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 생활
머리말
우리의 한 가지 목적은 사역을 완전히 성경대로 하기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웅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가장 높은 표준이며 완전한 본(本)이요 권위가 충만한 명령임을 믿는다. 우리는 어떤 훼손이나 부족함 없이 이런 것들을 좇아 행하려 하는 웅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하여 거리낌이 조금도 없기 바란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주의 할 뿐 아니라 성경의 본(本)도 주의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물론 귀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원하고 성경의 본(本)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사상과 근거 없는 느낌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여겨 틀렸는지 조차도 모르게 된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경과 충돌되는 일을 하게 되고, 또 그것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물론 성경의 본(本)도 주의 할 때 비로소 그 인도하심이 성령에서 나온 것인지를 증명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인도하심이 성경과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도행전에서는 사람을 이렇게 인도하고 오늘날에는 사람을 또 저렇게 인도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것이 겉으로는 다르더라도 원칙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분의 뜻은 변함이 없다. 영적인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영원하며 시간에 따라 바꾸지 않는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는 영원한 성질이 들어있다. 이러할진대 우리가 어찌 사도행전에서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오늘날의 하나님은 또 다른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환경의 차이나 외형과 일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가짐과 길은 사도행전에서 지시한 것과 다를 수 없다.
또한 사도행전은 교회 역사(歷史)의 창세기이다. 바울 시대의 교회는 성령이 역사한 창세기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라고 말씀하셨지만 주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에는 차이가 있지 않는가?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것을 주님의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과 상반되고 다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당초와 같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처음에는 아내를 내어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다가 잠시 후에는 또 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또 잠시 후에는 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어 재삼재사(再三再四) 변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은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동일하다. 오늘도 당초와 여전히 똑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창세기]의 모든 명령을 보는 것은···후에 생긴 모든 약속에서가 아니다. 후에 생긴 모든 약속은 다 [너희···을 인하여]가 있어 하나님의 당초의 뜻과 똑같이 순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려면 하나님이 작년에 어떻게 사람을 인도하셨고 십 년 전에 어떻게 인도하셨고 백 년 전에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보아야 할 뿐 아니라 당초, 즉 교회의 [창세기]로 돌아가 하나님이 본래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높은 뜻의 표시이다. 오늘날 환경과 배경과 사정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의 본이 될 수 없고 우리를 지배할 권위가 없다. 우리는 반드시 본래로 돌아가야 한다. 환경이 어떠하든 배경이 어떠하든 사정이 어떠하든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본이 어떠한가를 물어야 한다. 환경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고 배경과 역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본래로 돌아가야 한다. 본래의 그것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길이며 우리의 표준이요 우리의 본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신 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적인 교리는 귀한 것이다. 우리가 언급한 성령의 충만과 그리스도의 승리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 들은 다 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면적인 진리를 돌아보실 뿐 아니라 외면적인 진리도 돌아보신다. 이면적인 것이 귀하지만 하나님은 외면적인 것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에베소서와 로마서와 골로새서를 하나님이 쓰셨지만 사도행전과 디모데 전후서와 고린도 전후서도 하나님의 쓰신 것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높고, 로마서에는 은혜가 충만하고, 골로새서는 사람의 행위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말한다. 이 외에 다른 내용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역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며 교회를 어떻게 조직하며 교회의 외형이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도 언급하셨다.
하나님은 한 가지도 우리 스스로 생각하여 행하도록 남겨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일에서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생각하라는 여지를 남지지 않으셨다. 사람은 생각 없는 삯꾼을 쓰기를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너무 구상이 많은 사역자를 쓰기를 두려워 하신다. 하나님은 다만 사람이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의 말을 듣기 원하실 뿐이다. 그분에게는 참모가 필요하지 않다. 바울은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라고 말했다. 사람은 모사가 되기를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사역에 관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안배하셨으므로 우리가 생각할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하며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할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물어야 한다. 영적인 것들이 귀한 것이듯 이런 것들도 똑같이 귀하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일을 바리새인들이 그릇의 바깥은 씻었지만 그들 속에는 더러운 것이 가득차 있었으므로 주님의 책망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그릇이 더러운 것은 상관없고 속이 깨끗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이 깨끗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밖도 깨끗케 되기를 원하신다. 외면적인 것만 있고 이면적인 것이 없는 것은 영적인 사망이다. 이면적인 것만 있고 외면적인 것이 없는 것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신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뜻의 표현의 일부분이므로 다 영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매우 작고 중요하지 않게 보이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무의미한 일을 하신 적이 없다. 모든 것에 영원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들을 소홀이 여긴다면 상당한 영적으로 손해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우리는 성경 안의 외면적인 것들을 율법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죽은 것이고 영적인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외면적인 것들만 율법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면적인 영에 속한 진리도 율법화되어 죽은 것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사실상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외면적인 것이든, 이면적인 것이든, 성령 안에 있을 때에는 살아 있는 것이고 율법 안에 있을 때에는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외면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이면적인 것인가를 나누지 말고 다만 그것이 성령 안에 있는가 율법 안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번에 우리가 연구하는 성경은 그릇의 외부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따르기 위한 율법과 규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문제가 항상 변론되는 문제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한다면 외면적인 이 많은 것들로 아주 살아 있는 것들이 될 것이다. 바울의 서신 안에서 다룬 교회의 문제를 오늘날 여러 저자들이 책에서 다룬 교회 문제와 비교해 보면 이 차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육체 안에 있을 때에는 좋은 것도 죽은 것으로 변한다. 모든 것은 성령 안에 있을 때만이 살아있는 것이고 생명이다.
우리는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고 실행할 때 모든 것이 성령 안에서 살아있는 생명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