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규의 시학<詩學>
- 애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를 중심으로 -
<<悳泉> 나병훈
1. 들어가면서
「절규」를 만난 순간 나도 모르게 공포의 소리를 지르고 만다. 「절규」는 절망적인 내면의 세계를 인식하고 강렬한 색채와 구도와 보이지 않는 언어로 현실의 불안과 절망을 호소하고 있다. 그의 보이지 않는 영혼의 노래이자 告白詩인 것이다. 오! 불쌍한 뭉크(Munch)!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신분열증과 불행하고 어둡고 기괴한 정신세계의 무의식적인 내면의 세계에서 절망적인 고독한 삶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가 없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폐결핵과 정신분열증의 치명적 유전자를 온 가족들이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고독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살아야만 했다. 30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그린 「절규」는 그러한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신분열 증세의 극치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뭉크(Munch)의 「절규」 감상을 시학적인 측면에서 감상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 줄기의 철학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프로이트(오스트리아, 1856∼1939) 정신분석에 기저한 무의식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적 인식과 이와 결을 달리하고 있는 라캉(프, 1901-1981)이 시도한 정신분석에서 언어학을 도입, 언어를 통한 무의식의 세계를 정립함으로써 문학(시학)과 철학의 교두보를 마련한 문학철학의 인식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화가 뭉크(Munch)의 정신분열적인 삶의 고통과 절망의 내면세계가 「절규」를 통해 적나라하게 自畵像으로서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 프로이트의 무의식 세계와 정신분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氷山에 비유한다. 수면 위로 보이는 ‘의식’은 수면 아래 존재하는 ‘무의식’에 비해 극히 작은 일부분으로 본다. 의식은 단지 무의식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他者의 시선에 비친 自我의 그림자 이미지일 뿐이다. 말하자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또 다른 자기, 즉 진정한 자신의 모습<自我>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가면의 얼굴인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보는 나는 본질적인 내가 아니라 그들 눈에 비친 나의 외면적 인식으로서의 이미지요 모습인 페르소나(Persona)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구조로 우리는 내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외부로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결국 본능적으로 이러한 페르소나(Persona)라는 외면적 인식의 탈을 쓰고 정신적 평정을 얻으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저변에는 의식의 질서를 파괴하는 욕구가 본능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무의식이 의식 표면에 분출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에너지가 과도하게 분출되어 정신적 평정(안나의 방어기제)이 무너지면 본성(무의식)과 갈등을 일으켜 정신적인 과부하로 인하여 우리는 절망과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라는 정신분열 증세에 빠져 들게 된다.
나. 라캉의 무의식과 문학철학적 自我인식
실존철학의 전도사요 언어를 통한 욕망 이론을 정립한 라캉(Lacan)이 프로이트 ‘무의식’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문학철학<詩學>’이라는 범위내로 한정 해 본다면 라캉이 프로이트와 결별한 것은 ‘무의식’에 대한 욕망의 대상에 대한 견해의 극명한 차이에 있었다고 본다. 즉. 프로이트의 문학적 욕망의 대상을 성적(性的) 해석에 둔 반면, 라캉은 언어를 통한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면서 대척점에 선다, 이러한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본다면 라캉의 주장대로 거울에 비친 시인들의 자신의 모습<自畵像>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요, 타자(他者)의 시선에 비친 시인의 그림자요 이미지 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단정하지 못하고 분열된 自我를 통해 인식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정신분열 해 가는 자신의 무의식을 회피하고자 발버둥 침으로써 소위 안나 프로이트의 자기방어기제로서의 극단의 소외된 自我의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전호에서 언급한 바처럼 뭉크가 견지해야 했을 정신적 평정으로서의 페르소나( Persona)를 태생적으로 극복이 불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 뭉크(Munch), 「절규」의 시학적 감상
그림은 언어 없는 詩이며, 詩는 그림 없는 언어다. M.그로써는 「화가의 눈」이라는 평문을 통해 “그림이 말하는 내용은 결코 하찮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화가가 살고 있는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가장 고매한 思想이라야 한다”라고 덧대어 구체화한다. 이를 위에서 기술한 2개의 큰 철학적 사류(思流)를 상호 접목하여 이해하면 비로소 저 비극적인 가족사로 평생을 정신분열증으로 사경을 헤매야 했던 비운의 화가 뭉크(Munch)가 「절규」라는 명화 속에 토해내고 싶었던 절규로 메아리치는 시의 言語를 듣게 될 것이다. 나아가 라캉이 주창했던 내면의 무의식 세계에서 분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분열된 自我로 인식되어지고 궁극에는 페르소나(Persona)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 우리들의 정신분열적인 자화상으로 투영되는 절망의 詩를 써 내려 갈 수 있는 것이다. 솔직한 인간 내면의 무의식으로 분출되는 본성의 감정을 목도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감상을 통해 우리는 뭉크(Munch)가 쏟아 낸 「절규」라는 그림詩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카타르시스마저 경험하기에 충분하다고 보며 「절규」의 기의(記意 /시그니피에)인 ‘절망’에 대한 시학적 접근이 가능하리라 본다.
