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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싸울 수밖에 없는 싸움
소화와 들몰댁은 똑같이 오 년 징역을 언도받았다. 목청 다듬은 판사의 징역 오년에 처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소화도 들몰댁도 헛들은 줄만 알았다. 그래서 둘이는 멀뚱하게 판사를 올려다보았고, 판사가 무표정하게 다음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언도를 내릴 때에야 비로소 소화와 들몰댁은 서로 마주볼 수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 둘이의 얼굴은 더없이 밝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건 잡힌 이후로 처음 대하는 서로의 얼굴이었다. 그녀들은 오년이라는 세월의 길이를 따질 겨를이 없이 오로지 살아났다는 감격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눈으로만 서로의 마음을 잠깐 나눈 다음 소화는 그동안 더 불룩해진 배를 내려다보았고, 들몰댁은 두 아들을 생각하며 눈을 사르르 내리감았다.
"죽는 것이야 면헐 것잉께 재판이나 잘덜 받도록 허씨요." 벌교를 떠나올 때 염상구가 불쑥 내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소화도 들몰댁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재판을 받아봐야 결국 살아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들의 처지에서 오년 징역이라는 감옥살이가 어떤 것인지 실감될 리가 없었다. 부역자에 대해서는 단심판결로 끝나버리는 재판에서 부역만이 아니라 입산활동까지 한 그녀들이 오년 징역밖에 안 받았다는 것은 역시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전적으로 염상구의 덕이었다. 선심쓰는 김에 푹 쓰기로 작정한 염상구는 그녀들의 조서를 단순동조로 꾸미게 했던 것이다. 만약 상기 자는 정하섭이라는 좌익분자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은 물론 그자의 자금운반책으로 암약하다가 적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던 바 징역 일년에 집행유예 일년을 선고받고 석방된 자로서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다가 동란 발발직전에 행방이 묘연해졌을 뿐만 아니라 인공치하에서는 여맹원으로 광분하다가 수복과 동시에 입산하여 소위 투쟁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자임. 이 자의 임신도 상기한 정하섭과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임, 이런식으로 소화의 조서가 작성되었더라면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들몰댁의 경우도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한번으로 끝나버리는 부역자들의 단심제 재판에서 경찰조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오고 있었다. 부역자들의 수가 워낙 많은데다, 전시상황 속의 정치범이라는 특수성까지 겹쳐져 검찰에서는 별도의 조사를 하지 않은 채 경찰조서에 따라 재판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것이 또한 경찰의 타락을 부채질하는 부정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피고들은 거의가 변호사를 댈 수가 없었고, 한 법정에서 무더기로 재판이 처리되는 형편이었다. 사형과 무기징역이 속출하는 속에서 징역 오 년은 무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일년 삼백육십오일이 다섯 번 지나가야 풀려날 수 있는 징역살이가 결코 짧은 세월일 수는 없었다. 소화와 들몰댁은 형무소로 넘겨지기를 기다리는 이틀 동안에 오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까마득하게 긴 것인가를 차츰차츰 실감해가기 시작했다.
소화는 한정도 없이 가라앉아가는 마음으로 불러오른 배를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뱃속에서 노는 몸짓이 갈수록 힘차지고 있는 아이는 두 달 뒤면 어김없이 세상구경을 하려고할 것이다. 그런데 오년이라니... 아이는 어떻게 낳을 것이며, 또 어떻게 길러야 한단 말인가.
소화는 서럽고 막막하여 마음 둘 데가 없었다. 마음을 둘 데라고는 단 한 군데, 정하섭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간 기러기였다. 들몰댁은 들목댁대로 깊은 시름 속에서 오년 세월을 헤아리고 있었다. 남편은 어차피 죽기를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니까 마음 밖에 있었지만, 눈망울 초롱초롱한 두 아들의 모습은 한사코 눈앞을 가렸다. 남편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이 다시 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오년 세월은 두 아들의 전정을 망치게 되는 가시울타리였다. 그것들이 외삼촌도 없는 외가집에 얹혀하루 세 끼 밥을 얻어먹기도 어려운 형편이 빤한데 학교다니기를 바라는 것은 허망하고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자꾸만 깊어졌다. 입산하는 남편을 선뜻 따라 나섰을 때는 형편이 이렇듯 오래 꼬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저 한두 달 피했다가 세상차지를 다시 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 믿음은 남편의 말 때문만이 아니고 자신의 가슴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새세상을 몸소 겪어보고 나서 생긴 것이었고, 남편이 세월 바쳐가며 했던 일이 옳았다는 것을 속깊이 깨달으면서 더 확실해졌다. 입산을 할 때 위험을 피하자는 생각은 거의 없었다. 새세상이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도 무슨 일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앞서 있었다. 그런데 한두달로 생각했던 것이 반년이 넘어버렸고, 징역살이 오년까지 앞두고 보니 두 자식 걱정이 가슴에 얹힌 돌덩이였다. 새세상 다시 이루기가 이렇듯 어려울 줄 알았더라면 무슨 고초를 또 겪든 두 자식을 끼고 견디었을 것이다. 남편이 지아비자로 하늘보다 높다면, 자식은 그 아래에 있는 하늘이었다. 남편의 품에 안기면 온갖 시름과 고단함이 치자색깔 물에 풀리듯하면서 부끄러운 어리광만 생겨나는데, 자식을 가슴에 품으면 이 세상 그 어떤 고생이난 고초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는 팽팽한 힘이 생겨났다. 돌절구통도 깰 것만 같은 힘을 두 자식을 위해 쓸수가 없게 되어 가슴한복판에 시름의 샘만 깊어져가고 있었다.
