도 2만5천이나 3만교회가 100명미만의 작은교회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예를 들어서 대그룹의 00마트나 백화점 대리점들이 가난과 적자에 허덕이고 오늘도 힘들게 겨우살아가는 정도라면 그리고 오히려 점점 작아지고 사리질 것이 맞다면 그 그룹은 대책회의를 통하엿 반드시 무엇인가 회생의 전략을 새울 것이고 반드시 회생시킬 것이다. 그런데 전능하고 전지하시다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에수그리스도를 죽이시면서 그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오늘 그렇게 절반이상이 문을 닫을 지경이고 어려워힘든데 아무것도 안하실까? 이것은 솔직히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이다.
문제는 작은교회의 목회자들이 이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작은교회의 만드심
왜 대형교회는 성령목회를 할 수가 없다. 성령으로 목회는 가장 중요한 사이즈는 작은교회이다. 성도 30명 50명 아니 조금더 한 100명 정도 사이즈가 되면 가장 놀라운 셩령목회를 할수 있다.
한 성도 한 성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만지심과 하나님의 역사를 정확하게 성령충만한 목회자를 통하여 세워지고 회복과 변화가 되어지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의 뜻을 성공철학내지 성공주의 내지 세상의 논리에 따라서 그만 잊어버렸다.
3만교회속에 50명씩만 성도가 잇다면 150만명 이 150만명이 다 변회되고 성령충만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용사로 세워진다면 벌써 이나라는 복음으로 뒤집어 졌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120명뿐이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을때 그들을 통하여 전세게의 복음이 전파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작은교회의 비밀이다.
작은교회의 목회자가 자기의 실력을 능력을 지식을 키울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그것이 아니라 성령목회를 할려고 하라 성령하나님을 의지해서 성령하나님의 인도대로 성령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목회를 하면 그리고 지금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이 맡겨준 성도들을 성령으로 인도하면 그들은 변ㄹ화하고 그들을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교회도 자연히 부흥될것이다.
성령으로 목회하는 목회자는 성령하나님개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자이다.
③ 성령으로 목회하는 자는 성령님을 초청하는 자이다.
성령으로 목회하는 자와 일반적으로 목회하는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초청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다.
예배때 집회때 성령하나님을 진정으로 초청하는가?
성령님 오시옵소서
성령님 임하시옵소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성령님을 초청하는 자가 성령으로 목회하는 자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성령하나님을 초청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준비한데로 자기가 한다.
때로는 의식조차도 안한다.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강력한 힘은 1907년 하늘의 성령의 기름부음심인 평양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임을 부인할자는 없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리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두움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묵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내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인들을 영영 볼 수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때 주께서 일을 시작 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있게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헤 맨손으로 서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을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어떻게 이러한 조선의 땅에 지금 복음이 들어온지 130년 140년 지났을때 세게에서 가장 강력한 교회부흥을 이루며 세게에서 미국다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가 되었는가?
성령의 역사다 마치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세계열방으로 복음이 하나님의 나라가 퍼져나갓던 것처럼 평양 장대현교회에 1907년 1월 15일 성령의 기름부음이 부어졌을때 회개가 일어나고 민족이 주끼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된것이다.
나라를 절망에서부터 놀라운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시간도 130-140년이다. 그러면 한교회 를 성령하나님이 변화시키는데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성령목회를 하라!
목회자여 성령의 사람이 되어라
이것만이 정답이다.
이곳 저곳을기웃거리며 프로그램을 이벤트를 배울려고 하지말고 오늘 내가 성령님깨 나의 전부를 내어드린 성령의 사람이 된다면 주님이 하신다.
무뤂을 꿇고 성령의 충만하라!
성령님께 전적인 나의 모든 주권을 내어드리라
그리고 초청하라 성령하나님 오시옵소서
분명한 사실을 볼것이다. 만약 목회자가 에배때 성령님을 초청한다면 성령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성도들이 경험하는 것을 볼것이다.
특히 금요기도회나 기도할 때 강력하게 성령하나님을 초청하는 기도를 하라!
그러면 성령하나님은 오셔서 성도들의 마음을 만지신다.
기억하라 성령으로 목회하는 목회자는 성령하나님을 초청하는 자이다.
④ 성령으로 목회하는 자는 균형을 이룬 자이다.
