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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3월 데뷔한 프라이드는 기아가 6년 만에 승용차 시장에 복귀하면서 내놓은 야심작이다. 1.1X와 1.3X 엔진을 얹은 3도어 해치백이 먼저 데뷔했고 이후 5도어 해치백, 4도어 세단, 밴, 왜건 등으로 성공적인 가지치기를 했다. 다부진 몸집과 싼값, 뛰어난 연비로 인기를 모은 프라이드는 후속모델 아벨라가 나온 이후에도 계속 생산되다가 99년 12월 리오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글·이상필 기자(spikelee@carvision.co.kr)
87년 3월 5일 열린 프라이드 새차 발표회 모습. 이날 하루 5만 명이 다녀갔다
새차 발표회 날 열린 소하리 프라이드 전용공장 준공식. 연산 15만 대 규모를 갖췄다
가장 먼저 데뷔한 3도어
1.1X 모델을 개량한 저가형 팝
프라이드의 대표 모델인 5도어
4도어 세단 프라이드 베타
업무용으로 많이 팔린 밴
짐칸을 늘여 실용성을 높인 프라이드 왜건
왜건의 고급형 프렌드
경차와 경쟁했던 저가 모델 프라이드 영
데뷔한 지 오래된 국산차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이번 호부터 ‘국산차 재조명’을 연재합니다. 현재 단종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차, 요즘도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차 중에서 매달 한 대를 선정, 역사와 판매대수, 생산모델, 시승기 등을 실을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바랍니다. <편집자>
1987년 3월 5일 서울 영동(현재는 삼성동) 코엑스 1층 메인홀, 이 곳에 전시된 42대의 새 차를 보기 위해 이날 하루 5만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국내최초의 모터쇼 이야기가 아니다. 6년 만에 승용차 시장에 컴백한 기아자동차의 야심작 ‘프라이드’의 새차 발표회 풍경이다. 발표회 다음날부터 이틀 동안만 열 예정이었던 전시회는 끝없이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하루를 연장한 3월 8일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기아자동차는 3일 동안 모두 2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발표했다. 전시회는 곧이어 부산, 대구에서도 열려 큰 호응을 얻었다. 80년대 후반 현대 포니 엑셀·프레스토와 대우 르망이 주도하던 국내 소형차 시장에 새로운 강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새차 발표회에 20만 명 다녀가
프라이드는 기아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차다. 1981년 정부의 강압적인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 이전까지만 해도 기아는 브리사, 푸조604, 피아트 등을 내놓았던 이른바 ‘잘 나가는’ 승용차 메이커였다. 정부의 갑작스런 승용차 생산 규제 조치로 상용차 메이커로 축소된 기아는 국산 원박스카의 대명사 봉고로 신화를 창조하며 승용차 시장 재진입을 준비했다. 1987년 1월 자동차공업합리화 조치 해제 두 달 만에 데뷔한 프라이드는 그 동안 기아가 얼마나 승용차 시장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프라이드가 데뷔하던 날, 기아는 경기도 소하리 봉고 공장 안에 세워진 1만4천 평 규모 프라이드 전용 공장의 준공식을 가졌다. 준공식장 한 쪽에는 미국 수출을 앞둔 수백 대의 프라이드가 도열해 있었다. 6년 동안 기다리던 승용차 시장 복귀와 연산 15만 대 규모의 전용 공장 완공. 1987년 3월 5일은 기아자동차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로 남은 날이다.
이렇듯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프라이드는 순수 국산기술로 만든 승용차는 아니었다. 프라이드를 설계한 회사는 일본의 마쓰다. 설계는 일본, 생산은 한국, 판매는 미국 포드가 맡아서 하는 ‘월드카’로 탄생한 차가 프라이드다. 국산 월드카 1호는 프라이드보다 조금 앞서 데뷔한 르망으로, 독일 오펠의 카데트를 대우가 생산하고 미국 GM이 폰티액 브랜드로 팔았다. 프라이드는 국내보다 일본에서 먼저 ‘페스티바’라는 이름으로 86년 2월 데뷔했다. 페스티바는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스타일, 성능, 경제성 등에서 가장 앞선 차로 인기를 모으며 86∼87년 일본 베스트카 디자인 대상을 받기도 했다.