"들몰댁, 혹여 옥살이에서 몸얼 풀게 되먼 워칳게 허는지 아시오?" 소화의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야아?... 금메요, 고것이 워찌크름 되는지... 지도 잘 몰르겄구만이라." 들몰댁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어렵고 더디게 말꼬리를 흐렸다. 임신한 죄수가 감옥에서 몸을 풀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전에 들어둔 이야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그 밴 여자가 옥살이허는 일이 흔털 않은께라..." 소화는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들몰댁이 알 거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걱정스러운 생각을 자꾸 하다 보니 두려움은 눈덩이 굴리듯 점점 커져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어떻게 낳을 것이며, 감옥에서 키우게 하는 것인지. 만약 키우게 한다 해도 애가 제대로 클 수 있을 것인지. 안된다고 하면 누구에게 맡겨 키울 것인지. 그분의 어머니 낙안댁은 남보다 못한 사람이고, 그 누가 핏덩이인 남의 자식을 맡아 무병하게 키워줄 것인지... 이런 생각들이 얽히고 설켜 소화는 서러움이 사무치고, 근심에 파묻히고 있었다.
"너무 속 태우는 근심 마시제라. 아그럴 안에서 못 키우게 허먼 우리 친정에라도 맽기먼 된께라." 들몰댁의 말이었다. 그것이 비록 친정의 형편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당장 소화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고, 그건 그녀의 진심이기도 했다. 입산투쟁을 함께 한 관계를 떠나서라도 소화가 그 전에 베풀어준 정리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은혜였던 것이다. "말이라도 고맙소. 들몰댁." 소화가 들몰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엷게 웃었다. 얼굴에 서린 수심을 다 씻어내지 못하는 그 흐린 웃음기 아래로 드러나고 있는 눈밑자리의 기미가 그지없이 쓸쓸했다. 배가 불러지기 시작하면서 얼굴에서 해맑은 기운이 시나브로 스러져가고, 어떤 옷으로도 배부름을 감출 수 없게 될 즈음에 이르러 돋아나기 시작한 기미였다.
임 소식 멀어 마음고생하면 먹는 것이나 실해 몸고생을 하지 말았어야 저 기미가 덜 솟았을 것을... 소화가 겪은 몸고생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들몰댁은 고개를 수그리며 낮게 말했다. "맘 강단지게 묵으씨요. 죽을 고비 넘겠응께 또 견디다 보먼 눈 번쩍 띠는 세상이 생각보덤 금세 올란지도 몰릉께라." "그럽시다. 들몰댁도 아그덜 땀세 속 낋이지 말고 맘 강단지게 묵으씨요. 오년 세월이 길고 짧은 것이야 다 맘묵기에 달렸응께라." 소화의 낮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먼이라. 아그덜이야 무신 험헌 것얼 묵든지간에 크는 법이고, 산입에 거미줄 치는 법이야 웂제라." 들몰댁도 힘주어 말했다. 친정에 어머니가 있는 한두 자식이 배곯아 죽을 리는 없었던 것이다.
"자아, 싸게싸게들 일어아! 인자부텀 징역살이허로 떠야 헌께." 경찰들이 철문을 따며 외치고 있었다. 소화와 들몰댁은 아직 자기네들의 철문이 열리지 않았는데도 몸을 일으켰다.
다른 열서너 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동안의 생활을 통해서 경찰들의 말이 떨어지기가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익혔던 것이다. 사람들은 포승으로 줄줄이 팔을 묶였다.
소화와 들몰댁은 서로 앞뒤로 묶이려고 사이에 누구라도 끼어들까봐 몸을 바싹 붙인 채 경계하고 있었다.
"징역살이럴 워디로 간다요?" 어느 여자의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가보먼 알 것인디 멋났다고 주딩이 놀리고 지랄이여! 말 많은 빨갱이라고 표식내는 것이여, 시방?" 경찰이 눈꼬리를 치세우며 목소리에 대꼬챙이를 박았다. "아니어라, 그냥... 잘못혔구만이라." 겁 질린 여자의 말이 다급했다. "공연시 씹덕껍덕 주딩이 놀리덜 말어. 비우짱 틀어졌다 허먼 그눔에주딩이 쫙쫙 찢어뿔 팅께." 경찰이 정나미 떨어지게 내뱉었다. 줄줄이 묶인 사람들은 포장이 둘러쳐진 트럭에 떠밀려 실려지고 있었다. 법원 뒷마당에는 오월의 햇살이 눈부시게 넘치고 있었고, 붉은 벽돌담을 따라 선 나무들은 윤기나는 진초록빛 잎들로 무성했다. 그 나무들 사이에 구름덩이마냥 탐스럽게 부풀어오른 연보라빛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수국이었다. 아아, 곱기도 해라! 소화는 그 복스럽게 생긴 꽃덩이들을 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솟았다. 수국은 자신이 유독 좋아하는 꽃이었다. 야하지 않으면서 고왔으며, 유별나지 않으면서 풍성했고, 별스럽지 않으면서 경건했다. 그리고, 수줍은 듯하면서 어딘가 슬픈 그늘을 간직한 꽃이었다. 먼발치에서 보면 풍성한 하나의 꽃송이로 보이는 것이 실은 한 개의 꽃송이가 아니었다. 그건 수십 개의 작은 꽃송이들이 모여 한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꽃덩어리였다. 그래서 수국꽃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덩이 같기도 했고, 더없이 넉넉하고 풍요로와 보이기도 했다. 소화는 문득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저 수국처럼 활짝 피어나는 한때를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에 출렁거렸다. 예쁜 아이를 낳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 그때가 바로 수국처럼 활짝 피어나는 한세상이리라 싶었다. 그 불현듯 일어난 욕심을 다른때 같았으면 자신을 나무라며 서둘러 털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소화는 이제 그 욕심을 누르려고도 떼쳐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욕심을 가슴에 오롯이 간직해서 키워나가고 싶었다. 그런 욕심을 갖지 않고서는 오년 세월을 이겨낼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화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은 것이지 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은 입산을 하고 나서부터 점차로 커져가며 마음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 생각의 마음 자리가 넓어져가면서 무당질을 해먹고 사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부자나 지주들이 끝도 한도없이 바라는 부귀영화나 수복강녕을 빌어주는 굿질을 해서 먹고산다는 것은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자고 부채질을 해대는 못된 짓이었고, 못난 거렁뱅이였던 것이다.
