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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 1858~1925 정미칠적/ 중추원고문/ 일진회 총재
1858년 8월 20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이다. 호는 연사 도호는 제암이다. 1895년 일본에 갔을 때는 노다 헤이지로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1871년 3월 무과와 중시에 합격하여 수문장에 임명되었다. 1872년 4월부터 1873년 9월까지 훈련원주부 판관 참정을 지냈다. 1874년 6월 도총부 도사 및 경력에 1875년 4월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오는 ㅇ리본 특명전권대사 구로다기요타카 일행을 환영하는 반접 수행원을 맡았고 이후 일본의 대표적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와 함께 부산에 본인 명의로 상관을 개설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가재가 불에 타자 잠시 피난하며 생명을 보전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도 가옥과 재산을 모두 잃자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5년 귀국했다. 1886년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나 통모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00여일 후 풀려났다. 같은 해 7월 중추부 도사로 특배되었으며 1887년 7월 친군후영대관에 1888년 8월 평안남도 영원군수에 1889년 9월 경상북도 흥해군수에 1890년 5월 경기도 양지현감에 1891년 9월 친군장위영 영관에 임명되었다.
1895년 개성 인삼을 다량 밀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904년 귀국할 때까지 노다 헤이지로로 행세하면서 일본 각지를 다니면서 일본정치인과 명사들을 만나는 한편 야마구치현 아부군하기정에 양잠제사와 직물염색연습소를 창립하여 남녀학생들을 가르쳤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병참감 육군 소장 오타니 기쿠조를 따라 귀국하여 고등 통역으로 경성군사령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함께 청국까지 종군했다. 1906년 6월 서경전각 영건 감동 및 역비독쇄관에 임명되었다. 1907년 2월 일본에 건너가 통감 이토히로부미를 만났고 5월에는 박제순 내각이 사직하자 이토에게 이완용을 황제의 의사에 반하고 통감의 지도를 좇아 제정을 개혁할 자라며 천거 했다.
이완용 내가이 성립되자 이토의 추천으로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어 광산사무국 총재를 겸했고 7월 임시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위원장을 9월에는 평양광업소총재를 겸했다. 헤이그특사사건과 관련하여 고종에게 일본에 사죄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어전회의에서 이완용 등과 함께 양위를 주장하여 강제퇴위에 앞장섰다. 정미조약(한일신협약)체결에 동조하여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조중응 이재곤 과 함께 정미7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0월에는 이러한 공로로 일본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황태자 이은의 일본 유학 때 배종했으며 일본 체류 중 일본동양협회에 거액을 기부하여 회원이 되었다.1908년 6월 내부대신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 2월에는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에게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대가로 1억엔을 요구했다. 1909년 2월 내부대신을 그만두었으며 8월에는 일본에 머물면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꼬 1910년 8월 귀국했다.
한편 1904년 8월 정치적 야망가들을 중심으로 유신회가 조직되자 일진회로 개명하도록 지뭔했다. 이후 일진회는 같은 해 12월 천도교의 민회조직인 진보회와 합동해 조직을 정비하면서 전국 퇴대규모의 정치결사가 되었다. 1905년 1월 조직 개편 때 평의원장에 임명되어 일진회가 주최하는 각종 연설회에서 수 십 차례 변사로 활동했다. 1905년 7월 상업회의소 감독을 맡았고 11월에는 일진회 특별평의회에서 평의장으로서 일본에 외교권을 위임하자는 내용의 ‘보호청원’선언서를 가결한 후 선언서 제술위원 홍긍섭이 이를 낭독 공포했다. 같은 해 12월에 일진회 지방총장에 1906년 8월 총무원으로 일진회 회장대리에 선임되었다. 당시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가 연방설을 언급하자 “일한의 연합은 한국민의 이익이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 황제의 재위 중에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으므로 이를 폐위하는 것이 가장 급무”라고 토로하면서 폐위논의는 ‘10년 이래의 지론으로서 민비사변 때에 이미 제의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1월 창간된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에서 초대사장 이용구에 이어 2대 사장을 맡아 1907년 5월까지 재임했다.
1907년 2월 평원철도기성동맹회 찬성원으로 활동했고 10월에는 한국시찰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일본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한성부민회가 조직한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고문을 맡은 한편 같은 목적으로 전현직 대신과 관료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1월에는 진황지 개척을 목적으로 국민농업회사를 설립해 사장을 맡았다. 1908년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을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다. 1909년 3월 일진회 총재로 선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지내면서 일본 내각에 「일한합방의 선결문제」, 「일한합방 후의 한국제도」등의 문건을 제출했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일진회장 이용구와 여러 차례 협희안 후 이용구와 100만 회원 이름으로 순종과 이완용 내각 및 통감부에 정합방상주문을 제출케 하는 한편 ‘국민2천만 동포에게 서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11년 8월까지 연수당 1600원을 받았다. 같은 달 7일에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10만원을 밭았고 같은 달 양잠전습소를 설립했다. 8월 29일에는 ‘병합1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일제의 조선지배와 일본천황을 찬양하는 축사를 발표했다. 1912년 3월 연초회사 설립을 준비했고 5월 이용구가 사망하자 「해산 이용구 묘지명」을 썼으며, 7월 경기도 대지주회 부회장을 지냈고 11월에는 경성거류민단 교육기본금으로 550원을 기부하여 은해 1조를 받았다. 같은 해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에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7월 조선무역주식회사 창립을 발기하는 한편 조선 귀족들의 식림사업과 농장경영 등을 위해 조직된 조선 임업조합 보식원 간사에 선출되었다.
