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9-40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
성경 본문: 사도행전 16:29-40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35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38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읽으며 묵상하며 :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29-40)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를 놓친 경우 간수가 처형당했습니다. 때문에 옥문이 열린 것을 본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쳤다고 생각해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는 처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여겨 자결하려 했습니다. 간수는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더 두려워한 것입니다(마 10:28).
구원받은 빌립보 간수
그러나 이 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28절). 그 순간 간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옥에 갇혀서도 기도하며 찬미하고, 옥문이 열렸는데도 도망가지 않은 이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가?’육신의 죽음을 모면한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30절). 그러자 바울은 “아무 일도 행치 말고 오직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했습니다(31절). 예수님은 이미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롬 3:19-29). 이 사실을 깨달은 간수는 복음을 듣는 즉시 온 가족과 함께 세례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32-34절).
석방된 바울과 실라
이튿날 날이 밝자 빌립보의 치안관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바울과 실라를 석방했습니다(35-36절). 이때 바울은 로마 시민인 자신을 재판하지 않고서 매질하고 옥에 가두었던 그들의 불법 행동을 지적했습니다(37절). 이는 저들의 권력 남용 행위를 시정하고, 자신이 빌립보를 떠난 후에라도 저들이 무법하게 빌립보 교인들을 핍박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묵상하는 사람들/ 2005. 10. 17
***************************************************
살며 생각하며 : 제주도 선교의 개척자 이기풍 목사
평양성의 망나니 이기풍
한잔 걸쳐 거나하게 취한 한 거한이 갈지 자 걸음으로 평양성 거리를 비틀거리며 가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하였더니 평양 좌수의 행차라는 것이었다.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증오에 찬 눈으로 좌수의 행렬을 노려보았다.
"저 고약한 진드기 같은 놈들,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뱃가죽에 살이 디룩디룩 찐 날도둑 같은 놈들!"
착한 백성들은 고개를 숙여 좌수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으나 그는 팔뚝 근육에 힘줄이 섰다. 그는 순간 몸을 날려 좌수의 다리를 덥썩 쥐어 끌어당기더니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야! 이기풍이다. 거 후련하게 잘 했다."
백성들은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이기풍운 그 자리에서 포승에 묶여가 꼬박 석달 동안 형틀을 쓰고 옥살이를 하였다. 옥에서 풀려 나온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은 수없이 일어났다.
이기풍은 1868년에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문무를 겸한 호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대동강변의 유명한 동편 대 서편의 석전에서 동편의 총대장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여섯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였다. 이런 공부가 기초가 되어 후에 길선주 목사가 눈이 어둡게 되었을 때에 그의 대필자가 되어 돕기도 하였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대문을 나서는데 생전 처음 보는 코 큰 사람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마포삼열(S. A. Moffett) 선교사였다.
"저 양코배기가 뭘 하러 여기 왔노? 저것들도 날도둑놈들 아닌가? 저놈들을 하루 속히 우리나라에서 몰아내자."
이기풍의 가슴에 분노의 불길이 솟았다. 그는 즉시 대동강 석전의 명수 대여섯 명을 이끌고 바로 마포삼열 선교사 집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대문을 여러 차례 걷어찼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요새끼들 맛좀 봐라."
왈패들은 집 근처에 있는 돌들을 전부 주워 모아왔다. 이기풍의 신호가 떨어지자 돌들이 우박처럼 집안으로 날아들었다. 유리창이며 기왓장이며 모두 삽시간에 박살이 나버렸다. 그런 판인데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기풍은 양코배기와 직접 대면하지 못해 못내 개운치가 않았다.
그런 후 한 달. 이기풍은 장터를 지나다가 다시 마포삼열을 만나게 되었다.
"너 잘 만났다. 내 돌 맛 좀 봐라."
석전의 명수가 던진 돌멩이는 마포삼열의 턱에 정통으로 맞았다.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통쾌히 여기고 바람같이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거워지고 밥맛을 잃게 되었다. 이밖에도 건축 중인 장대현 교회를 때려부순 일, 수요예배를 인도하러 가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을 날카로운 돌로 상처를 낸 일 등의 일화가 많다.
회심
청일전쟁으로 인하여 이기풍 일가는 원산으로 피난을 가서 살게 되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스왈른(Swallen)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를 보자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전처럼 증오심이 끓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이었다.