작인들에게 지주보다도 더 미움을 사는 마름들의 행투와 무당질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깨달음과 함께 정하섭은 범접할 수 없도록 저 높이 있는 지체가 아니라 똑같은 사람으로 나란히 서 있는 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소화는 앞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포승줄에 끌리며 발을 떼어놓았다. 시야를 벗어나는 수국꽃덩이가 정하섭의 얼굴로, 예쁜 아기의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결국 춘천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파편상을 입은 팔이 가끔씩 뜨끔거리고 씀벅거리고 하더니만 기어이 말썽을 부리고 말았던 것이다. 상처부위를 중심으로 퉁퉁 부어오를 뿐만 아니라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열이 올랐다. 덧이 나도 예사로 난 것이 아니라 싶었다. "이거 아무래도 큰 야전병원으로 가셔야 되겠는데요. 아마 파편 제거가 다 안 돼 염증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휴가삼아 야전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으셔야 되겠습니다. 약이나 주사로 될 증세가 아니로군요." 사단 의무관의 말이었다.
심재모는 도리없이 붉은 십자 표지가 붙은 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부상을 당한 이틀 뒤에 의무대에서 파편을 빼낸다고 빼냈는데 잘못 놓친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확인했던 두 개의 파편은 다시 생각해도 섬뜩하게 소름이 끼쳤다. 한 개는 손가락 매듭만한 크기였고, 다른 한 개는 그 반쪽쯤 되는 것이었다. 그 끝이 찢어지고 갈라진 두 개의 쇠붙이는 피범벅인 채 그믐달 모양의 스텐레스 그릇에 놓여 있었다. 피가 맥질된 두 개의 파편은 스텐레스의 싸늘한 흰빛 탓인지 유난히도 뚜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두 개의 파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를 죽이지 못해 분하다 하면서. 그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 파편들은 심장을 파고들 수도 있었고, 머리를 파고들 수도 있었고, 눈을 파고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 철모를 썼으니까 머리는 무사했을 것이다. 심장을 파고들었으면 즉사했을 것이고, 눈을 파고들었으면 장님이나 애꾸눈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터의 생사란 순전히 요행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며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야전병원은 철판조립인 반달형 건물들로 되어 있었다. 그건 미군야전병원이었고, 한국군은 장교에 한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장교를 미군의관이 치료해주는 것은 아니었고, 미군과 한국군 장교들이 거처하는 막사도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은 한국군 장교들을 치료하는 데 미제약품이나 의료기구들을 손쉽게 얻어쓰기 위해 곁다리붙어 있는 셈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되자 심재모는 싸악 비위가 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작전권 일체가 미군으로 넘어가버린 것에 대해 그것이 절대로 부당한 처사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고, 그동안 미군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온 무법적 작태에 대해서나, 화력의 막강함만을 앞세워 무작정 초토화로만 밀어붙이고있는 작전에 대해서나, 한국군 장교들을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으려고 드는 미고문관들의 거만스러운 태도에 대해서나, 못마땅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낙동강전투에서 세 겹으로 구축한 방어선 중에서 미군은 맨 뒤의 제일 안전한 방어선을 차지했다거나, 똑같은 고지선을 전개하는데 미군 쪽에는 한국군 쪽보다 배 이상의 포사격을 지원한다거나, 미군은 보병이라도 차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군은 줄창 걸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은 아예 당연한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기네 나라도 아닌 곳에서 싸우면서 안전을 도모하고 고생을 덜 하겠다는 것까지 시비거리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심재모는 수술을 받았다. 콩알만한 파편 하나를 찾아내느라고 상처부위의 살은 밭갈이하듯 파헤쳐갔다. "이놈이 말썽이었어요." 사십대의 군의관이 손가락 끝에 든 파편을 심재모의 눈앞으로 디밀어 보이며 씽긋 웃었다. "설마 또 숨어 있는 놈은 없겠지요?" 심재모는 얼굴을 찡그린 채 군의관을 쳐다보았다. "이젠 염려 안하셔도 될 겁니다. 살이 걸레가 다 되도록 파헤쳤으니까요. 그나저나 참을성이 대단하십니다." "아프긴 좀 했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팔 잘라내지 않으려면 참아야지요." 심재모는 말은 태연하게 하면서도 찡그린 얼굴을 펴지못하고 있었다. 살 찢어지는 통증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좀 아픈게 아니었을 겁니다. 곪기 시작했던 참이라 마취가 잘 듣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도 소리 한번 안 지르시니 대단하신 거지요." 군의관은 마치 어린 환자를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에 지긋한 웃음을 물었다. 심재모도 그런 군의관의 인정스런 태도가 싫지 않았다. "언제나 퇴원할 수 있겠습니까?" "인제 감꽃 떨어졌는데 홍시 찾으시는군요." 군의관이 고무장갑을 벗으며 웃었다. "네에?" 심재모는 되묻고 나서야 그 말뜻을 알아새겼다. "곪아가는 살을 다 파냈으니까 새살이 돋고 상처가 아물어 그 팔을 다시 전쟁용으로 불편없이쓰려면 한 달 이상 걸릴 텐데요." 심재모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단군의관의 말마따나 오랜만의 휴식을 얻게 된 셈이었다.
"자아, 일어나셔서 주사를 좀 맞으시지요." 간호장교와 위생병이 붕대를 감고, 팔을 목에 걸친 줄에 고정시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군의관이 말했다. 팔 때문에 엎드릴 수가 없어서 심재모는 엉거주춤 선 채로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야 했다. 간호장교가 환자복을 끌어내리고, "힘주지 마세요." 하며 엉덩이를 찰싹 치고, 바늘이 꽂히는 아픔이 따끔하게 느껴지고, 또 "힘주지 마세요." 하며 다른쪽 엉덩이에서 찰싹 소리가 나고 하는 동안에 심재모의 껑충한 키는 어설프게 구부러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어색스럽게 구겨져 있었다. 그는 간호장교가 엉덩이를 찰싹찰싹 쳐대는 것도 견디기 어렵게 곤혹스러운데다, 혹시 바지를 너무 끌어내려 자신의 물건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도 엉덩이에 힘을 빼기가 바빠 아래를 내려다볼 틈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됐습니다. 이봐 위생병, 여기 잠깐 주물러드려." 간호장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나 어투가 군인답기는 했지만 심재모의 귀에는 어쩐지 거슬리게 들렸다. 군의관이나 간호장교는 그 계급이 어쨌든간에 의사고 간호원이었지 군인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간호장교라고 해서 위생병에게 군대식의 해라를 거침없이 해대는 것이 마땅찮았던 것이다. 군병원도 엄연히 군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군대조직의 하나이고, 그 조직도 명령으로 통제되고 관리되는데 어째서 군인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면 더 할말이 없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군인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위생병, 한쪽은 내가 주무를 수 있으니까 관두게." 심재모는 성한 팔을 뒤로 돌렸다. "뭐, 특별히 주의할 사항은 없구요. 마음 편히 갖고, 어디에 부딪치지 않게만 조심하십시오." 군의관이 손을 수건에 닦으며 말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심재모는 눈인사를 보냈다.
