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환 시인의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 만인사, 2024)
이송희
이정환 시인이 그동안의 시들을 묶어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 만인사, 2024)를 내셨다. 데뷔 이후 50여 년간 발표한 작품 1,019편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무려 1100페이지가 넘는다. 전집 출간을 위해 그간 펴낸 시조집 12권과 동시조집 2권의 출간 순서를 고스란히 지켰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의 원고는 직접 타이핑했다고 하니 아날로그 감성과 자연스럽게 만났을 것이다.
내가 처음 쓴 장르가 시조는 아니지만, 시조를 알게 되면서 윤금초, 이정환, 박기섭, 이달균, 이지엽, 이재창 등 몇 분의 시조를 접했던 적이 있다. 1990년대 중후반이었다. 그때 알았다. 시조가 옛 장르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 인터뷰에서 이정환 시인은 젊은 날의 작품들이 참신했지만 창작의 모든 순간이 소중했음을 환기했다. 전집을 묶는 작업이 자신의 작품을 중간 점검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니 향후 작품 활동도 궁금해졌다.
나는 지난 3년 간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이정환 선생님 시절 <시조미학> 주간을 하며 그와 함께했다. 빠르게 시간은 흘렀으나 돌아보면 아쉬운 시간. 전집에 실린 시조 중 내가 전에 평을 했던 글 한 편을 공유한다.
내 안의 어딘가에 한참 동안 가둬두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혹은 나중인지 몰라
음험한 어떤 기운이 땀구멍마다 가득 찼다
한기 서린 그 기운 감당할 길이 없어
그냥 마구 무너졌고 방향을 잃었으며
끝없이 추락하면서 세상 끝에 닿았다
별동별이 남기고 간 기억 속 기적을 쫓아
먼 곳에 멈춰 서서 한없이 웅성거리다
축축한 소멸의 순간을 온몸으로 맞았다
마냥 속수무책으로 식은땀은 쏟아지고
단절의 두려움 속에 떨어지던 꽃잎들
모두가 검붉게 타서 흩날리고 있었다
- 이정환, [음울에 관하여] 전문
'음울(陰(鬱))'은 나무나 풀이 우거져서 햇살이 비치지 않은, 답답하고 그늘진 상태를 말한다. 시인은 볕이 들지 않고 숲이 우거져 빽빽한 상태를 "내 안의 어딘가에" 빼곡하게 쌓인 "음험한 어떤 기운"이 가득한 상황으로 은유한다. "음험한 기운", "'한기", "축축한 소멸", "식은 땀' 등은 볕이 들지 않는 곳에서 자라나는 것들이다. 주체는 스스로 제 안에 허기와 음험한 기운을 가둬둔 탓에 내면에 그늘이 졌음을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주체 역시도 그러한 기운이 자신의 "어딘가에" 자리해 있는지, 그 중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지", 또 그것이 "어떤 기운" 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기 서린 그 기운"을 감당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그 찬기운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방향을 잃고, 추락한다. "마구", "끝없이" 진행된 이 하강의 이미지는 주체를 세상 끝으로 내몰았다.
차가운 기운은 애정이 없고, 불친절하고 또한 냉정하다. 주체의 마음에 응어리진 냉기가 흐르니, 세상 또한 차갑고 응어리진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지금 어떤 명확하지 않은 기운에 감싸여 세상과 통하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별동별이 남기고 간 기억 속 궤적을 쫓아"가 보지만 "먼 곳에 멈취 서서" "축축한 소멸의 순간을 온몸으로 맞"을 뿐이다.
"마냥 속수무책으로 식은땀은 쏟아 지고", "단절의 두려움 속에" 꽃잎들도 떨어지고, 검붉게 타서 흩날린다. 주체는 떨어지는 꽃잎의 존재로 무언지 모를 어떤 불확정한 감정에 '마구', '끝없이', 무 너지고, 방향을 잃으며 떨어진다, "모두가 검붉게 타서 흩날리"는, 진정한 자기 소멸의 순간을 만나는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음울진 내면의 출구를 찾는 방법인지 모른다.
- 이송희 평론집, <경계의 시학>에서
[출처] 이정환 시인의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 만인사, 2024)|작성자 예쁜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