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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혈(天刃血) 017(제1권 17)/1017
☆뜨거운 감자(2)
적무강은 *하성문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주위 사람들 때문에 경공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겨우 그가 하성문의 집에 도착하자 밖에 서있던 몇몇 장인들이 울상인 채 말했다.
“어서 오게. 이 사람아! 어서 안으로 들어 가봐.”
“할아버지는 어떻습니까?”
“겨우 숨만 붙어계셔. 얼른 들어 가봐.”
“예!”
*적무강은 급히 *하노인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침상에 누워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하노인과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하성문과 그의 부인이 보였다.
“*무···강이 왔느냐?”
하성문이 붉게 충혈 된 눈으로 그를 맞았다.
“어·····떻습니까?”
“이미 천수가 다하신 게야. 사실만큼 사셨으니 여한이야 없으시겠지.”
하성문의 말에 적무강이 급히 하노인의 곁에 앉았다.
그러자 하노인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적무강을 바라보았다.
“무·····강아.”
“예! 저 무강입니다. 왜 이러세요. 일어나셔야죠.”
“클···클! 이미 천···수가 다···한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젠 숨이 가빠. 클···클!”
적무강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하노인의 손을 잡으며 자신의 내력을 집어넣었다.
한줄기 따뜻한 기운이 몸 안에 밀려들자 하노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그러나 적무강의 내공으로도 이미 모든 생명이 다한 하노인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저 조금 편하게 해줬을 뿐이다.
덕분에 하노인은 조금은 편안하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말년에 네···녀석의 모습을 본 것은 내····게 행운이었어. 이제 너도 이 좁·····은 곳의 세상을 벗·····어날 일이 멀지 않을····게야. 네겐 이곳이 너무나 좁····으니까. 무강아.”
“예! 할아버지.”
“나·····중에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아···범과 철방의 식····구들을 잘 보살펴 다오.”
“물론입니다.”
“고···맙구나!”
평생을 외성에서 살아온 하노인은 무언가 십자성의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야 이제 흙으로 돌아가면 끝이라지만 이곳에 남게 될 자신의 후손과 철방의 사람들이 걱정이 되었다.
하노인은 다시 힘겹게 하성문을 바라봤다.
“애비야!”
“예! 아버님.”
“내가 죽····거든 이·····곳에 있는 철방을 정····리 해서 밖으로 나가거라. 이곳에서 원치도 않는 무기를 매·····일 만드는 것보다 더욱 좋은 화····로를 찾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게야. 그래야 장인 본·····래의 일에 충실할 수 있을····게야. 피를 부르는 물건을 만·····드는 것보다 괭이를 만·····들고 삽을 만드는 게 훨씬 행복한 삶이야.”
“예! 아버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저 주문 들어오는 괭이나 호미 같은 물건이나 만들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요즘 십자성에서는 매일 같이 무기를 주문하고 있었다.
장인들에게는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하성문의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조상이 이곳에 남긴 화로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하노인이 제약을 풀어준 것이다.
하성문의 눈에서도 큼직한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노인의 눈이 적무강을 향했다.
“무···강아 멈···추지 말거·····라. 어······떤 고··난에도 머····멈··추지 마라. 앞···만 바라···봐···.”
그는 알고 있었다.
적무강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그런 아이가 결코 평범한 길을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걱정했다.
그 후로도 하노인은 한참을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기력이 다했는지 조용히 눈을 감고 말았다.
툭!
마침내 하노인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할···아버지.”
적무강이 하노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뇌리에 하노인과의 추억이 스쳐지나갔다.
처음 그에게 망치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고, 쇠와 친해지는 법을 가르쳐주던 그 순간이······.
“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결코······.”
적무강은 마치 하노인이 살아있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말했다.
하노인의 장례식을 치른 후 하성문이 십자성 밖을 나가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새로운 화로 터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덕분에 적무강이 철방을 책임지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덕분에 한동안 서문아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문아의 일도 중요했지만 눈앞에 있는 일도 중요했으니까.
하가철방에서는 한참 수레에 무기를 싣고 있었다.
내성에서 주문한 무기가 모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성문은 이번 주문을 마지막으로 십자성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적무강이 직접 수레를 몰았다.
서문아의 근황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직접 십자성의 내부를 파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성을 통과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하가철방의 무기를 써본 내성의 무사들은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하가철방이라면 쉽게 통과시켜 줬다.
적무강은 수레를 몰고 내성의 한쪽에 서있는 거대한 건물을 향해 움직였다.
그는 중앙에 위치한 연무대의 주위를 빙글 돌아 나귀를 몰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마주쳤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적무강에게 이곳에 왜 왔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하가철방의 수레는 그들에게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적무강이 들어간 곳은 외성의 일과 함께 내성의 물자를 담당하는 *외성총관 *감사여의 거처였다.
요즘에 하가철방에 발주를 하는 것은 모두 감사여의 몫이었다.
그의 수레가 들어서자 내성의 서기가 그에게 다가왔다.
“하가철방에서 오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약속하신 날짜에 맞춰 물건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자네들의 신용은 정말 믿을 수 있지. 물건은 여기다 두고 안으로 들어가 보게나. *감총관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저를 말입니까?”
“그러네!”
“알겠습니다.”
이제껏 하가철방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왔지만 감사여가 직접 사람을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모두 밑에 사람을 통해 주문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례적으로 직접 그를 부른 것이다.
적무강은 서기의 안내를 받으며 따라갔다.
문밖에서 서기는 잠시 목을 가다듬다 말했다.
“총관님, 하가철방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들여보내게.”