병실의 좌우로 빼곡히 들어찬 침대에는 여러 종류의 부상장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다. 붕대가 감긴 부위에 따라 어디를 다쳤는지 금방 알 수 있었고, 붕대가 감긴 정도에 따라 부상의 경중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잘려나가지 않은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으면 경상이었고, 머리나 가슴, 배에 붕대를 감고 있으면 중상으로 보아 거의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전신에 붕대를 감다시피 한 환자도 있었고, 코와 입에만 구멍이 뚫렸고 얼굴이 온통 붕대로 감긴 사람도 있었다. 심재모는 그런 환자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부상을 멋적게 생각했다. 병실에는 느낌이 다른 신음 소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각자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질량만큼씩 흘려내고 있는 나이든 남자들의 신음 소리는 음산하고도 절망적이었다. 심재모는 눕고 싶으면서도 그 소리들을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오월의 햇볕은 두꺼웠고, 나뭇잎들은 윤기나는 푸름으로 무성했다. 햇볕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뜬 심재모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미간은 찡그러져 있었다. 햇빛 때문이 아니었다.
수술자리가 씀벅거리는 통증 탓이었다. 그의 눈길이 한곳에 멎었다. 노랑나비 두 마리가 가볍게 날개를 팔랑거리며 엉킬 듯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져 하나가 될 듯하다 사이를 뛰우고하면서 햇살 속을 날고 있었다. 아, 나비들에게는 전쟁이 없구나! 심재모는 자유로운 날개짓을 하며 날아가고 있는 두 마리의 나비를 망연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쟁은 인간만이 하는 잔인한 놀이였다. 그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 너무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밀려들었다. 나비들은 눈밖으로 사라져 버리고, 맑은 하늘만 가득한 눈앞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순덕이였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그대로 그 집에 있을까, 전진과 후퇴가 뒤죽박죽된 속에서 무사할까. 그는 그녀가 생각나기만 하면 줄줄이 이어지는 걱정을 또 되풀이하고 있었다.
심재모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담배가 갈수록 느는 것도 전쟁 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순덕이의 생각을 지우려 하면서 앞쪽 풀밭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거기 풀밭에 네댓 명의 환자들이 둘러앉아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경환자들이거나 회복기의 환자들일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소령 심재모라고 합니다.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심재모는 둘러앉은 환자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아니, 소령님..." 환자 하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유소위, 여긴 어쩐 일인가!" 심재모는 상대방을 금방 알아봄과 동시에 그가 이런 엉뚱한 곳에 와 있다는 것에 직감적인 의문을 품었다.
"저 중위로 진급했습니다." "아, 그런가. 그런데 어째서 여기까지 와 있는건가?" 심재모는 추궁하듯 묻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물음만큼 엄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로서는 저 남쪽의 훈련소에 있어야 할 자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이상스러웠고, 부하를 구타해서 죽인 그의 소행을 지금까지도 용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도 일부러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자를 장교로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 그럴 사정이 있어서 전방으로 전출했습니다." 유중위는 심재모의 눈길을 피하며 약간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자원은 아닐텐데, 왜 또 무슨 사고라도 저질렀나!" 심재모의 더욱 매서워진 눈길이 그를 조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사고는 무슨 사곱니까. 그냥 뭐, 전출명령이 떨어진 거지요." 유중위는 표나게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심재모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어딜 다쳤나?" 심재모는 말을 바꾸었다. "네에, 저어 폐가 좀 나빠서요..." "폐에? 그거 전염병 아닌가." 너무 의외의 대답에 심재모의 얼굴은 어이없게 변해 있었다. "예, 그래서 곧 후방으로 후송될 겁니다. 전 열이 나서 그만 좀 들어가봐야 되겠습니다." 유중위가 어물거리며 옆걸음질을 쳤다.
