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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받은 이유
23:24-30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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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은 요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시야는 남왕국 유다의 16대 왕입니다.
성경은 요시야에 대해 놀라운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의 이야기는 열왕기상 22장에서 시작되는데 22장 2절을 보세요.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요시야 왕의 이야기는 23장에서 끝나는데 23장 25절을 보세요.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요시야 왕의 이야기는 칭찬으로 시작해서 칭찬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교회가 이와 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은 20 년의 마지막 주일인데 ‘20 년과 같이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해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더라“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오늘은 이것을 같이 생각하면서 은혜와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눈을 기준으로 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열왕기는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을 빠짐없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소개하는 공식은 이렇습니다.
무슨 왕은 누구의 아들이었다,
그는 몇 살에 왕이 되어 몇 년 동안 다스렸다,
그는 이런 일을 했다,
그는 이렇게 죽어 어디에 묻혔다,
그는 이런 왕이었다,
그를 이어서 누가 왕이 되었다,
열왕기는 ‘그는 이런 왕이었다’ -‘그는 선한 왕이었다’ ‘그는 악한 왕이었다’ 하는 평가를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유다 왕 아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왕상15:11)
이스라엘 왕 나답,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왕상15:26)
이스라엘 왕 바아사도 마찬가지였다,(왕상 15:34)
유다 왕 아마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왕하14:3)
히스기야,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다,(왕하 18:6)
이렇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요?
제가 앞에서 예를 들 때 이미 그 답이 있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어떻하였느냐?’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느냐?’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느냐?’
‘그가 우상을 얼마나 배격했느냐?’
이와 같은 것들을 기준으로 합니다.
열왕기상하와 역대기상하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여호와 보시기에”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봅니다. 열왕기상 15장 5절입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열왕기상 15장 10절, 아사 왕의 경우를 봅니다.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오늘 본문 뒤에 있는 열왕기하 23장 32절을 봅니다.
“여호아아스가 그의 조상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그 얼마 뒤에 있는 37절을 보세요.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여러분,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나의 20 년은 어떨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보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은 겉을 보지만 여호와는 안을 봅니다.
사람은 부분적으로 보지만 여호와는 전체를 봅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여호와가 보는 것은 완전합니다.
사람이 보는 것은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여호와가 보는 것은 한결 같습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여호와는 동기를 봅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눈치를 본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는 사람의 눈치만 보려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눈치를 더 열심히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훌륭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실패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성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시야 왕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실패한 왕이었습니다.
정치나 외교나 군사적인 면으로 볼 때는 유능했다고 하기 어려운 왕이었습니다.
29절을 보세요. 요시야는 애굽의 왕 바로 느고와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세상은 패자에 대해서는 냉정한 법입니다.
요시야는 싸우지 않아도 좋은 싸움을 벌였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621년,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와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는데 요시아가 그것을 가로막습니다.
이 이야기는 역대하 35장에도 나오는데 애굽 왕 바로 느고는 ‘나와 당신은 싸울 필요가 없다. 비켜다오’고 했습니다. 역대하 35장 22절에는 그것이 바른 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므깃도 골짜기에서 애굽 군대와 싸우다가 애굽의 활 쏘는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요시야는 자기의 병거에서 내려, 버금 병거, 부사령관의 병거를 탑니다. 자기 병거를 타고 있으면 애굽 군병의 목표가 되어 집중적으로 추격 받아 그 자리를 탈출하기 어려우니까 병거를 바꿔 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오자 죽었습니다.
요시야가 외교에 능한 왕이었으면 애굽과 앗수르 두 강대국이 싸우게 내버려두고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므깃도 패전은 유다를 망하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요시야 이후의 왕들은 애굽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고, 끝내는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잘못 판단하고 전쟁을 일으킨 왕, 패전한 왕, 비참하게 전사한 왕, 나라를 망하게 한 단초를 제공한 왕, 사람의 눈으로 보면 틀림없이 실패한 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성경이 이렇게 보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가 선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기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는 역사는 용기, 총명, 성실, 헌신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해마다 수출의 날이 되면 정부는 각 회사의 수출량을 기준으로 해서 금탑 산업훈장도 주고 은탑산업훈장도 줍니다.