1914년 9월 조선농업주식회사 사장 명의로 경성군인우원회에 기부금을 내는 한편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부 평의원에 임명되었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지배를 정당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1915년 1월에는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발기인으로 상의원에 선출되었고 4월에는 특별유공회원으로 300원을 기부했다. 『매일신보』1915년 1월 1일자에 「조선귀족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조선귀족의 의무와 책임은 조선총독의 시정을 보좌”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조선 귀족들은 각성할 ㄱ서을 촉구했다. 같은 해 11월 다이쇼즉위대례식에 참석했고 처 김씨와 함께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즉위식에 다녀와서 『매일신보』11월 20일자에 「실로 이천만민의 광영」이라는 제목으로 “친히 용안의 화려하심을 배찰한 위에 칙어까지 내리심에 참예함을 얻음은 나의 가장 영광으로 여기는 바”라며 감격에 겨운 소회를 밝혔다. 이 해 말 경기농사장려회 부회장을 맡았다. 1916년 1월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임명되었고 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회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24년 1월에는 오랫동안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으로 활동한 공로로 감사장을 받았다. 1917년 2월 전라북도장관 이두황 묘비 건설비로 50원을 기부했고 1918년 4월 도장판의 자문기구인 경기도참사에 임명되었다. 1918년 6월 충북 영동군내 면사무소 건축비를 기부하여 목배를 받았고 8월에는 경성구제회에 1000원을 기부했다. 1919년 1월 고종의 국장 장의 총무계 및 고문을 맡았고 12월 정4위로 승서했다.
3.1운동 후 정무총감이 되기 위해 도쿄 중앙정계에서 운동을 벌이는 한편 수상 하라 다카시에게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일본 홋카이도에 막대한 토지를 불하해 달라고 요구했다. 1925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조사, 작성된 송병준의 「재산정리목록」에는 홋카이도 가와카미군에 원야 560만 9041평 당시 시가로 5만 6000엔에 해당하는 토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0년 4월 왕세자 이은 결혼에 대한 공로로 금배1조를 받았고 11월 “팽배하는 불온사상의 타파”를 목적으로 전국에 총상협회를 조직하여 총재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백작으로 특별승작했는데 수작자로서 승작한 인물은 백작에서 후작이 된 이완용과 함께 두 명 밖에 없다.
1921년 4월 중추원 관제가 개정되면서 중추원의 친임관대우 고문에 임명되어 1925년 2월 사망할때까지 한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중추원 고문에 재임명되던 달에 대정친목회가 운영하던 『조선일보』의 판권을 인수하고 1923년 봄부터 1924년 9월까지 사장을 역임하다가 신석우에게 매각했다. 1921년 5월 일본 동광회의 데라오 도루 구즈 요시히사 우치다 료헤이 등이 조선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하자 유민회를 대표하여 논의에 참여했다. 같은 해 8월 아들 송종헌등과 조선소작인상조회를 발기하여 회장을 맡았고 9월에는 산업조사위원회 경기도 위원으로 촉탁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1922년 3월 조선건축회 명예회원을 맡았고 7월 “가정의 윤기를 바르게 하고 사회의 풍기를 개선하여 민풍을 함양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경성교풍회 회장을 맡았으며 10월 조선흥업은행 설립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3년 1월 조선도서인쇄주식회사 창립발기인으로 활동했고 7월 조선일보사 대표로 부업공진회 촉탁으로 참여하여 10월에는 잠업장려와 발전에 공헌한 공로로 부업공로자표창을 받았다.
1924년 4월 반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일선융화를 내걸고 결성된 친일단체동민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사망할때까지 고문을 맡았으며 5월 종3위로 승서되었다. 또한 1920년대에는 금강산전기철도 대전전기 조선상업은행 중앙물산 등 주식회사의 대주주를 1923년에는 고려요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1925년 2월 1일 사망했다. 사망 전날인 1월 31일 특지로 정3위로 승서되었고 사망 후에는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일본 천황은 포도구 12병을 내려 조의를 표했고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세인이 공지하는 동양평화의 공헌자”라고 조문했다.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이어받았다.
1925년 2월 9일 남산정에서 장례가 치러짐과 동시에 도쿄 야스쿠니신사에서도 성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1934년 11월 흑룡회가 도쿄의 메이지신궁옆에 세운 일한합방기념탑의 석실에 일진회간부로서 합병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이름을 올렸다. 1939년 4월 대동일진회 주회로 “인류의 선각자요, 선구자”인 이용구 송병준 추도회가 열렸고 11월에는 흑룡회 주최로 ‘일한병합30주년’을 기념하여 합병 공로자 이용구 박영효 이완용 송병준 등을 위한 위령추도식도 열렸다.
1943년 7월 장손인 노다 타로는 조부가 후세에 전하라고 제작해 물려준 송병준 동상 두 개와 유기등을 ‘결전하 금속회수운동’에 협력하는 뜻으로 헌납했다. 『매일신보』1913년 1월 21일자 「조선인물관 : 사지에 함함이 십수 회에 급한 조선일류의 인걸-자작 송병준씨」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평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일한의 친선을 증진하기로 필생의 힘을 다하고 공사간에 공적이 심대할 뿐 아니라 밤낮으로 조선으로 하여금 문명국과 비견하기를 도모하고 신변의 의식주까지 모두 일본풍을 모방하여 조금도 일본인과 다름이 없다. 그 풍모를 보면 유아한 고표가 있고 그 논변을 들으면 상설의 가 있으며 심상한 교제에는 웅용온화하다가 간혹 주락호패하여 담소하는 사이에도 그 첩예한 재기를 드러내고 큰일에 임해 대책을 결정할 때는 의리가 삼업하여 간사한 무리들이 충심으로 두려워하고 나쁜 무리들이 혼을 빼고 놀라니 실로 조선 일류의 인걸이라 칭하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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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본도 인정한 매국의 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