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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때가 있다
전도서 3 : 1 - 8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얼마나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무차별하게 발생합니다.
해와 달이 돌고 돌아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고 한해가 가고 일평생이 다 지나가는 것처럼 인간의 생애는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생의 바퀴’와 같아서 빙빙 돌아가고 잇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수레바퀴 살대가 맨 위에 오는 때가 있는가 하면 이 살대가 가장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때가 있습니다. 바닷물은 아침과 저녁으로 만조가 되었다 간조가 되었다 합니다. 그 동안 유난히도 덥던 금년 여름 더위도 이제 입추가 지났으니 벌써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고 얼마 오래지 않아 춥다고 할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아 즐기는 유행이란 것이 또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의 유행은 빠르면 10년만에 늦으면 40년만에 다시 돌아오곤 한답니다. 세상의 것은 하나의 극단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변화”해 가며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이렇게 때와 철을 따라 변화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이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사는 동안 잠시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떻게 변할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2장 24절의 말씀은 의미가 깊습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하였습니다.
사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심령의 낙, 마음의 평화입니다. 아무리 크고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값진 음식과 의복으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행복스러워 보이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 평화, 기쁨, 낙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 같은 일들이 차례를 따라 움직입니다. 낮은 밤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다시 밤은 낮에게 자리를 내어 줍니다. 여름인가 하면 곧 겨울이 되고, 겨울인가 하면 머지 않아 여름이 됩니다.
우리 인간의 편에서 보면 극히 우연한 것처럼 보이고 예기치도 못한 일들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한 시간도 앞당기거나 연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깊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정된 이성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바라보면서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스물 여덟가지 변화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문자 그대로 변화무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변하지 아니하고 영원합니다. 여기 오늘 본문이 말씀하신대로 잠깐씩 생각하며 내려갑시다.
2절 말씀에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하였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너무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나고 죽을 때도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므로 죽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대로 나고 사람의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날 때와 죽을 때에 대해서는 말해 있지만 살 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 헨리는 주석하기를 “아 그것은 이유가 있는데 사람이 살 때라는 것은 너무 짧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조차 없어서 그랬다고”하면서 “사실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죽기 시작하는 것이다”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옛날 모세도 “인생이 70이요 혹 강건해서 80이라도 신속히 가니 날아가나이다”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 2장 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렇게 분명한 사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이것이 인간 사회의 비극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이라도 분명히 알고 있으면 이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권면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이 잔치집에 있고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7장 2절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장 1절 이하에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갈 때가 있습니다. 왕도 갑니다. 학자도 갑니다. 미인도 갑니다. 가난한 사람도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갑니다. 예외없이 누구나 다 갑니다. 이 사실 하나는 너무 분명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기억하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죽는 것은 정한 이치기 때문에 한번은 죽을 것인데 여기에 게신 여러분, 미안한 말씀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언제인가는 반드시 죽을 것인데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라 그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날이 얼마가 되든지 언제나 무슨 일에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물건 하나를 사도 이것을 사면 얼마의 이윤이 붙겠나? 생각하며 삽니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나 사귈 때도 요사이는 퍽 타산적이 돼서 내가 이 사람하고 이렇게 좋아하다가 혹시 결혼하게 되면 내게 얻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교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하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나중에 어떻게 하나님이 심판하실까?”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에 심듯이 하나님께 민족을 심을 때가 있고 또 이를 위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시도록 하시려고 그 곳에 심었던 족속을 뽑아 내실 때도 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불의가 가득하면 뽑아 버리겠다는 경고가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18장 7절 이하에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거나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하였습니다.
한 국가나 민족의 흥망 성쇠, 심는 것 뽑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의를 행하는 민족을 심으시고 악을 행하는 민족을 뽑아 버립니다. 개인이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곡식을 심어도 나무를 심어도 얼마 후에 변변치 못하고 소망 없는 것은 뽑아 버리고 맙니다.
3절에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하였습니다.
죽일 때라는 말은 심판해서 황폐케 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그 상한 상처를 치료시킬 때가 있습니다.
호세아 6장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9시편 90편 15절)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여 죽이십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라도 돌아오면, 회개하면 매맞아 상처가 난 곳을 치료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면 됩니다. 그리하면 위로해 주십니다. 치료해 주십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던 아들이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의를 버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싸매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체하지 말고 지금은 곧 와야 합니다.
자비한 주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부르신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고달파 지친 심령 계십니까? 매 맞아 죽게 된 분 계십니까? 지금 곧 아버지께로 나아 오세요. 그가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비슷한 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필요가 없으면 언제나 헐어 버리십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은 언제고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어야 하나님의 집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였는데 이 전(殿)이 세워져 갑니까? 헐어져 갑니까?
그리고 4절을 보십시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여기 우는 것과 슬퍼하는 것이 웃을 때와 춤출 때보다 먼저 나와 있는 것이 의미가 있는 표현입니다. 시편에 말씀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때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 받을 것임이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물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눈물을 흘려야 기쁨의 날이 임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의 설교 중에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범한 죄 때문에 누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는 불안과 초조의 심정으로 지내실 것이 아니라 통회하며 눈물로 자복하고 죄에서 돌이키고 죄의 씻음을 받으면 하나님께로부터 기쁨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찬송가에 있는 이 말씀과 꼭 같습니다. 내 죄 때문에 눈물 흘리며 울며 슬퍼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므로 기뻐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세상에 살 때 죄 때문에 눈물 흘리면 소망이 있습니다.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죄는 범했으나 죄 때문에 슬퍼하지 아니하면 죽은 후에 심판 때에 영벌받는 곳에 가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울어도 슬퍼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5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돌을 던질 때는 요새를 다 철거해 버리고 흩어진 돌들을 던지는 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국경에 평화는 주셔서 더 이상 돌들이 필요하지 않은 평화의 시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성곽을 쌓기 위하여 돌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전쟁을 준비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 따라 살면 돌을 던지고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으나 하나님을 떠나면 돌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 ”가 있습니다. 친구 사이에는 진실이 있을 때요, 부부 지간에는 사랑이 있을 때 하나님께는 믿음이 있을 때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안는 일은 멀어집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6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기회는 대개 있는데 가령 모든 것이 형통하여 기회가 미소짓는 때가 있습니다. 돈이 잘 벌리고, 계급이 승진하고, 사업은 번성하고, 모든 것을 찾을 때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아야 합니다. 잃을 때가 있는 것을 그러므로 기회있을 때 지혜 있게 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들어올 때는 조용히 들어오지마는 나갈 때는 조용하지 못하게 나아갑니다. 잃어질 때는 시끄러운 때입니다. 잡고 있으려한다고 잡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때는 우리가 이미 얻은 것을 사용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실 때가 옵니다. “네가 나를 따르려면 너 자신을 부인하고(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지키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버릴 때 미련없이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모든 것은 분토같이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마음이 계십니까? 어리석은 청년 법관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요나가 탔던 배에 광풍이 일어날 때 배에 씻고 있던 모든 것을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