92년 한 해 동안 12만6천 대 판매
승용차 하면 으레 세단형만을 떠올리던 국내 자동차 시장에 프라이드는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차체 뒤쪽을 잘라낸 듯한 해치백 스타일에 대해 “트렁크가 없으니 짐은 어디에 싣느냐”, “뒤에서 받히면 크게 다친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지만 깜찍한 스타일과 싼 값, 뛰어난 연비로 데뷔 첫 해인 87년 2만8천627대가 팔렸다. 이는 당시 국산 소형차 판매의 20.8%에 이르는 수치였다. 데뷔 이듬해인 88년은 5도어 모델이 추가되면서 판매량도 4만5천276대로 크게 늘었고, 이후 매년 1만∼2만 대씩 늘어 92년에는 연 판매대수 12만6천226대, 소형차 시장 점유율 39.4%라는 기록을 세웠다. 프라이드는 승용차 전체 판매대수에서 91∼92년 연속 2위 자리에 올랐다. 91년에는 엑셀이, 92년에는 엘란트라가 전체 1위를 차지했다.
94년 3월 후속모델 아벨라가 나왔지만, 프라이드는 계속 생산되었다. 아벨라가 예상만큼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한달 뒤 엑셀의 후속 모델 엑센트가 발표되면서, 아벨라와 기아 고객을 양분한 프라이드의 판매량은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94년 프라이드는 예년의 절반 수준인 4만8천379대를 파는 데 그쳤다. 이후 가지치기를 통해 왜건과 저가형 모델 영을 추가했지만 한번 떨어진 인기는 회복할 수 없었다. 98년 기아 부도로 4천672대가 팔려 데뷔 이래 최저 판매를 기록한 프라이드는 99년 12월 리오가 등장하면서 아벨라와 함께 단종 되었다. 프라이드는 13년 동안 147만여 대가 생산되었으며 국내 69만여 대, 해외에서 78만여 대가 팔렸다.
프라이드 모델 소개
1.1 3도어, 1.3 3도어
87년 3월 나온 프라이드의 데뷔 모델은 전부 3도어 해치백이다. 1.1X급 CD, EF와 1.3X급으로 CD, EF, DM 등 5개 모델이 가장 먼저 팔리기 시작했다. 모델명 CD는 기본형, EF는 고급형, DM은 최고급형을 말하며 이는 기아자동차의 사훈에서 따온 ‘신용(credit), 노력(effort), 꿈(dream)’을 의미한다.
1.1 CD와 EF는 1천139cc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70마력/6천rpm, 최대토크 10.3kg·m/3천500rpm을 냈다. 1천323cc 엔진을 얹은 1.3 CD, EF, DM의 최고출력은 78마력/5천500rpm, 최대토크는 12.0kg·m/3천500rpm이다. 기본형 CD는 그야말로 별다른 장비를 찾아보기 힘든 ‘저가형’이다. 수동 안테나에 스피커도 하나뿐이다. 바로 윗급의 EF는 기본형에 없는 타코미터, 뒤 열선유리, 디지털 시계를 비롯해 틸트 스티어링, 운전석 요추받침, 5:5 분할 시트, 분리형 헤드 레스트 등을 갖추었다. 고급형 DM에는 뒷유리 와이퍼, 안개등, 원격조정 트렁크 & 연료주입구 열림장치 등이 더해진다. 프라이드의 연비는 18.6km/X로 당시 최고수준을 자랑했고 0→시속 100km 가속은 13.0초. 데뷔 당시 차값은 329만5천 원(1.1 CD)부터 399만5천 원(1.3DM)이었다.
