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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을 구하라
성경본문 : 잠언 30: 7-9
7.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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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 7-14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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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재 목사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훌륭한 교훈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잘 외우고 좋아하는 구절이 바로 오늘의 본문인 마태복음 7장 7절, 8절 말씀입니다.
"구하여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소극적인 사람에게 적극적 사고를 갖게 했으며, 욕망과 꿈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언제나 기억해야 할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하는 젊은 목사에게 이 구절은 정말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인생의 문을 주저하지 말고 두드리면 반드시 그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구절 때문에 더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가난하게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복음을 받아 드리면서 새벽기도회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기도회를 통해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너무 고난을 당하였고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열심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하였으니 고난과 가난을 벗기를 원했던 선조들이 어찌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과연 기도는 우리의 모든 욕망을 성취시켜주는 유일한 방편일까? 기도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게 믿은 사람들 때문에 물질문명이 발전하고 그 문명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교훈은 현대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이 지으신 세계를 파괴하고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께서 오히려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세상을 더욱 타락하게 만드신 결과를 가져온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과연 인간의 모든 욕망을 다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이었을까? 성경을 앞뒤 맥락과 상관없이 읽을 경우 이런 잘못된 해석을 낳기가 쉽습니다. 실상은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시고자 하신 말씀이 아니고 오히려 그 모든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구하라.
오늘 본문 앞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그런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야 할 곳이 물질문명이 아닌 하느님 나라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바라는 모든 것을 이 말씀 속에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구하고 열심히 찾으며 두드려야 할 유일한 목표는 바로 하느님 나라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구하는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사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마땅히 이 땅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가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라며 발전하는 형태로 만드셨습니다. 처음에는 태아로 10개월을 보내고 이 세상에 태어나고 일생을 살다가 죽으면 영원한 생명의 단계로 나가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단계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완성되도록 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이 땅의 삶은 바로 이단계에 해당하고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구해야 할 것은 삼단계의 삶입니다. 이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의 목표는 대학의 진학이거나 사회 진출입니다. 고등학교가 학문의 과정의 중간단계이므로 고등학교 시절에 대학 진학을 위해 준비하고 공부하거나 아니면 사회 진출을 위해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간단계인 이 땅의 삶에서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은 다음 단계인 영원한 세계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음 단계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이 땅의 삶에서 우리의 인생은 끝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완성인 인간의 삶으로 끝을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새로운 삶의 세계를 예비하셨기 때문에 누구나 구하고 찾으면 그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보다 큰 목표를 구하기 위해서 이 땅의 삶의 요구를 축소하고 절제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비롯하여 이 땅에서 삶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아야 할 대상은 바로 하느님 나라이며 영원한 생명임을 알게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은 이 말씀에 이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교훈 하셨습니다. 좁은 문이 무엇입니까? 좁고 험한 길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삶의 길이 좁고 험한 길이어야 바른 길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다음 단계의 도약을 위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이라면 자기의 많은 욕망을 억제하고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구하고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절제하며 그 목표를 붙잡고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한다”(9:25)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경주하는 자입니다.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모든 일에 절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가 신음하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 때문입니다.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이 세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이런 인간의 모든 욕망을 채워주기는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망의 만족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개발과 착취를 자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부는 편중되어 세계 인구 80%의 사람들이 지나친 개발에도 오히려 굶주리고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너무 많이 먹어서 병들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계를 낙원으로 만들겠다는 헛된 꿈을 실현시키고자 계속 과학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물건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무병장수를 위해 의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인간복제 기술을 통하여 장기들을 생산하여 공급할 것이며, 마침내는 인간복제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든 노력들은 중간단계에 불과한 미완성 상태의 인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완전케 하기 위하여 우리의 욕망을 분출할 것이 아니라 미래에 약속된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내리 달리는 욕망의 전차를 멈추지 않으면 결국은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욕망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소박한 삶.