심재모는 더는 말없이 그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후방으로의 후송이 아니라 의병제대겠지 생각하며. "거기 앉으십시오. 저사람, 부하였습니까?" 목발을 허벅지 위에 걸쳐놓고 앉은 환자가 심재모를 올려다보았다. "예, 훈련소에서 같이 있었습니다." 심재모가 자리를 잡으며 대꾸했다. "저치 저거 순 빽으로 만들어진 나이롱 환잡니다." 왼쪽볼에 긴 흉터를 가진 환자가 역정을 내듯 내뱉었다. 심재모는 담배를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일론이라는 새로운 옷감은 한창 유행을 이루고 있었고, 그것은 엉터리, 가짜를 나타내는 뜻으로 새말을 번창시키고 있었다. 나이롱신사, 나이롱담배, 나이롱처녀 같은 말이 다 그것이었다. 전쟁통이라서 양복 빼입고 머릿기름 자르르 바른 사기꾼들이 드글거렸고, 입에 풀칠을 하느라고 꽁초나실담배로 만든 사제품 가짜 담배가 수없이 많았고, 군인들에 의한 강간이나 겁탈이 예사가 되어 머리를 땋거나 단발이라고 해서 처녀라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디 나이롱환자가 저것 하나뿐인가. 권력층 자식놈들이야 다 나이롱환자가 아니면 미꾸라지들이지." 옆구리를 손으로 받친 환자가 쓰게 웃었다. "좆이나 개판 군대요. 빽 있는 놈들은 다 뒷구멍으로 빠지고, 별자리들은 양키들한테 쩔쩔매고, 돈 없고 빽 없는 놈들만 최전선에서 퍽퍽 죽어가고 있는 판이니 이게 도대체 무슨 군대요." 어디가 아픈지 표가 안 나는 사내의 말은 사뭇 거칠었다. "어허, 몸에 해로운데 성질 돋구지 마시오. 군대가 그런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야 다 아는 일이고, 그게 고쳐지기야 틀려먹은 일이니까 전쟁이나 어서 끝나기를 바랩시다." 목발을 가진 환자가 공허한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놈의 전쟁이 언제 끝나겠어요. 괴뢰군이고 중공군놈들은 더 악을 부려대지, 폭탄을 퍼다부을수록 경기가 좋아진다니까 양키들은 더 신바람이 나지. 전쟁이 끝나기는 부지하세월입니다." 어디가 아픈지 표가 안 나는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글쎄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걸요. 무조건 싸워서 이기자고 밀어붙여온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당한 판이니까 의외로 전쟁이 빨리 끝날 수도 있는 일이죠." 옆구리를 손으로 받친 환자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싸움은 드럽게 돼먹고 있어요. 삼팔선에서 서로 안 밀리겠다고 으르렁대니 전과는 없고, 생사람들만 수없이 죽어자빠지는 것 아닙니까. 후방에 있는 놈들은 방위군사건같은 어마어마한 부정이나 해먹고, 이거 전방에서 죽는 놈들만 불쌍하니 사기 떨어져 다시 총잡을 기분 납니까." 왼쪽볼에 흉터를 가진 환자가 고개를 돌려 침을 내뱉었다. "어떻게 소령님도 한마디 하시죠." 듣고만 있는 심재모가 신경에 걸리는지 목발을 가진 환자가 말했다.
"아 예, 다 없는 말 하는게 아니니까 제가 따로 할 말이 별로 없군요. 제 생각으로는, 전쟁이야 한번 터졌으면 끝나는 날도 있으니까 참고 견딜 수밖에 더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부상을 당한 입장이라서 더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사를 헤아리며 심재모는 말을 완곡하게 돌렸다. 심재모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 저, 노는 꼬라지 봐라. 미친년들!" 어디가 아픈지 표가 안 나는 사내가 또 입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아, 성질내지 마시오. 남중위. 다 유엔사모님 되고 싶어 저러는데, 남중위는 흰둥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나 원망하시오." 옆구리에 손을 받친 환자가 앞쪽을 바라본 채딱하다는 얼굴로 쯧쯧 거렸다. 심재모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군의 환자막사들이 줄 맞춰 선 그 앞 풀밭에서 공치기가 한창이었다. 회복기 환자들의 운동시간인 모양이었다. 열댓 명씩이 두 패로 갈려 공을 치고받으며 껑충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간호원들이 섞여 신바람나게 뛰고 있었다. 그녀들이 바로 국군 간호원이라는 것을 심재모는 알아듣고 있었다.
"하! 유엔사모니임? 그리만 되면 오죽 좋겠습니까? 우리한테는 불친절하면서 양키라면 사병이고 장교고 가리지 않고 사죽을 못 쓰고 덤비는 저년들이 잘돼봐야 양갈보 아닙니까? 저년들이야 태평양 건너가 삼시세끼 빠다 먹고 살 생각이 굴뚝 같겠지만, 떡 줄 놈보고 물어보지도 않고 김치국부터 마시면 뭘합니까? 양키놈들이야 재미보다가 훌쩍 떠나면 그만인데, 저년들이 다 넋빠진 미친년들이지요." 심재모는 까르르 웃기도 하고, 짝짝짝 손바닥을 치기도 하는 간호원들을 망연히 바라보며 유엔사모님이라는 유행어를 실감하고 있었다. 유엔사모님이 되려는 꿈을 꾸다가 실패하면 나이롱처녀가 되는 또 하나의 길이 거기 있었다. 병동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으면서 왜 저 간호원들이 저쪽에 가있는 거냐고 그는 묻지 않았다.
그건 물으나마나 지원근무일 터였다.
가시철망으로 병동을 구분해놓고 미군의사나 간호원들은 국군을 치료하지 않아도 국군 간호원들은 미군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들은 미국사람이고, 작전권이 그들에게 있으니까. 국군 장성들이 미군 중령이나 대령인 고문관들한테 쩔쩔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국군 장성들의 진급은 그들의 작전권 행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문제였다. "뭘 좀 배웠다는 여자들일수록 미국이야 하면 신짝을 벗어붙이는 이 된 풍조가 왜 생기기 시작했는지, 참 망조는 망조요." 옆구리를 받친 환자가 혀를 차며 힘겨웁게 몸을 일으켰다. 심재모도 묵지근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팔에는 통증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몸에서는 열이 느껴졌다. 다시 자리에 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음산하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들 속에서 쉬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땅에 반쯤 박힌 바위를 찾아내고 그리로 걸어갔다.
그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오래 햇볕을 받은 바위에서 온기가 느껴져왔다. 그는 다리를 뻗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햇발의 따스함이 얇다란 솜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보드랍고 포근하고 안온했다. 먼길을 걸어온 것 같은 노곤함이 몸 전체를 지그시 눌러오고 있었다. 전쟁 일년 정신없이 보냈으면서, 지칠 만큼 날마다 시달리며 보낸 세월이었다. 그 어지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이 정도나마 무사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전쟁이 언제끝날 것인지 그 기미는 보이지 않고, 부상당한 장교들은 거의가 지쳐 있었다. 그들은 부상을 당해서 전쟁을 겁내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이다 싶게 사람이 죽어가고 다치는 전장의 일년은 평상시의 일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전쟁이 금년 안으로 끝나면... 그럼 내 나이가 몇인가... 그는 시름시름 잠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교실과 운동장의 사잇길 옆에 있는 긴 화단에는 가지가지 봄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화단에는 띄엄띄엄 학년과 반을 표시하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화단이 말끔하게 가꾸어진 것이며, 화단이 좁도록 많은 꽃나무들이 심어진 것이며, 꽃들이 싱싱하게 꽃피움한 것이며, 모두 학생들의 정성이 시샘하듯 쏟아부어졌다는 것을 그 팻말들이 설명하고 있었다. 그 꽃밭 위를 노랑나비 흰나비들이 한가로운 날개짓으로 날기도 하고, 꽃에 앉기도 하고, 나비와 달리 벌들은 날개 떠는 소리를 아련하게 내며 부지런히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쩌다가 호랑나비가 그 크고 화려하게 생긴 날개를 느릿느릿 펄렁이며 꽃 위를 날다가 어디론지 사라지기도 했다. 나비를 쫓는 아이도 없는 화단에는 봄날 오후의 적요만이 가득했다. 넓은 운동장가에는 아이들이 서너명씩 모여 무슨 놀이들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신명나는 몸짓에 맞춰 가끔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그 소리들은 운동장에 가득 찬 정적 속으로 묻혀버리고는 했다. "자아, 너희들 힘들지. 이 과자 먹으면서 쉬어서 해라." 한 남자가 교실로 들어서며 봉지를 흔들었다. "야아, 우리 선생님 잴이다!" 한 아이가 몸을 일으켜 두 팔을 뻗쳐올리며 소리쳤다. "아이고메 좋아라." 그 옆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깡충 뛰면서 손뼉을 쳤다.