"내가 왜 죄 없는 사람을 돌로 쳤을까? 그 사람은 왜 돌에 맞고도 아무 반항을 하지 않았을까?"
평양 장터에서 양코배기에게 돌팔매질하던 일을 후회하다가 잠이 들었다.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 쳐다볼 수가 없었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서 꿇어 앉아 통회의 눈물이 콧물과 범벅이 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즉시 예수 믿는 친구를 찾아가 이 사실을 얘기하였다. 친구는 놀라서 이기풍을 이끌고 스왈른 선교사를 찾아갔다. 이기풍은 선교사에게 과거의 못된 짓을 눈물로 다 고백하고 예수를 믿기로 맹세하였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평양의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기풍은 1896년에 세례를 받고 조사(助事)가 되어 재령지구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01년에 장로가 되어 그해 신학교육을 받다가 1903년에 평양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여 이기풍은 자기가 돌로 쳤던 마포삼열 목사가 세운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가 노회장으로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독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제주도로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한국장로회 최초의 노회에서 이기풍 목사는 "이기풍 씨를 제주 선교사로 보내되 월급은 전도국에서 지출할 일"이라고 가결,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부인과 함께 인천에서 목선을 타고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다다랐다.
그는 부인을 잠시 목포에 남겨두고 먼저 제주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일행은 다 물에 빠져 죽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혼자 헤엄을 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전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온 제주도. 생각하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현실은 이기풍 목사를 반갑게 맞이해 주는 고장이 아니었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았다. 천주교인 학살사건이 있은 다음이라 기독교를 증오에 찬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방을 빌려주지 않아 숙소도 얻지 못했다. 밤이 되면 한라산 기슭에서 돌을 베개 삼고 바위를 의지하여 잠을 잤다. 바람은 유난히 불어대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주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저 백성을 감동케 할 수 있는 감화력을 주소서."
밤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우선 제주도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조랑말 한 마리를 구입하여 한라산을 한 바퀴 돌기로 하였다. 돌다가 지쳐도 먹을 것이 없었다. 주는 사람도 없고 날이 저물어도 재워주는 사람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마굿간에서 자곤 하였다. 산에서 칡뿌리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였으나 영양실조에 걸려 몸을 가누기 어려워졌다. 바닷가로 가면 무엇이 있겠지 하여 가보았으나 모진 바람뿐. 그는 그만 모래 사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후 깨어 보니 어느 해녀의 집이었다. 마침 지나가다가 쓰러져 있는 이기풍 목사를 발견하고 장정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집으로 모셔간 것이다.
해녀의 정성어린 간호로 건강을 다소 회복할 수 있었다. 그 해녀는 나중에 이기풍목사의 전도를 받아 제주도에서 전도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전도를 위해 짐보따리 속에 작업복을 넣고 다니다가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함께 일해주면서 전도하고 홍수가 나서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으면 평양 대동강에서 닦은 수영 실력으로 물속에 뛰어들어 건져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집집마다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구렁이 때려잡기 운동을 펴다가 두들겨 맞기도 하였다.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끊고 도망가는 굉장한 미치광이를 이 목사 내외가 기도하여 악귀를 물리치고 온전히 회복시켜 주기도 하였다.
한번은 장터에서 쪽복음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김기팽이란 사람도 받게 되었다.
그가 후에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대로 내려오는 위패를 불사르고 제사를 철폐하였다. 이 바람에 집안이 들고 일어나 멍석에 말아 도리깨로 매질을 당고 머리채를 잡혀 동구 밖으로 이끌려 나갔다.
"조상을 몰라보는 천하불효자식 보시오."
하면서 갖은 욕설을 다 퍼부었다. 그때 김씨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낫이었다. 그는 잽싸게 낫을 주워들고 묶인 줄을 끊어버리고 도망갔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이다. 그가 살아나 충성 봉사하는 모범을 보이는 장로가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의 진기한 풍속을 적어 평양에 보냈는데, 그 내용이 한성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기사를 읽은 제주도 사람들이 분노하여 젊은이들이 이기풍 목사집에 쳐들어왔다.
