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벼락치기로 일을 처리하는 습관이 있는 내게 남편이 붙여준 별명이 있다. 부랴부랴 지선생.
내 감상글 차례는 다음 주니 이번 주는 느긋하게 모임에 가도 되겠다고 생각할 무렵, 한 통의 메시지를 받는다.
[다음주 회원연수가 예정되어 있어서 그러는데 이번주에 감상글 가능할까요?]
뜨악. 잠깐 머리가 굳었지만, 부담스러울 것도 없다. 다음 주에 쓰나 이번 주에 쓰나 벼락치기인 건 마찬가지일 테니.
책을 빌려 저녁을 먹은 후 아들과 나란히 앉았다.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은 한계가 있을테니 아들의 생각을 빌릴 요량이었다.
한밤에 짐을 쌌다. 아빠는 이불을 두고 침낭을 챙겼다.
이야기는 다소 비장한 문장들로 시작된다. 단숨에 몰입이 된 건, 옆에 아들이 있어서였을까?
아들을 데리고 쫓기듯 공사장 근처 차 안으로 피신한 아빠. 그는 침낭으로 자신과 아들의 몸을 꽁꽁 싸맨다. 자그마한 아들에게 내일부터 요 앞 공사장으로 일하러 간다는 말을 전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렸을까.
점심이 되면 자신 앞으로 나오는 급식을 반찬 통에 담아 아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당분간 학교에 갈 수 없는 아들을 다독이고, 매일 아침 삼각김밥과 우유를 아들의 머리맡에 두고 출근을 하러 가는 그는 매일매일 어떤 각오를 다졌을까.
아들을 근처 공공 화장실에서 대충 씻기다 안 되겠다 싶은 날에만 목욕탕에 가서 작정하고 묵은 때는 벗기는 아빠. 비가 와 일하지 못하는 날엔 아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히고 컵라면이랑 우유를 먹으며 나름의 추억을 쌓는 아빠. 그러면서 틈틈이 다음 달엔 꼭 학교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과 다짐을 건네는 아빠.
한 아빠의 이야기는 약속대로 아들을 다시 학교에 보내며 끝이 난다. 아들과 포옹을 하는 남자의 얼굴에 비로소 눈물이 사라진 것을 보자 그 어떤 해피엔딩을 본 것보다 마음이 편하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비장한 얼굴로 아들에게 다음 약속을 건넨다. 다음 달엔 이 아빠가 작은 방을 구해보겠노라고.
이야기를 다 읽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랬다.
'이 아빠. 참 존경스럽다.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아들의 소감은 달랐다. 어땠냐고 물으니 의외의 대답을 한다.
"얘 아빠는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나쁜 사람 같기도 해."
"응? 나쁘다고? 어디가?"
"돈을 빌려 가 놓고 안 갚았잖아."
아아. 싶으면서도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올라온다.
"그건 아마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거야."
"그래도 나쁜 건 나쁜 거지."
하면서 움직인 손이 책장을 넘기더니 채권자의 눈물을 가리킨다.
"여봐. 이 사람들 울잖아."
네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 이 아빠는 내내 울었어.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꾸욱 참고 말했다.
"그래. 나쁘네. 근데 세상을 살다 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있어. 이 아빠는 아마 돈을 엄청나게 갚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고."
"응."
하며 웃는 아이의 얼굴이 말갛다. 그 천진한 얼굴을 보자 안도감과 감사함이 동시에 밀려든다. 안락한 집에서 아이를 안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새삼 값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 봤던 윌스미스 주연의 영화가 떠오른다. 행복을 찾아서.
참 감명 깊게 보긴 했지만 이처럼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온전히 나만 바라보고, 나만 믿고, 나만 따르는. 내가 우주인 자식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은 지금은 너무 잘 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사실 정도만 다르지 모두가 다 이 남자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삶의 무게와 책임감, 어떤 상황이 와도 놓을 수 없는 희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내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약속하고 다짐하고. 그것을 지키게 된 날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살고 있지 않을까.
문득 윤계상이 방송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이 먹었다고 철드는 거 하나도 없고, 늙기만 하는 거야. 책임지는 것들이 많으니까 어른인 척하는 거지. 그러고 보면 참 불쌍해. 어른들…….”
처음엔 무슨 궤변인가 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공감이 된다.
오늘도 나는 철들고 싶지 않지만, 철이 드는 척을 하면서.
한 편으론 감사한 마음을 지니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