그런데 나머지 한 아이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저 선생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은 무표정한 것 같기도 했고, 침울한 것 같기도 했다. 그 핏기 없는 아이는 하대치의 큰아들 길남이었다.
"자아, 이쪽으로 모여앉아 과자들 먹어라." 선생의 말을 따라 세 아이가 한책상으로 모여들었다. "반공일인데 놀지도 못하고 너희들 고생이 많구나. 어서들 먹어라." 선생이 봉지 가운데를 찢었다. 네모난 밥풀과자, 파래가 찍힌 부채과자, 희고 단 박하물을 묻힌 대통과자, 왕설탕을 묻힌 눈깔사탕, 하얀 빛 박하사탕, 땅콩 박힌 비가 등속이 푸짐하게 드러났다. "선생님, 요것얼 우리 셋이서 다 묵어도 된가요?" 소리쳤던 아이의 말이었다. "그래라. 반공일에 너희들만 고생해서 선생님이 사주는 선물이니까." 선생은 토요일을 꼭 반공일이라고 하며 세 아이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치이, 욕심쟁이. 선생님은 안 잡숫고 우리덜만 묵을라고 그냐?" 여자아이가 야무지게 눈을 흘기며 입을 삐쭉했다. "아니, 니가... 그것이 아니고..." 사내아이가 그만 무색해진 얼굴로 선생님을 쳐다보고, 여자아이를 노려보고 하면서 말이 막히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동철이가 욕심쟁이라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니까." 선생이 고개를 젖히며 허허대고 웃었다. 그 사이에 동철이는 여자아이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이며 입술에 무슨말인가를 물었다. 그 아이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독기가 올랐고, 위아랫입술이 앞으로 쑥 내밀렸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입모양을 보아 그 입에 물린 말은 니 죽어였다. 동철이의 빠른몸짓에 따라 여자아이의 어깨가 솟기며 목이 움츠러들었다.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이 앉아있는 길남이는 줄곧 과자봉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빨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침을 벌써 몇 번이나 소리나지 않게 삼켰는지 몰랐다. "자아, 선생님도 먹을 테니까 너희들도 어서 먹어라." 선생이 과자 하나를 집어들며 봉지를 아이들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러자 동철이가 잽싸게 손을 뻗쳤다. 길남이도 질세라 손을 뻗었다. 길남이는 마음 같아서는 손에 잡히는대로 한 주먹 집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내며 부채과자 하나를 집어들었다. 동철이는 벌써 으석으석 씹어대고 있었다. 길남이도 입을 있는 대로 쫙 벌리고 부채과자를 밀어넣어 콱 깨물었다. 그런데 그순간 길남이는 멈칫했다. 동생 종남이의 얼굴이 떠올랐고, 서엉 나두 묵고잡어 하는 소리까지 들렸던 것이다. 길남이는 목이 메어서 과자를 씹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과자를 공평하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과자를 야금야금 먹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지 동생에게 한두 개라도 갖다줄 수 있을까. 동철이하고 숙자가 보는 앞에서 주머니에 넣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만 다급할 뿐 무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동철이는 새로 과자를 집어와 와삭와삭 씹어대고, 숙자도 야금야금 먹어대고 있었다. 애가 닳아 미칠 것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먹으면서 생각하자. 길남이는 과자를 씹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씹은 과자를 넘기고, 남은 과자쪽을 입에 넣는 순간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과자를 반쪽씩만 먹고 나머지를 손안에 감춰 두 애들 몰래 주머니에 옮겨넣자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일들을 얼마나 했냐." 선생이 담배를 빼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남이는 그만 소리를 지를 것처럼 기뻤다. 이젠 선생님의 눈치는 안 살펴도 되었던 것이다. 길남이는 손안에 감추기 쉬운 밥풀과자와 대통과자만을 골라서 반씩 깨문 다음 나머지는 눈치껏 주머니에 넣고는 했다. 동철이와 숙자는 저희들 먹기에 정신을 팔고 있어서 그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길남이는 마음이 흐뭇해져서 과자맛이 제대로 나고 있었다. 이렇게 과자며 사탕을 맘놓고 먹을 수 있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누구나 그랬고, 과자점에 쌓인 과자나 유리그릇 속의 사탕은 부잣집 아이들의 차지였다. 가난한 아이들은 과자점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회가 동할 때 같은 군침만 흘렸다. 빨리 먹을 수 있는 과자가 동이 나고 사탕만 남았다. 사탕도 서로 빨리 먹으려고 이빨이야 아프든 말든 마구 씹어서 삼켰다. 길남이는 사탕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먹어대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입안이 화해지는 박하사탕은 와삭와삭 씹어먹는 것이 제맛이 났지만, 눈깔사탕은 한쪽 볼에 몰아넣고 살살 녹여가면서 먹어야만 제맛이 나는 것이었다. 사탕은 반쪽씩 깨물어 쪼개자면 힘도 들고 침도 많이 묻어 길남이는 입에 넣는 척하며 손안에 감추고 다른 손으로 새 사탕을 집어드는 방법을 썼다. 그러면서 길남이는 숙자에게 은근히 미움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숙자는언제나 장조림이나 짱뚱이무침, 계란부치기 같은 반찬을 싸오는 부잣집 딸로 평소에 과자나 사탕을 실컷 먹고 살았으면서도 조금도 양보하는 기색 없이 먹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길남이는 자기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숙자는 평소에도 누가 반찬을 뺏아먹을까봐 도시락 뚜껑을 세워 도시락을 가리고 밥을 먹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 짓은 계집애인 숙자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잣집 아들들인 최경석이나 안장호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먹었냐? 