87년 8월 캔버스톱 옵션을 추가했지만 115만 원이나 되는 비싼 값 때문에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88년 3월에는 1.3X 라인업에 전자식 연료분사장치를 갖춘 최고급형 FS가 더해졌다. 91년 중반에는 1.1X 모델이 ‘팝’으로 독립했고 94년 6월 들어서는 모델명을 LX, SLX, GLXi로 바꾸었다. 97년 6월 단종 될 때까지 11만8천243대가 팔렸다.
1.1 팝(Pop)
91년 5월 국산 첫 경차 티코가 나오면서 싼값으로 인기를 모으자 기아는 1.1 3도어 CD와 EF를 따로 독립시켜 ‘팝’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기본형 LX와 고급형 SLX 모두 값을 내리기 위해 타코미터를 달지 않았다. LX의 값은 티코 기본형(299만 원)보다 80만 원 비싼 379만 원이었지만 당시 유일한 300만 원대 소형차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팝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89년 324대에 불과했던 1.1X 모델의 판매는 91년 6천699대, 92년 1만2천491대로 크게 늘었다. 94년 5월 상용차 개념의 밴이 나오면서 단종되었고 3년 동안 3만 대 가까이 생산되었다. 국산 승용차 중 1.1X 엔진을 얹은 마지막 차가 된 프라이드 팝은 최고시속 155km에 연비 17.39km/X, 최고출력 62마력/6천rpm을 내 다른 모델보다 달리기 성능은 뒤졌다.
1.3 5도어
88년 6월 데뷔한 후 99년 12월 단종될 때까지 31만여 대가 팔린 프라이드의 대표 모델이다. 앞서 나온 3도어에 대해 “뒷자리에 타고 내리기 어렵고 짐칸이 부족하다”는 고객들의 불만이 계속되자 이를 보완해 리어 도어를 달고 뒷부분을 조금 늘여 트렁크 공간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휠베이스와 실내도 50mm 늘어났다. 89년 한 해 동안 4만1천128대가 팔려 3도어의 판매(1만6천582대)를 크게 뛰어 넘었고, 93년에는 5만4천593대가 팔려 전체 프라이드 판매(11만4천308대)의 50% 정도를 차지했다. CD, EF, DM 등 3개 모델로 데뷔했고 이후 컬러 범퍼와 파워 도어록, 파워 윈도, 전동식 사이드 미러, 틴티드 글라스 등을 옵션으로 마련한 FS를 추가했다. 94년 5월부터 LX, SLX, GLXi 모델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GLXi 하나만 남아 프라이드 단종 때까지 생산되었다.
1.3 베타(β)
기아가 자체 개발해 90년 11월 내놓은 4도어 세단으로, 베이스 모델인 마쓰다 페스티바에는 없다. 특별히 세단형 승용차를 선호하는 국내 고객들을 위해 만든 모델이다. 트렁크 부분이 늘어나 5도어보다 320mm 길고 75kg 무겁다. 최고시속은 162km, 연비는 16.79km/X로 커진 차체에 상관없이 좋은 편이다. 91년 4만84대, 92년 5만399대가 팔려 3도어와 5도어를 제치고 프라이드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99년 12월까지 모두 18만7천944대가 팔렸다. 기본형 LX와 고급형 SLX는 카뷰레터 엔진을 그대로 썼지만, 최고급형 GLXi는 전자식연료분사(EGI) 엔진을 얹어 최고출력 73마력(5천500rpm)을 냈다. 데뷔 당시 차값은 LX 455만 원, SLX 495만 원, GLXi는 549만 원이다.
1.3 밴
5도어와 4도어 세단의 가지치기에 성공한 기아는 92년 10월 1.3 3도어 기본형의 뒷좌석을 떼어내고 300kg의 짐칸을 갖춘 밴을 내놓았다. 프라이드 밴은 승용차 베이스의 밴 중에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상용차로 분류되어 세금 혜택을 받은 차다. 기업체의 업무용, 판촉용, 자영업자에게 많이 팔려 데뷔 첫 해 두 달만에 3천155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99년 단종 때까지 해마다 1천 대 이상 꾸준히 팔려 모두 1만2천 대가 넘게 생산되었다.