성령목회하면 정말 많이 오해하는 것이 은사위주의 목회이다. 일단 시끄럽다. 그리고 불로 불로 약간 무식한 듯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님은 은사를 주시고 또한가지는 열매를 맺게하신다. 즉 성령목회자는 군형을 이룬 자이다.
성경은 정확하게 성령의 은사를 말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는 무엇인가?
(고전 12: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려하는 하나님의 나타남이요 능력이다.
왜 은사를 거부하는가? 그것은 은사주의자들의 잘못된 신앙 태도 때문이다.
성령의 은사가 필요없을 정도라면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인 성경에 그것을 그록하셨을까?
그러므로 성령으로 목회하는 자에게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유익하게 하게한다.
또 하나 성령은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갈 5: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경은 이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한다.
성령목회를 하려면 외적으로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인 은사와 내적으로는 인격적으로 먖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성령목회의 잘못된 가장 거부감은 성령목회 그러면 마치 비인격적인 것처럼 호도하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성령론을 가진 소수들의 그릇된 목회때문이기도하다.
목회자에게는 이 외적 내적이 두 개가 잘 군형을 이루고 하나님의 교회에 강력한 역사와 인격적인 덕을 새워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결정할 것이 있다. 성령으로 하는 목회자는 인격적으로도 사나우면 안된다.
그것은 성령님은 오셔서 하시는 놀라운 사역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성령하나님을 보내셨는가?
성령하나님은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러 오신분이다.
그 예수십자가의 사건을 사람들에게 적용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변화시켜서 긍국적으로 하나님이 거룩한 흠없는 자녀로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성령하나님을 보내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삼아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를 사는 생명으로 만들어서 결국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의 왕국인 예수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완성해 나가는 사역을 한다.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단지 구원받는 것으로 끝이아닌 구원받은후에 하나님의 자녀된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용사를 만드는 역사를 이룬다.
이것은 외적 내적인 변화의 역사요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이다.
성령으로 목회하는 목회자는 에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예수사람이다.
⑤ 성령으로 목회하는 자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가진자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전 4: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주의해야 할것은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주의 종들이 목회자들이 우리 목사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일군이야,
우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분이야 이렇게 인정받고 목회하는 자가 누가 있는가?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목회하는 자가 성령목회하는 자이다.
(고전 2: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렇다. 성령으로 목회하면 목회자는 하나님의비밀을 말할수 있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 가운데 성령의 많은 은사들을 잃어버렷다. 나도 한때 목회를 하면서 이런 부분들을 극도로 거부햇다. 왜나하면 이러한 성령의 은사주의자들의 교회를 어렵고 힘들게 하고 교회의 질서를 문란시켰다. 이러한 아픔들이 교회를 점점 우아한 교양미를 가진 외형적인 면들이 마치 대형교회이고 성령목회는 개척교회라는 이상한 정말 해괴한 논리가 한국교회속에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 그러면 성도들도 일단은 터부시한다. 너무도 무서운 사단의 전략이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비밀이 선포되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풀어지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의 임재가 나타나고 성도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고 감히 서지 못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한국교회가 지금 너무 가볍다.
예배가 가볍다. 기도가 가볍다. 역사가 없다. 회복도 변화도 성숙도 없다. 모든 것이 가볍다.
성령목회란 사실 우리의 목회가 성령목회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목회인지 실질적인 사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예건되어 있고 에수님이 오셔서 하신 사역을 잘 보고 그대로 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하신 목회를 말씀하시는 성경말씀은 이것이다.
(눅 4: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행 10: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① 성령목회는 말씀(복음)을 나누는 목회이다.
주의 성령이 임하셨을때 예수님은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복음 즉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성령목회이다.
예수님이 전한 것은 천국복음이고 제자들이 전한 것은 에수의 십자가 복음이다. 다른 것인가? 아니다, 에수님이 전한 천국복음은 에수님의 십자가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 예수 십자가가 많이 약해졌다. 우리는 성경 어느 부분을 설교하더라도 에수 십자가의 복음을 전햐야 한다.
에수님이 하신 말씀
(요 5: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목회의 가장 중요한 꽃은 설교사역이다. 그 설교속에 오늘 십자가가 많이 역해진것으르 부인할수 있는가? 성경에서는 영생을 얻어야 하고 그 영생은 예수님을 통하여 얻는다.
예수십자가 없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나누는 설교란 두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우리 즉 타락한 인간이 누구인가? 즉 내가 누구인가? 죄인이다.