이제 또 일을 시작해볼까?" 선생이 아이들 가까이 다가왔다. "선생님, 요것 잡수시씨요. 선생님 몫아치로 냄긴 것인디요." 숙자가 네댓 개 남은 사탕을 가리키며 냉큼 말했다. "응, 그래. 선생님은 됐으니 너희들이나 다 먹어라." 선생이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러나 길남이와 동철이는 서로 눈칫하며 머뭇머뭇 일어섰다. 길남이는 속으로 저 여시! 했고, 동철이는 지년만 신용 얻을라고! 하고 있었다. 숙자는 벌써 제가 그리던 그림이 놓인 책상으로 가 있었다. 길남이는 오랜만에 달고 꼬신 사탕과 과자를 푸짐하게 먹은것이 그렇게 흡족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직 양은 다 차지 않았지만 제 몫에서 동생 것을 따로 챙겨넣은 것이 마음을 그렇게 흡족하게 할 수가 없었다. 길남이는 언제나 동생이 가엾고 불쌍했다. 동생은 언제나 배가 고파 허덕거렸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 허덕거렸다. 어머니가 소화아주머니와 함께 순천으로 떠나는 것을 멀리서 보고 돌아온 그날 밤 동생은 자면서도 울며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그 뒤로도 자주 그랬다. 몇번이고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동생은 어머니가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부지넌 멀 허는 겨, 엄니가 잽혔는디." 동생은 이런 말을 불쑥하며 눈물이 핑 돌기도 했고, "나가 어런이먼 을매나 좋까, 엄니럴 팍 구해내뿔게." 이런 말을 느닷없이 하고는 입술을 깨물고 돌로 땅바닥을 쳐대기도했다. 배를 곯는데다 어머니 걱정 때문에 동생은 더 기운이 파해가고 있었다.
길남이는 환경미화를 하기 위해 뽑힌 것도 기뻤지만, 사탕과 과자를 동생 몫까지 챙기게된 것은 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꼭 손재주가 좋아 환경미화에 뽑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 공작품을 잘 만들고, 그림을 잘 그려도 선생님이 뽑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자기는 아이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빨갱이의 아들이었고, 공비의 아들이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아이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환경미화에 뽑아준 것이었다. 월요일에 실시되는 환경미화 심사 때문에 교실마다 아이들이 서너 명씩 남아 선생님과 함께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경미화에는 교실치장과 복도 윤내기, 화단가꾸기가 다 들어갔다.
수수깡으로 여러 가지 공작품을 만들고 있는 길남이는 자꾸 목이 마르고 오줌까지 마려워 마음먹은 대로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목이 마른 것은 단 것을 많이 먹은 탓이고, 오줌이 마려운 것은 주머니에 넣은 동생 몫의 과자며 사탕을 변소에 가서 아무도 몰래 다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길남이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변소 잠 댕게올라는디요." "응, 그래라." 붓글씨를 쓰고 있던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남이는 하르르 숨을 내쉬며 교실을 뛰어나갔다. 그 쉬운 말이 왜 그렇게 하기 어려웠는지, 가슴까지 두근거림을 느꼈다. 변소로 곧장 달려간 길남이는 소변보는 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변소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닫은 길남이는 앞뒤로 밀고당기는 문잠그래를 힘껏 밀어댄 다음 어깨로 문을 떠받쳐보았다. 변소문은 잘 잠겨 있었다. 길남이는 비로소 휴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었다. 과자와 사탕이한 움큼 잡혔다. 길남이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의 눈앞에는 동생의 놀라는 얼굴과 기뻐하는 얼굴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주머니에 든 것을 몇 개만 조심해서 꺼냈다. 그것을 두 손바닥을 모아 받쳤다. 반으로 잘린 대통과자 두 개, 박하사탕 하나였다. 그러고도 주머니에는 또 과자와 사탕이 들어 있었다. 당당하게 형 노릇을 하게 된 것이 그렇게 기분좋을 수가 없었다. 길남이는 만족감으로 숨을 한껏 들이켰다. 오래 된 똥냄새가 그대로 빨려들었다. 그러나 길남이는 웃고 있었다. 그 냄새는 평소와는 달리 쿠리지도 독하지도 않았다.
한쪽 주머니에만 다 넣으면 표가 날까봐 길남이는 과자와 사탕을 양쪽 주머니에 갈라넣기 시작했다.
"무찌르자아 오랑캐애 몇백만이냐아..." "음마, 엄니이..." 남자아이들의 노래 소리와 함께 여자아이의 다급한 외침이 바로 변소 뒤에서 터져나왔다. 과자와 사탕을 갈라넣는 데 정신을 팔고 있던 길남이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찌르자아 빨갱이이 몇백만이냐아..." "아야야! 워째 이려!" 여자아이를 때리는지 그 비명이 날카로왔다. "이년아, 니가 빨갱이 딸년잉께 그런다." 사내애의 말이었다. "긍께로 니도 무찔르는 것이여!" 다른 사내애의 목소리였다.
"나가 워쨌간디 이려. 어런덜이 헌 일얼 갖고." 계집애의 또렷한 말이었다. "이년이 멀 잘했다고 싸납게 뎀비고 지랄이여!" 또다른 사내애의 목소리였다. "아야야! 엄니, 엄니!" 계집애의 비명이 숨이 넘어갔다. 길남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계집애가 세 사내애들한테 당하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환하게 떠올랐다. 자신이 혼자서, 또는 동생과 함께 벌써 여러차례 당해본 일이었던 것이다. 어떤 불쌍한 계집애가 변소 뒤에까지 끌려온 것일까... 길남이는 이를 맞물었다.
