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시절 추억담, 경혼생활 경험담
저는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시골마을을 옮겨다니며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국가직 공무원이 희망지에서 근무를 하고자 할 경우, 오지 근무경험이 인센티브가 적용되기 때문에 부모님은 고향인 강릉에 오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덕분에 저는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좋은 경험을 쌓아가며 자랐습니다.
저의 첫 강릉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특히나,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CD플레이오로 음악을 들으며 안목을 다녀오는 것은 저의 최애 주말 나들이였지요. 그렇게 가는 길엔 늘 큰 목련나무가 인상적인 강릉여고를 지나쳐야 했습니다. 네이비색 카디건 교복을 입은 언니들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지금 이 글을 작성하면서도 웃음이 나는 이유지만, 그 네이비색 카디건을 입고 싶은 마음에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해는 1996년입니다. 강릉여고에 입학을 하고 결국 네이비색 카디건을 손에 넣고 기뻐했던 때가 떠 오릅니다. 카디건이 해지도록 입고 다녔으니까요. 저는 특출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고를 일으키고 교실을 떠들썩하게 했던 특별한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시절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낸 것 같습니다
공부나 대학입시보다는 특별활동으로 배웠던 통기타 연주와 동아리 선후배들과의 친목 모임을 가장 즐겨 했었습니다. 1학년 때 기타를 너무나 멋들어지게 치면서 노래를 불렀던 3학년 선배님 모습에 반해 통기타 동아리에 지원을 했었고, 그 멋진 선배님의 칭찬을 들으며 가입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매일매일 선배님을 만나러 3학년 교실을 들락 낙락 거렸고, 늘 친언니처럼 저와 후배들을 잘 챙겨주셨습니다. 지금 그 선배님은 어쩌며 통기타를 메고 길거리 버스킹을 하고 계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여고시절 또하나의 추억은 10월의 마지막 밤 행사입니다. 감수성 충만했던 그 시절 다 같이 종이컵 촛불을 들고 속마음을 얘기하며 때론 눈물도 흘리고, 때론 박장대소를 하며 행복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선생님을 짝사랑했던 친구는 고백을 하기도 했었고, 친구와 싸워 며칠 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던 친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며 부등켜 안고 화해를 하기도 했었고, 공부를 열심히 하겠노라 다짐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용서되고, 하나 되고, 소통이 되는 묘한 분위기가 있는 밤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고 피식 웃음이 나지만, 그 시절 그때는 1분 1초가 아쉬웠고 오늘이 떠나가지 않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강릉여고의 인연은 주욱 이어졌습니다. 여고 선배님들이 만들어 놓으신 공무원 조직 내 여고 동문회인 '목련회'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신규 발령을 받고 어색 한 때에 목련회에 초대되어 신입회원 인사를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지나 목련회 총무를 맡고 있으니, 세월이 무색할 따름입니다. 직장생활에서 목련회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심적으로나 일적으로 힘들 때, 주변 선배님들의 조언과 말씀들이 힘이 되고 약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강릉여고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네이비색 카디건 교복이 나를 이렇게 성장하게 해 준 것 같은 생각에 혼자 웃곤 합니다. 이번 주말 그 시절로 돌아가 안목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강릉여고를 지나쳐 보려합니다. 그때 그 추억을 떠올리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