영죽을 수밖에 없고 소망도 없는자
(엡 2: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러한 우리들이 예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아
(엡 2: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 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벧전 2: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매 설교때마다 우리가 성경 어느부분을 설교해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 십자가로 가능하게 된것이다. 예수 십자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것이다.
사실 부흥을 이룬 교회속에는 분명한 이 복음이 전해지고 잇다. 즉 부흥한 교회는 많은 경우 성령의 이 말씀목회를 하고 있을 확률이 많다.
설교의 기법을 배우지 말고 설교의 기술적인 면보다는 좀더 진솔한 복음적인 설교가 다시 강력하게 회복되어야 한다,
더나아가서 설교속에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말씀의 선포가 이루어져여 한다. 이 부분은 내가 쓴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 말씀 설교 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② 성령목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목회이다.
자칫 한국교회는 너무도 인간적인 신학자들의 못난 소리에 의해서 성령하나님의 역사를 너무도 제한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조금만 신학자들의 기준에 벗어나면 공격한다.
그러나 솔직히 다는 아니겠지만 신학자들 기도하는 신학자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아는 신학자 아니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학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오직 했으면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신학은 생명이라고 외쳤는가?
분명한 것은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사는 점이다.
이 말은 공중에서 000야 하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안다.
하나님은 정말 여러기지 여러모양으로 말씀하신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 때로는 환경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내적인 감동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수없이 말씀하신다. 성령목회는 이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목회이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목회를 말한다.
오늘 교회의 문제점은 교회를 우리가 에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예수그리소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면서도 교회가 실제로 에수님의 명령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 소리는 요란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사라지고 있다.
내 생각에는... 내 계획에는... 내 마음에는... 이러한 나의 소리를 버리고 교회의 목회자속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성령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목회해야 한다. 그럴려면 성령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일곱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계 2: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속 모든 일곱교회를 향하여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신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성령목회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민감하여여 한다. 듣는 훈련을 하여야 하고 들으면 순종하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나는 27년간 단독목회를 하면서 확신있게 말할수 있는 것은 내가 부족하여도 좀 미련하고 약해도 성령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이나 감동을 듣고 순종햇을때 작든 크든 모든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룬 것을 자신있게 말할수 있다.
목회가 힘들고 무엇인가 안된것은 언제나 내가 할랴교 하고 내 생각으로 목회할때이다.
가장 미련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제사장 그 시대를 가리켜서 성경은
(삼상 3: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요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그 미련한 엘리제사장이라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은 알고 잇었다.
엘리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준다.
(삼상 3: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삼상 3: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삼상 3: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 1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주의 종들도 오늘 이러한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수없이 기도하지만 더 중요한 기도는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성령목회의 시작이다.
성령목회는 목회자가 그 모든 삶을 통하여 게속 하나님앞에 주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목회는 하는 것이다.
잘들어보자 그리고 들은대로 목회하자
변화산에서 우리 하나님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마 17: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듣고, 묵상을 통하여 듣고, 환경을 통하여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울줄 알아야 한다.
③ 성령목회는 삶 나눔목회이다.
예수님의 성령목회사역은 제자사역이다. 그 제자사역의 핵심은 삶을 나누는 것이다.
에수님은 제자들과 당신의 삶을 나누기 시작했다. 삶을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우는 것이다. 에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였을때 그 목적을 말씀하고 있다.
(막 3: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는 예수믿는 그 놀라운 삶의 하did평준화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중학교 고등학교 평준화를 하면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교육의 하향평준화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대형화를 추구하면서 대형화가 즉 목회성공이라는 잘못된 의식을 심어주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에수의 삶의 하향화이다.
즉 성도의 삶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세상가 거의 같아졌다. 그것은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주의 종들을 통하여 에수그리스도의 삶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목표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
(고전 11: 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하나님의 종인 사도바울이 그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것같이 너희도 사도바울을 본받으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의 삶은 이렇게 전달된다.
예수님- 사도바울 - 그리고 성도...
대형교회는 이 과정속에어 목회자의 삶이 감추어져 있다. 대형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삶을 나눌수있는 공간이 유일하게 주일 대예배공간밖에 없다. 그것을 보고는 에수그리스도의 삶이 나누어 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함꼐 생활을 3년 반 이상을 같이 하셨다. 예수님이 피곤하신 것도 에수님도 배고프신 것도 예수님이 웃는 ㄱ서도 에수님이 우신 것도 가끔 일주일에 한번보여준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다니시면서 그 삶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이 삶을 보여주신 것은 제자를 만들려면 삶을 나누는 것이 필수기 때문이다. 제자는 삶을 나눔을 통하여만 성립이된다. 그런데 이것을 마귀는 아주 교묘하게도 목회성공이라는 포장으로 교회들을 점점 대형화 시키고 말았다. 그들은 군중목회는 할수 잇어도 무리목회는 할수 잇어도 제자는되지 맛하고 에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은 많은 경우 어려움이 있다.