드르륵 문이 열리고 적무강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한겨울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살이 찐 *감사여가 보였다.
그는 무척이나 더운지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요사스런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적무강은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얼마 전 외성에 들어왔던 당가의 깃발이 걸린 마차에 앉아 있던 남자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자는 *당가의 인물이 분명할 것이다.
적무강의 생각대로 그는 당가의 첫째인 *당사혁이었다.
분명 가만히 앉아 있었으나, 그의 몸에서는 요사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통사람은 단지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적무강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가에는 이정도로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무공이 없다. 그렇다면 원래 인간 자체가 사이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공을 익힌 것인가?’
그는 차가운 눈으로 당사혁을 바라봤다.
그러자 당사혁이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호~! 당신이 이곳에 물건을 납품하는 장인인가?”
“그렇습니다만······.”
“아·······! 뭐, 긴장할 필요 없어. 단지 솜씨가 좋은 장인이 있다기에 구경 온 것뿐이니까.”
당사혁은 무척 예리한 눈으로 적무강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마치 그에게서 어떤 숨겨진 사실이 있다면 알아내겠다는 듯이.
그러나 이미 *화륜심결을 대성한 적무강의 몸에서 무언가 무공을 익혔다는 흔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무강은 당사혁의 날카로운 시선에 내심 코웃음을 치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물었습니까?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는지요?”
“흥~!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적무강에서 특별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하자 그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웅풍대의 부대주들의 무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당가를 독과 암기만으로 평가를 하지만, 그들은 장인의 집안이기도 했다.
정밀한 암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쇠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야 했다.
때문에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장인으로써의 솜씨를 키워왔는데 십자성에 와서 자신들에 육박하는,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보다 뛰어난 솜씨를 보이는 장인들의 집단을 본 것이다.
그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때문에 자신의 눈으로 확인을 하러 온 것이다.
적무강은 *당사혁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잡티하나 없이 깨끗한데다 여인네의 손처럼 가늘고 길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손가락 위에 가늘게 돋은 신경이었다.
그것은 당사혁의 손이 무척이나 예민하고 빠른 속도에 길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감사여가 웃음을 지으며 적무강에게 말했다.
“사실 자네를 이렇게 부른 것은 물품을 주문하고자 해서이네.”
“이제 하가철방이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총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하가철방은 더 이상 물건을 만들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면 어떻겠나? 어차피 내성에서 필요로 하는 물량은 모두 확보했다네. 더 이상은 우리도 자네들에게 주문을 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하네. 이것만 만들어준다면 더 이상 하가철방을 귀찮게 할 일이 없을 거네.”
“······.”
감사여는 매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적무강은 그의 눈 속에서 한줄기 교활한 빛을 보았다.
자신의 속셈을 숨기고 있는 음흉한 빛을 말이다.
적무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뜨거운 감자란 말이군. 필요한 물건은 모두 확보했고, 하가철방은 더 이상 십자성의 주문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에다 이주까지 결정했으니. 나라도 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면 막을 거야. 만약 하가철방의 기술을 이용해 다른 문파나 방파에 신검을 만들어 납품한다면 그들에게 큰 방해가 될 테니까. 뜨거운 것을 삼키기도 싫고 남 주기는 더욱 싫다는 말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십자성에서 하가철방을 순순히 놓아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십자성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고개를 숙인 적무강의 입가에 너무나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나 섬뜩해서 과연 그가 평소에 잘 웃고 떠드는 적무강일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감사여나 *당사혁은 그런 *적무강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다시 적무강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평소의 얼굴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무엇을 만들어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창 오백 자루라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네. 창 오백 자루만 만들어준다면 하가철방이 이주를 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물론 비용도 우리가 댐세.”
감사여가 어떠냐는 듯이 바라봤다.
그의 눈은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문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적무강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어 드리죠. 창 오백 자루면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내성의 정예인 *흑기대가 무장할 물건이네. 그러니 각별히 신경을 써서 만들어주길 바라네. 그러면 하가철방의 이주비는 물론 그에 걸맞은 보상까지 나갈 테니까.”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적무강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숨겨진 신분이야 어떻던, 지금은 일개 장인에 불과했다.
그는 순간의 분노를 못 이겨 일을 그르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는 집요했고, 또한 참을 줄 알았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릴 줄 알았다.
‘돼지! 오늘의 결정 때문에 반드시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철방의 식구들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적무강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적무강의 모습이 사라지자 *감사여가 *당사혁에게 말을 했다.
“이번에 창만 오백 자루 납품받는다면 *하가철방의 화로는 *당가에서 쓰셔도 무방할 겁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시고.”
“별말씀을! 저야 *문상께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뿐입니다.”
*당사혁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하가철방에서 만든 물건들을 살펴본 결과 그것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온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당가에도 없는 화로가 이곳 외성의 초라한 철방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강력한 화로가 있다면 당연히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어차피 당가와 십자성이 협력하기로 한 이상 하찮은 철방 따위가 문제될 것 없었다.
더구나 십자성에서도 철방에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은 모두 얻어낸 후였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당가의 장인이 만들어도 충분했다.
이제 창만 오백 자루 얻어내면 이주를 도와주는 척하며 어디 인적이 드문 곳에서 그들을 모조리 처리하면 끝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복도를 걸어 나가는 적무강의 눈이 너무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그들이 무공은 모르는 범부라고 생각했던 적무강이 사실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는 이목의 소유자라는 것을.
적무강이 홀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철죽을 손봐야겠군.’
(우각 지음, 고향설 추천, 연곡 rem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