은행은 예금 유치 실적을 직원평가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입학시험을 칠 때 학생의 품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점수를 기준으로 해서 합격과 불합격을 정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대통령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좋은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에 대한 온갖 비난이 요즘처럼 많이 쏟아지는 때가 없었는데 누가 잡혀갔다는 보도는 없습니다.
새문안교회의 목사님이 지난 주일 설교에서 대통령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 그 목사님, 오늘도 그 강단에서 변함없이 설교를 할 것입니다.
지난 성탄절 오후에 대성공사에 가서 가장 최근에 한국에 들어온 귀순동포들에게 설교하면서 ‘여러분, 대한민국은 자유가 있는 나라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대통령 욕을 해도 잡혀가지 않습니다. 한 번 욕해 볼까요?’ 그랬더니 다 웃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자유 대한에서 그런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되었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죄에서의 자유, 영혼의 자유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기억해 두시고 잘 생각하시면서 죄에서 자유, 영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가장 높은 왕이라고 해서 ‘왕 중 왕’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눈은 ‘기준들 가운데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가장 완전한 기준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 신앙을 기준으로 할 때 여러분의 20 년은 몇 점입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 칭찬을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 말씀을 이루려고 힘써야합니다.
그럴 때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세요.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말은 끝부분에 있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이 “이루려 함이라”는 ‘시행하였다’ ‘지켰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이루려했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말씀을 시행했기 때문에 요시야는 그렇게 놀라운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아주 어려서, 여덟 살 때 왕이 되었습니다.
즉위한지 18년이 되어 이제 자기의 소신을 가지고 통치하게 되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수리한 일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그 때 많이 퇴락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열왕기상 22장부터 요시야 왕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성전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신하들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성경이라면 모세오경을 말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처럼 흔하지 않았습니다. 두루마리였는데 아주 귀했습니다.
악한 왕들은 또 그것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서 36장에도 왕이 면도칼로 두루마리를 베어 화로 불에 던져 태우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그런 것에 대비해서 성전 한 구석에 율법책을 숨겨놓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귀한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
요시야는 ‘아, 이것 참 귀한 것이다. 보존할 가치가 높은 것이다. 박물관을 새로 지어라. 이 율법책을 잘 보존하자. 관리책임자를 임명하고 초소를 만들어 보초를 세워 지키게 하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할 수도 있었습니다.
요즘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시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서기관이 그 율법책을 읽을 때 그 율법책의 말을 듣고 그의 옷을 찢었습니다.(왕하22:11)
백성들을 모으고 율법책을 읽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선포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렘23:3)
그리고 개혁운동을 일으킵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열왕기하 23장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관한 기록인데 얼마나 광범위하게, 얼마나 철저하게 개혁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상들을 섬기던 기구들을 성전에서 꺼내서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릅니다.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들, 바알과 해와 달,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합니다.
아세라 상을 내다가 불사르고 빻아서 그 가루를 묘지에 뿌립니다.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이 있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 성전에 있었는데 그것을 헐었습니다.
산당들을 헐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생명과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하는 절기인데 그 동안 유월절 지키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떠나면 이렇게 타락하게 됩니다.
요시야의 개혁운동은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을 보면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 그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성경은 요시야 왕을 그토록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해 말씀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기준으로 살기 위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쓰셨습니까?
요시야 왕은 말씀을 이루는데 철저하게 이루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철저하였습니까?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새롭게 발견해야합니다.
요시야는 성전에 숨겨져 있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숨겨져 있는 성경을 발견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성경이 너무 흔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 위해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오랫동안 성경을 문학의 관점에서 보면서 ‘성경은 어쩌면 문학적인 면에서도 이와 같이 차원이 높고 완전할까?’ 감탄하면서 좋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성경을 선교의 관점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생동하는 교훈을 많이 얻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 평신도선교대회에 강사로 오신 목사님은 성경은 사회봉사의 교과서가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성경을 목회자의 입장에서 보면서 성경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 본래의 가치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정밀하게 읽습니다. 여러 가지 번역을 대조해 가며 읽습니다. 주석도 참고합니다.
그 다음에 본문을 다시 보면 그 본문이 다르게 보입니다.
성경은 모든 경우에, 늘, 새로운 가치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으면 요시야처럼 따르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25절을 보세요. 중간에 “모든 율법을 따라”라는 말이 있지요.
말씀을 따르면 사랑과 공의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말씀을 따르면 빛과 소금으로 살게 됩니다.