한국교회의 대형교회는 결국 개척교회 작은교회에서의 갈등과 어려움을 통하여 숨어들어간곳이 대형교회가 아닌가? 실제로 대형교회의 주 고객은 이동교인이다. 개척교회의 아픔을 막고 자라는 것이 대형교회 이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현실이다.
하나님의 아들 에수님이 대형조직으로 군중으로 예수님의 삶을 나눌수 있고 그들을 다 제자만들 수 있다면 에수님도 왜 12명의 제자들을 고집하셨을까?
순교할수 있는 제자들은 삶을 함께 하지아니하면 만들어 지지 않는다. 이 삶을 함꼐 나눈 공동체만이 강력한 하나님나라의 용사가 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연약함은 바로 이것이다.
성령목회는 예수님의 삶을 나누는 목회인데 이것은 솔직히 대형교회에서는 불가능하다.
목회자의 모든 삶을 투명하게 볼수잇는 작은 사이즈가 아니면 삶을 나누는 성령목회는 불가능하다. 즉 작은 사이즈만이 진정한 성령목회로 에수님의 제자를 만들어 낼수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대부분 70-80%가 작은 사이즈교회인 이유이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다. 단지 많은 작은교회목회자들이 대형교회가 목회성공인줄알고 스스로가 작은교회의 목회가 실패한 목회자로 여겨서 그렇치 아니다. 우리가 교회긔 주인이 아니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핏값으로 산 것이 맞다면 교회의 머리가 에수그리스도가 맞다면 교회는 성령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성전이 맞다면 오늘 한국교회의 작은교회의 비밀은 풀리는 것이다.
성령사역목회를 하면서 작은교회가 가장 효과적으로 성령목회를 할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이 거룩한 주의 종으로 부르고 훈련시키고 삶을 다 헌신시킨 자들이 오늘 목회자다. 그래서 목회를 성직이라고 한다. 목회자는 근로자가 아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말씀이라면 죽기까지 순종하며 나가는 길이다.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이것을 모른 ㄴ목회자가 어디있는가? 그런데 많은 작은 목회자가 좌절과 실패한 그림을 가지고 있다. 결코아니다. 작은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다. 진정한 성도 진정한 제자 진정한 하나님의 용사는 바로 목회자와 삶을 나누고 숨을 같이 쉴수잇는 바로 이곳에서 역사된다.
성령의 기름부음의 최대숫자가 120명이다.
120명을 마가다락방에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부으셨다. 성령님이 120명에게만 부어져도 세계를 바꿀수가 있다.
오늘 우리 작은교회속에서 그 성도들에게만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음이 부어져도 교회와 지역과 나라와 열방을 바꿀수가 있다.
④ 성령목회는 터치목회이다.
성령목회는 만지는 목회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강력한 성령사역은 만지시는 것이었다.
문동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까끗게 하실수 있나이다. 그떄 예수님이 하신 사역은 그 문둥병자를 만지시는 것이다.
(마 8: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8: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8: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이것이 에수님의 성령목회의 핵심이다. 만져주시는 목회... 오늘 군중속에 고독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만짐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다.
(막 10: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 10: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만져주심을 바라는 어린아이를 앉고 안수하고 축복하시는 예수님 이것이 성령목회이다.
교회가 대형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이 만져주심의 성령목회는 거의 할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만져주시기를 자신의 자녀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라는가?
바로 이것이 작은교회의 또 하나의 놀라운 비밀이다.
교회사이즈가 작으면 모든 사람들을 모든 어린이들을 만져줄수가 있다.
나는 교회에서 금요기도회 이 만자심의 성령사역을 한다.
말씀을 마치고 성도들이 기도할 때 모든 성도들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님이 정말 만지시기를 바라는 성도들에게 손을 얹는다.