1.3 왜건, 1.3 프렌드
프라이드 왜건은 96년 1월 데뷔했다. RV 수요 증가에 발맞춰 개발한 모델이다. 프라이드 특유의 튼튼함과 왜건의 장점인 실용성, 넓은 공간을 무기로 시장을 공략했다. 길이는 3천922mm로 베타보다 13mm 짧지만, 트렁크 용량은 367X로 30X 크다. 또 뒷좌석 더블폴딩 기능을 갖춰 짐칸을 687X로 늘릴 수 있다. 데뷔 당시 차값은 555만 원으로 준중형 왜건 아반떼 투어링(910만 원)보다 335만 원이나 쌌다.
프렌드는 왜건의 고급형 모델로 97년 5월 데뷔했다. 차값은 왜건보다 20만 원 비싼 575만으로 우드 그레인, 루프 랙 등이 더해졌다. 또 프라이드 중에서는 처음으로 CD 플레이어를 옵션으로 마련했고 트렁크 그물망도 기본으로 갖추었다. 왜건은 데뷔 후 2만4천여 대가 판매되어 비교적 성공한 모델로 평가되지만, 프렌드는 총 판매대수 2천 대를 넘지 못하고 단종되었다.
1.3 영(Young)
97년 2월, 프라이드 데뷔 10주년을 맞아 나온 저가형 모델이다. 어려워진 경제상황으로 티코가 다시 인기를 얻고, 아토스와 마티즈가 데뷔를 앞두고 있어 ‘경차전성시대’가 예고되는 분위기 속에 시장에 나왔다. 1천323cc 엔진을 얹은 5도어 모델로 타코미터와 사이드 프로텍터를 없앤 1.3 영의 값은 435만 원으로 티코 최고급형 SX(412만 원)와 별 차이가 없었다. 97년 한 해 8천503대가 팔려 잠깐 인기를 끌었지만, 기아의 부도와 함께 아토스, 마티즈가 잇달아 등장하면서 98년에는 1천702대 판매에 그쳤다. 단종될 때까지 1만 대 이상 판매되었다.
“화려한 은퇴식도
생각했습니다”
-96년부터 프라이드 마케팅 담당한 정인천 씨
기아자동차 승용상품전략팀에서 비스토의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정인천(31) 씨. 그는 96년부터 99년 12월까지 프라이드의 마케팅을 맡은 ‘마지막 담당자’다. 96년이면 프라이드의 전성기가 한참 지나고 판매대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 무렵. 아쉽게 사라져 간 프라이드의 뒷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을 그를 서울 양재동 기아 사옥에서 만났다.
“프라이드는 따로 광고를 하지 않아도 팔리는 차였습니다. 당시 기아는 아벨라와 프라이드로 소형차 시장을 공략하고 있었지요. 프라이드의 판매량이 꾸준했기 때문에 아벨라 쪽에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프라이드를 좀더 적극적으로 밀었다면 더 많이 팔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정 씨의 말이다.
입사 후 처음 담당했던 차라 프라이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그는 프라이드의 일생을 “화려하게 태어나서 명예롭게 사라졌다”고 표현한다.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등장해 모든 이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은퇴했다는 것. 실제로 프라이드 단종 직전 기아 마케팅팀은 국산차 사상 최초로 은퇴식을 열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단일모델로 최장수 기록을 갖고있는 프라이드가 리오에게 왕관을 물려주는 이벤트를 열 계획이었는데,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정인천 씨는 지금까지 프라이드를 사랑해 준 고객들에게 <카비전>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단다. “제대로 만든 차를 선택해주는 고객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런 고객들이 있는 한 언젠가는 프라이드의 영광을 다시 찾는 모델이 꼭 나오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