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벗꽃이냐 벚꽃이냐
명불허전 / 이은순
어느 화창한 오후
벗꽃과 벚꽃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벗꽃이 하는 말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우정으로 피어나기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벚꽃이 하는 말
아냐!
나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이 사랑이 싹틀 때 항상 피어나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서로 주장만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현자가 무심코 한마디 건넨다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은 꽃이 아니지
벗꽃은 우정을 피우는 구수한 꽃내음이 있고
벚꽃은 달달한 사랑을 피우는 꽃내음이 있으니
각자의 꽃내음으로 멋들어지게 꽃 피우게나
벗꽃과 벚꽃은 더 이상 아무 말을 잊지 못했다.
받침 하나에 남도 되고 님도 되는데
뭘 그리 따지고 있는가
다 내 하기 나름이지
남도 때론 인연으로 이어지고
님도 때론 필연으로 이어지니
우리 서로 따지지 말고
벗꽃이니 벚꽃이니 따지지 말고
잘못된 점 일일이 찾으려 애쓰지 말게
허허 웃으며
살짝 틀려도 눈 지그시 감아 주는
살맛 나는 세상에서 멋들어지게 풍류나 즐기고 가세
술 한잔 기울이며 다 품어보세
좀 취하면 어떤가
짧은 인생 잘 쉬었다 그리 여기며
다가오는 새봄 설레는 맘으로
다정한 벗과 함께 벚꽃놀이나 실컷 가보세
2. 막걸리 한 잔
명불허전 / 이은순
가시 돋친 뼈 있는 말 한마디로
덩그러니 내버려져
깔딱깔딱 거칠어진 숨고개를 넘는다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마음의 치유가 되는 세상이라면
내 전 재산 다 버릴 수 있으련만
해는 뉘엿뉘엿 스산한 기온만 남긴 채 숨어버렸다
그렇게 실컷 헤매다 보니
여기가 어딘지
행색이 어쭙잖았는지 동냥하듯 툭 건넨
낯선 이의 막걸리 한 잔에
이유 모를 눈물이 난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니 배가 고팠다
마음도 고프고
미움도 고프고
사랑도 고프고
비로소 나는 막걸리 한잔에 취해버렸다
막걸리 한 잔에 뜨거운 눈물이 난다
빨갛게 피가 돈다
3. 시라는 것
명불허전 / 이은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쓸 수 없어
아무것도 사랑한 적 없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아무것도 아파보지 않았다면
아무 인연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시라는 것은
흔적이고
그래서 시라는 것은
외로움이 되고
그래서 시라는 것은
임플란트 같은 시술이다
4. 사각 창문 너머에는
명불허전 / 이은순
겨우내 꽁꽁 닫힌 창문
봄 햇살이 눈부시게 시린 어느 날
창너머 세상을 이유 없이 궁금해하는
한 어린아이 손에 이끌려
온 힘을 모아 열어젖혔다
녀석의 환호성에 놀라
이쁜이도 못난이도, 울보도, 떼쟁이도 창틀에 옹기종기 모여
창너머 큰 세상을 훔쳐본다
뾰족이 삐져나온 새파란 나뭇잎도 만져보고
상큼한 봄바람과 꽃향기에
아이들은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 품고
젖살이 통통한 아가들의 두 볼과
눈망울들이 봄 햇살에 더 반짝인다
창틀에 매달려있는 어린아이들에게
호통치는 선생님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다
창문너머 준비 없이 다가온 세상
비로소 나는 느낀 날이 되었다.
저 아이들이 바라보는 순수한 공기를 나는 왜 못 느꼈을까?
조건 없이 행복해하는 맑은 미소들
아이들의 마음을 무참히 차단해 왔던 시간들
이제 제대로 열어두자
창문 너머 세상에는 너희들의 신비한 우주가 있고
순수한 마음이 있고
작은 소망이 펼쳐있다
사각 창문너머에는 너희들의 미래가 웃고 있단다
첫댓글 풍유는 풍류의 오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