주님의 사랑의 손 치유의 손 권능의 손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자비의 손을 대신 얹는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목회하면 무조건 방언같은 은사가 나타나고 병든자가 치유를 받고 물론 그것도 성령목회의 한부분일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목회는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목회자를 통하여 그 목회자의 손을 도구삼고 통로삼아서 성령하나님의 만자심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손입니다. 치유와 권능의 손입니다. 그렇게 주님앞에 두려서 성도를 만져봐라 놀라운 성령의 만지심의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고 그 성도는 주님을 만나고 알게된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목회인지...
성령의 기름부음은 두가지 방법을 통하여 임하신다.
① 성령하나님이 스스로 권능으로 인하시는 경우다.
나는 성도들에게 타치하는 사역할 때 이것을 확신한다. 성령하나님이 에수님이 나를 통하여 나를 도구삼아서 하나님의 자녀인 그 성도를 만진다고 확신하고 손을 얹는다.
그러면 성령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직접 그 분을 만지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면서 반드시 하여야 할 성령목회다.
부흥회를 할떄 많은 부흥사들은 마지막 설교가 끝나고는 성도들을 안수한다.
그떄 강력한 성령의 만지심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실제로 나타난다.
왜?
성령목회는 타치하는 목회이기 때문이다.
대형교회가 만질수가 없다. 그곳에 성령의 깊은 만지심의 역사가 나타날수가없다.
작은교회 목회자들이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주일 예배 마치고 수시로 성도들을 만지면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한다면 놀라운 변화와 회복과 축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실제로 나의 경우는
주로 금요기도회 성령님이 감동주어 만지게 하는 성도들을 만지고
새벽에는 하루에 3명씩 미리 정해논 성도들은 순서대로 안수축복기도한다.
그리고 주일예배에는 성도들의 자녀들을 초등학교 이상 된 아이들을 축복기도해준다.
그떄 내가 내 영에 가지고 선포하는 강력한 말씀이 있다.
(계 1: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님이 우리를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우리가 사람들을 향하여 설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으로 선다.
하나님의 나라가 만지는 것이다. 천국이 지금 그 심령속에 임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붙잡고 그 심령속에 손을 얹으면 성령하나님의 세미한 만지심으로 그 심령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머리에 정말 조용히 손을 얹어보라
이것이 성령목회의 시작이다.
이떄 요란하게 인간적인 말로 기도할필요가 없다. 주님은 다 아미 아신다. 주 에수님의 마음으로 가만히 그 주님의 손을 얹는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성령하나님이 오시도록 조용히속으로 기도만 해도 성령하나님은 만지신다.
아떄 기도는 이렇게 하면된다.
성령님 오시옵소서 성령님 지금 이시간 이 심령을 만져주옵소서 더 강하게 더 깊게...
그리고 가만히 성령하나님이 만지실때까지 기다려라
이 성령사역을 할때마다 느끼는 것은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하로 오신 분이다. 에수그리수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속에 적용하러 오신 분이다.
얼마나 성령하나님이 우리들을 만자시기를 바라는 지 확연하게 느낀다.
목회자여 오늘 당신의 손을 거룩한 성령님을 위해 내어드리라
이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것중에 하나인 성령목회의 타치사역이다.
② 두 번째는 성령하나님이 우리가 손을 얹을때 하나님이 이미 목회자인 우리들에게 부어주셨던 성령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목회자를 통하여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고 그리고 목회하면서 수없이 무뤂을 꿇고 기도하고 순종한 주의 종들에게는 평신도들이 결코 갖지못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의 부어짐이 있다.
우리가 거룩한 손을 들어 성령의 만자심을 행하여 나갈 때 성령하나님은 이미 목회자속에 부어주신 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은혜를 나누어 주신다.
(롬 1: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나누어주다- impart 무슨 신령한 은사 - 성령의 은사이다. 이 은사를 사도바울은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임파테이션이다. 아직 impartation (임파테이션)이란 영어는 없지만 impart 라는 동사를 명사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목회의 또하나의 부분이다. 우리가 성령목회는 하는 중요한 목적은 성도들을 주님앞에서 든든하게 세워나가는 것이다.
(엡 4: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목사로 부르신 목적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성도를 온전하게 봉사의 일을 하게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주님의 교회에서 성도들을 거룩하게 주님의 일군이요 용사로 세워나가는 목회는 성령목회로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주라고 고백할수 없다. 주님이란 나의 주인되심을 왕되심을 고백하는 것인데 이것이 제자훈련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주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성도를 진정한 제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에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할 수 잇는 고백이다.
오늘 교회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은 이러한 주의 종의 타치 성령목회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지자
그리고 그들을 세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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