우리는 이 땅의 삶을 화려하게 그럴듯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욕망을 일단 억제하는 것이 바로 소박한 삶의 출발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명예를 얻고 싶어하고 재물도 권력도 누리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욕망을 지니고 그것을 위해 부지런히 뛰게 됩니다. 부지런히 뛴 사람은 목표한 것을 얻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낙오자가 되어 악의 길로 나가게 됩니다. 결국 성공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하여 낙오한 사람이나 근본적으로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칭찬하지만 결국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여 왔다는 점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나 별로 나을 바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억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절제하는 삶, 소박한 삶을 살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욕망의 억제 - 이것이 신앙의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오래 전에 믿음이 깊은 한 성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거룩한 사람이었으나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성자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성자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그는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주위에 사랑의 향기를 그윽하게 내뿜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그대에게 보내셨네. 무엇이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게. 혹시 치유의 은사를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친히 치료하시길 바랍니다.”
천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죄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싶은가?”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덕행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본받고 싶게 마음이 끌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관심의 중심이 됩니다. 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답답한 천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저는 다만 하느님의 은총을 바랄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만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때 천사가 다시 말했습니다.
“안 되네. 어떤 기적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하네. 안 그러면 한 가지라도 억지로 떠맡기겠네.”
“정 그러시다면, 저를 통해서 좋은 일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알겠네.”
그래서 천사는 그의 소원대로 그 성인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곳이 치유의 땅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그래서 그의 그림자가 생기는 곳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말라붙었던 샘물이 다시 솟고, 삶의 고달픔에 시달린 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인은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의 그림자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는 잊혀진 채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이 충분히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하겠다는 욕망조차도 억제할 것을 교훈하는 예화입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에 오늘의 정치가 혼란하고 우리 사회가 어지럽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고 업적을 남기겠다는 생각조차도 버리고 주어진 자리에서 그저 충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낮출 때 나도 모르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욕망을 억제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며, 그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첩경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읽어보라고 사다주신 <소박한 밥상>이란 책을 대충 보았습니다. 헬렌 니어링 여사의 일종의 음식요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 함께 시골에 살면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저자는 여자가 부엌에서 조리하느라고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될수록 간편하게 상을 차리므로 조리하고 식사하는 시간을 절약하여 책을 보거나 쓰고, 문화적인 활동을 하겠다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음식을 가능하면 조리하지 않은 채 생야채나 과일을 먹었고, 요리를 하더라도 아주 간단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그대로 실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사람들이 와서 그런 음식을 맛보면서 요리책을 쓰라고 권하여 실상은 요리를 반대하는 요리책을 썼다고 하겠습니다.
실상 현대인들은 너무 음식을 과다하게 섭취하므로 병을 앓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스턴트 음식이나 지나치게 조리된 음식들 때문에 병들고 있습니다. 식탐(食貪) 때문에 우리는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헤매지만 그 결과로 우리는 더 많은 병을 얻을 뿐입니다. “잔치하듯 먹지말고 금식하듯 먹으라”는 것이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권고입니다. 현대인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매일 고민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음식 쓰레기가 14조나 되고, 술 소비량이 엄청나게 증가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수치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환경을 파괴하고 향락적 삶으로 타락하고 있으며, 그만큼 영적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부정과 부패가 없는 건강한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소박한 밥상’은 우리 신앙인들이 앞장서서 전개해야 할 신앙운동이며 우리의 영성을 향상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환경 주일입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오염된 환경을 되살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일깨우기 위하여 세계 환경의 날이 제정되고 교회들도 환경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염된 환경을 되살리는 일은 정부의 몫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오염시킨 주범들이 우리 자신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고 절제된 소박한 삶을 회복하는 길만이 환경을 보존하고 되살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셨다고 우리의 욕망을 마음껏 구하고 펼쳐왔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 이제는 소박한 삶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의를 찾아나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욕망을 따라 펼쳐 놓았던 삶을 차츰 정리하고 좀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이루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점차 여러분의 영성이 살아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삶의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대신에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온 몸을 기울여 달려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