"이 고약한 놈, 네 놈이 제주도 흉을 봤지? 그래, 말똥으로 불 때는 게 뭐가 나쁘며, 쌀을 안 씻고 밥해 먹는 게 뭐가 더럽단 말이냐? 네 놈이 우리 제주도 사람을 야만인 취급을 했다. 네 놈이 제주도 맛을 못 봤구나."
그들은 이기풍 목사의 멱살을 잡아 틀면서 자못 험악하였다. 갑작스런 봉변에 놀란이 목사는 힘을 주어 뿌리쳐대고는 도대체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한성신문 기사를 꺼내 보여주면서 살기가 등등하였다. 이 목사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돕는 사람을 보내주셨다. 평소 알고 지내던 박용호 대감이 마침 거기를 지나가다가 이 장면을 본 것이다. 박 대감은 제주도로 정배와 있는 조정 대신이었다. 제주도 사람들도 박 대감을 존경하고 있었다. 전후 사정을 듣고 난 박 대감의 중재로 이 목사는 위기에서 건짐 받을 수 있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에서 약 10년간 사역하다가 사임하고 광주 북문내교회, 순천읍교회, 벌교교회 등지에서 사역하였으며 돌산, 완도를 순회하면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신사참배 반대
일제는 조선인 동화정책의 하나로 우리 말 사용금지, 창씨개명 등과 함께 1936년경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 감리교 등의 교단을 이미 굴복시켰고 장로교도 1938년에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교단적으로는 모두 굴복하고 이때부터는 개인적, 소집단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기풍 목사와 순천노회 산하의 목회자들의 움직임은 1940년을 전후하여 나타났다. 이기풍 목사는 평소 자녀들에게도 신사에 가서 ??죽어도 절하지 말아라.??라고 엄히 가르쳤다.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딸이 학교를 중단하는 일이 생기고 쌀 배급을 받지 못하게 되기도 하였다. 이 목사는 걸핏하면 주재소 순사에게 잡혀가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하여 취조를 받았다.
1940년 11월 15일 새벽, 순천노회 목사 17 명이 일제히 경찰서에 수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사참배 거부 움직임을 눈치 채고 검속 투옥한 것이다. 이기풍 목사는 여수지구였기 때문에 여수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당시 74세의 노구에다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던 이기풍 목사는 추운 감옥에서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죽어도 일본 귀신한테 절할 수 없다. 너희들이 지금 총을 쏘아 죽인다 해도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어!"
더욱이 이기풍 목사는 설교 중에 "일본은 곧 망한다"고 심판의 말을 서슴지 않고 외쳤기 때문에 불경죄로 더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여수 고등계 형사실에서는 이 지독한 늙은이를 어떤 방법으로 괴롭힐까 궁리하였으나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산송장처럼 누워있는 이 목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건드렸다가는 시체가 되어버릴 것 같아 그들은 일단 집으로 내보냈다. 일제는 이기풍 목사의 옥중 순교의 영광스런 기회마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 목사는 1942년 여수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일제의 모진 박해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의인이요
순교자였다.
**************************************
질문하며 적용하며
1. 자결하려 한 자신을 구해준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꿇은 간수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질문은 무엇입니까?(29-30절)
2. 참된 믿음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간수는 어떤 믿음의 모습을 보였습니까?(33-34절)
3. 빌립보 간수는 바울에게 구원의 방편을 물었지만 빌립보 치안관들은 바울이 속히 빌립보에서 떠나기만을 요청했습니다(39절). 이 사실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확신하며 간구하며:
날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크신 은혜로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그 섬김으로 큰 기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줄 수도없고 알 수도없는 기쁨이오니 놀라운 주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감사의 기쁨으로 더욱 헌신하게 하시고 더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인도 하시옵소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다가오는 고통이 있더라도 인내하며 손해보는 기쁨, 때로는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포기할 줄 아는 넉넉한 기쁨을 주시기 원합니다
옥합을 깬 여인처럼 우리의 심령을 깨뜨려 주님만을 따르며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기도로 매일 승리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나의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성령충만을 허락하사 심령 구석구석마다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옵소서.
나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나의 삶이 주님께 헌신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시요,요새요,반석이심을 믿사오니 나를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하여 주시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기도를 통하여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게 하시고 예전 것들을 버리고 작은 것부터 주님의 뜻을 이루면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