"무찌르자아 오랑캐애..." "무찌르자아 빨갱이이..." "아야! 아야! 아이고 엄니! 엄니, 엄니!" 사내애들이 노래를 불러대며 마구 때려대는지 계집애의 비명 소리가 더 다급하고 날카로와졌다. 길남이는 더 견디지 못하고 변소문을 밀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변소 뒤로 돌아갔다.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아..." "아야야, 엄니 나 죽어! 엄니이!" 길남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 사내애들이 계집애를 둘러싸고 노래에 맞춰 막대기로 때리고 찌르고, 치마를 걷어올리고 했고,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며 치마를 움켜잡느라고 정신이 없어 새내애들이 때리고 찌르는 것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집애의 얼굴이 이쪽으로 돌려지는 순간 길남이는 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여자아이는 하필이면 덕순이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과 덕순이 아버지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덕순이하고는 인공이 되었을 때 서로 알게 되었고, 인공이 끝나자 서로 모르는 척하게 된 사이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다. 저절로 서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모른 척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사내애들은 셋이었고,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몸집도 다 자신보다 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찌르자아 빨갱이이..." "아야야! 엄니이!" 길남이는 앞으로 튕겨나가며 외쳤다. "이 새끼덜아, 지랄치지 말어!" 세 사내애들의 몸짓이 뚝 멈춰졌다. 길남이와 덕순이의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눈물범벅인 덕순이가 멈칫 놀랐다. 그리곤 얼른 눈물을 훔쳤다.
"니가 먼디 나서야, 이새끼야!" 한 사내애가 눈을 부라리며 나섰다. "쥐방울만헌 새끼가뒤지고 잡은갑네?" 다른 사내애가 더 당당한 기세로 나섰다. "우리 누나다, 워쩔래!" 길남이의 입에서 튀어나간 말이었다. 덕순이는 나이도 한 살 많았고, 학년도 한 학년이 높은 육학년이었던 것이다. "옳여, 니도 빨갱이 새끼여?" "잉, 아조 잘 만냈응께 맛 잠 봐." "새다리겉은 새끼가 워째 겁도 웂이 뎀비고 지랄이여!" 세 사내애들이 한마디씩 내뱉으며 얼굴들을 구겼다. "안 되어, 싸우면 안 되어. 쟈덜언 셋이여, 셋." 덕순이가 고개를 저으며 길남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그런 덕순이의 얼굴은 울고 있었다. 이빨을 앙다문 길남이는 부르르 떨었다. "오냐, 뎀베라. 니까징 것덜 셋이먼 다냐!" 길남이는 소리치며 잽싸게 돌을 집어들었다.
그때 세 아이가 막대기들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안 된다니께! 안 되야!" 덕순이가 팔딱팔딱 뛰며 소리쳤다. 그러나 길남이와 세 아이들은 뒤엉키고 있었다. 길남이가 아무리 독을 부렸지만 혼자서 세 아이를 당할 수는 없었다. 세아이들을 상대로 치고 차고 하다가 얼마 못 가 엎어지고 말았다. "선생니임! 선생니임!" 덕순이는 소리소리 질러대며 교실 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정신없이 뛰고 있는 덕순이의 한쪽발에는 검정고무신이 신겨져 있었고, 다른 한쪽 발은 맨발이었다. 덕순이가 선생님을 모시고 변소 뒤로 왔을 때는 세 아이들은 간 곳이 없고, 길남이만 코피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채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나 땀세 니가 요리 다쳤시니..." 우물가에서 물을 떠주며 덕순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아녀, 나넌 아니간디." 길남이는 얼굴의 피를 닦아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덕순이를 구하려고 당당하게 나서서 싸운 것이 더없이 기분좋았고, 오랜만에 먹은 과자와 사탕이 피를 흘려버려 본전치기가 된 것이 아까웠고, 얼떨결에 누나라고 둘러붙였던 것인데 막상 단둘이 있게 되자 그 말이 안 나오는 것이 이상했고, 길남이의 마음은 복잡했다.
"니가 그리 용감헐 줄은 몰랐다. 니가 느그 아부지 탁했는갑다." 그 엉뚱한 말에 길남이는 덕순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두레박을 들고 선 덕순이는 그런 겁나는 말을 언제 했느냐 싶게 베시시 웃고 있었다. 그 태연함에 안심하며 길남이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니, 아부지가 밉냐?" 덕순이가 물었다. "아녀." 길남이는 고개를 젓고는, "우리 둘이라고 고런 말 자꼬 허지마." 불퉁스럽게 말했다. "알았어. 나도 오랜만에 혀본 말이여." 덕순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길남이는 고개를 돌리면서 덕순이의 장딴지가 여기저기 긁혀 있는 것을 또 훔쳐보았다. 그놈들한테 얻어맞은 자리가 볼이고 가슴팍이고 옆구리고 아직까지 얼얼하고 아팠지만 자신의 아픔보다는 덕순이가 당한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지고 있었다.
길남이는 덕순이와 헤어져 교실로 돌아오면서야 자기가 과자와 사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것을 좀 나눠줄 것을 하고 생각하며 길남이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니! 길남이는 멈칫 섰다. 손에 잡히는 과자의 감촉이 아까와 달랐던 것이다. 잡히는 대로 과자를 꺼냈다. 손바닥에는 밥풀과자 반쪽과 눈깔사탕 하나,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가 조금놓여 있었다. 길남이는 그때서야 동그란 대통과자가 싸움을 하면서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하는 바람에 다 깨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깝고 또 아까웠다. 그렇지만 싸움한 것이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평소에 싸움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어쩌다 싸움을 하게 되면 꼭 아버지와 연관되는 일 때문이었다.
"어디, 많이 다치지 않았냐?" "예, 암시랑 않구만요." 덕순이네 선생님 연락을 받고 변소뒤에까지 나오셨던 담임선생님의 물음에 길남이는 고개를 숙이며 낮게 대답했다. "그래, 그놈들이 나쁜 놈들이다. 다 잊어버려라." 선생이 길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남이는 코허리가 찡 울리면서 목이 메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