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최조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부한 사실은 <진감선사대공탑비문>을 통해 입증된다.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당최조에게는 3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살던 곳에 계속 거주하는 것, 멸망한 고구려 땅에 남았다면 아마도 발해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 당나라로 돌아가는 것. 셋째 신라로 귀부하는 것, 당최조는 신라 귀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자.
641년 진대덕(陳大德)을 만난 수나라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했었다. 수인이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고향 산동(山東)으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수인은 이미 사망하였고, 수인자와 당최조만 살아 있었다. 당나라로 가고 싶을 확률은 아무래도 3세인 당최조보다는 2세인 수인자가 더 클 것이므로 수인자를 기준으로 신라를 선택한 이유를 검토하기로 하겠다.
사실 고구려는 멸망(668) 전부터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5년(666)>에는 “연남생(연개소문 장남)이 탈출하여 당나라로 도주했다.”[1] 또 <신라본기 문무왕 6년(666)>에는 “고구려 귀족이자 대신 연정토가 성 12개와 백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로 투항했다.”[2] 고구려는 멸망 이전부터 귀족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주하여 각자도생하는 상황이었고, 당군(唐軍)이 고구려 땅에서 오래 주둔하며 싸우는 상황이었으므로 얼마든지 당나라에 투항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668)>에는 “우리 군대가 맞서 싸우다가 이적 등에게 패하였다. 이적이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계필하력이 먼저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적의 군대가 뒤따라와서 한 달 넘도록 평양성을 포위했다.”[3] 또 『동국통감』<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9월>에는 “이적이 고장(보장왕)과 아들 복남, 덕남, 그리고 대신 남건 등 20여만 군중을 붙잡아 경사(장안)로 돌아갔다.”[4]
만약 수인자가 당나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적의 부대에 투항할 수도 있었고, 20만 군중에 포함되어 당나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수인자는 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수인자의 선택에는 개인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이 겹쳐 있을 것이다.
먼저 개인적 상황을 검토해보면, 수인자는 비록 수나라사람 아들이지만 외가에서 태어나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척(外戚) 이외 친척은 알지 못한다. 물론 당나라에는 아버지 친척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자신이 돌아갔을 때 얼굴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아버지 친척들이 반겨 줄까? 더욱이 이민족과 혼혈(混血)로 태어난 자신을 아버지 친척들이 같은 혈족(血族)으로 인정해 줄 것인지 알 수 없다. 수인자는 당나라에 있는 아버지 친척이 자신을 반겨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회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다행히 수인이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 주변으로 장가들었을 수 있다. 그로 인하여 수인자는 비록 전쟁포로의 아들이지만 고구려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사람 아래에서 일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이는 고구려 땅에 남지 않고 신라로 귀부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즉, 수인자 혹은 당최조가 모신 상전(上典)이 신라에 귀부하기로 결정하므로 당최조도 상전을 따라서 신라로 귀부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약 위의 전제를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마치 현대 사회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어려움 없이 잘살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일가를 찾아서 직장을 버리고 이민(移民) 가는 것과 비슷한 선택이다. 당나라는 미지의 세계일 뿐만 아니라,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다. 나라가 망하고 유민(遺民)이 되어버린 상황이기는 하지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아버지 나라로 가겠는가? 아니면 믿어주는 상전을 따라서 신라로 가겠는가? 상전을 따라서 신라로 가는 선택이 상식적 판단 아니겠는가?
* 각주 ------------------
[1] 男生脫身奔唐.
[2] 高句麗貴臣淵淨土以城十二戶七百六十三口三千五百四十三來投.
[3] 我軍拒戰勣等敗之追奔二百餘里拔辱夷城諸城遁逃及降者相繼契苾何力先引兵至平壤城下勣軍繼之圍平壤月餘.
[4] 勣執臧及福男德男大臣男建等二十餘萬衆還京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