말씀을 따르면 성도의 본분을 다하게 됩니다.
말씀을 따르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말씀을 따르면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해 여러분은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했습니까?
외형적인 성장을 위해 영적인 성장이 둔화되거나 마이너스가 되었다면, 다시 말해 세상일에 너무나 바빠 묵상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심지어는 교회출석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자신의 20 년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외부로는 부진했었고, 또는 불행한 일이 있었고, 또는 건강의 문제가 생겼더라도 그러나 그런 일들을 통해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면, 올해를 좋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다보면 손해보는 일이 많습니다.
그 손해는 여러분, 하나님이 몇 배로 갚아주실 것을 믿어야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에 힘쓰고, 말씀을 이루려고 힘쓰면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하신 크고 놀라운 칭찬을 여러분과 저에게도 하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처지가 불리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요시야 왕 때 남왕국은 이미 기울고 있었습니다.
26절과 27절을 보세요.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요시야의 할아버지인 므낫세 왕이 너무나 악한 정치를 하고 우상을 많이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이 아모리 민족보다 더 악을 행한다’하며 분노하시고(왕하 21:11)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요시야의 아버지인 아몬도 악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야는 그런 흐름 속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국제정세도 매우 험악해서 이 때 북왕국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유다는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 세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 속에서 왕이 되었으면 ‘나라가 이렇게 기울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기 쉽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고 우리 아버지도 그랬는데…’ 하면서 그들의 길로 가기 쉬웠습니다.
요시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켜 신앙적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악한 할아버지, 악한 아버지를 표준으로 삼지 않고 다윗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와 싸움을 벌인 것도 나라의 운명을 돌이키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불리한 처지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성경은 요시야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세상이 악하니까…’ 하면서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습니까?
‘선배들이 이렇게 했으니까…’ 하면서 그 길로 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러니까 나도’ 하는 태도로 살아가지 말고 ‘이렇더라도 나는’의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악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인 나는…’
‘선배들은 이렇게 했더라도 나는…’
이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성장도 그렇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성장이 감소되고 있다니까…’ 하면서 교회 성장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감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교회는…’ 해야합니다.
시대의 흐름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거기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그 마지막은 패망입니다.
요시야는 짧은 기준으로 보면 실패했습니다.
설흔아홉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던 개혁운동은 그가 전사한 것과 동시에 물거품과 같이 사라졌습니다.
그가 전사한 다음에 나라는 아주 비참한 운명에 빠지고 맙니다.
요시야의 아들은 악한 정치를 하였고 그나마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손에 붙들려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애굽으로 잡혀가서 죽었습니다.
백성은 애굽이 부과한 막대한 벌금을 내기 위해 시달립니다.
그러다가 신흥제국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해 버립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봅니다.
요시야는 어두운 시대의 등불처럼 환한 빛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므낫세, 아몬, 여호야김, 야호야긴, 시드기야, 이렇게 악하고 못난 왕들 사이에 끼어 빛을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다’ 하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곳에 모세가 세상을 떠난 느보산이 있고 거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마다바(Madaba)라는 곳이 있습니다. 마다바에 6세기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소속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성당 바닥에 모자이크로 된 이스라엘 지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 지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물이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그 물고기는 사해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물위에 뛰어올라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사해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물고기 모자이크는 지금도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사해로 휩쓸려 들어가지 마세요!’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이 물고기 같은 사람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사람이 보기에는 성공하고 유능하였으나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족함이 있는 왕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세상은 이럴 경우 정치적으로 유능했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일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백성들이 좋아하고 그를 또 대통령으로 뽑는 일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성경은 반대입니다. 그럴 경우,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악한 왕이라고 후려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 오므리,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오느리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왕이 되어 사마리아를 건설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북왕국의 행정수도를 완성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했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볼까요? 열왕기상 16장 23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이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디르사에서 육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게 하였더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 역시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아합은 여리고를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열왕기상 17장 30절에서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아합 왕 때 여리고를 건축한 일은 꼭 한 절로 적고(왕상 17:34), 아합 왕이 엘리야를 괴롭히고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일을 여러 장에 걸쳐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도 능력 있는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를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확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라고 가혹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왕하14:24)
성경이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여로보암 2세 때 선포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예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말씀을 이루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처지와 흐름이 불리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칭찬하십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20 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기준으로 하여 20 년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 큰 칭찬을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고, 이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