가. 뭉크(Munch)의 「절규」에 대한 고백 추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뭉크의 「절규」!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무의식에서 분출해 낼 수 없었던 절망이 자연을 통해 외부로 투영 된 곧, 본질적인 自我였다. 범부에게는 카타르시스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뭉크에겐 심각한 우울증의 분신들이기에 여기서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열이요 공황장애였다.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는 붉은 태양이 지고 있는 블루 불랙의 피요르드가 흐르는 오슬로 해안도로를 친구와 같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육지와 바다와 하늘이 S커브 밴드로 구부러진 채 요동치며 선홍색 붉음과 어둠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석양에 물들어 가는 구름 하늘마저 핏빛으로 응고된 채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채색되어 갈뿐 침묵으로 몸을 휘감고 있어 긴장감마저 흐르고 있었고. 저 멀리 아스라져 가는 도회지의 불빛과 항구에 닿으려는 가녀린 어선들은 어둠에 생포되어 존재마저 흐릿해져 가고, 오로지 피처럼 불 타 흐르는 피의 구름바다만이 괴기스러운 환청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공포와 환청은 저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비명으로 인해 의식은 물론 무의식마저도 쫒기우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난청이 환청으로 겹치면서 지겨운 공황장애로 인하여 두 귀를 막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그의 모습일 뿐 타자(他者)의 시선에 비친 그의 그림자요 이미지가 결코 아니어서 혼란스러웠으리라. 아! 같이 거닐던 친구마저도 타나토스의 사자가 되어 검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저만큼 뒤를 바짝 따라 붙고 있었고. 도대체 서른 나이에 왜 인간의 존엄한 형태를 빼앗기고 있어야 했단 말인가? 공포에 질린 저 열린 입과 눈썹조차 지워져버린 눈은 이미 아케론 강나루에서 산자인지 죽은 자인지를 심판받고 있었으니.... 강 건너 검은 안개 숲속에서 어린 시절 피눈물 흘리며 강을 건너신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최근 기어코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이 강을 건너야만 했던 사랑하는 여동생이 손짓하고 있었고.....
나. 뭉크(Munch)를 위한 어느 詩人의 역설<paradox>
오늘을 사는 현대인은 120년전에 뭉크가 그려 낸 말없는 절규의 그림詩를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폐병과 정신불안의 광기로 저주받으며 절망적인 삶을 지탱해야만 했던 한 고독한 화가의 노래 「절규」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자화상(自畵像)을 그려낼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시학으로서의 역설(paradox)적 미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림詩나 詩그림을 감상하는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뭉크의 절규는 희망의 회로(回路)를 찾아나서는 대담한 ‘광기’다. 이러한 ‘광기’가 아니라면 저 절망적인 「절규」의 끝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81세로 생을 마감한 정신분열증 환자 뭉크를 소환할 수 없다.
그림 속의 행간을 더듬어 개인적인 사유로 삼아보는 이유는 그러한 ‘광기’를 발견하고자 함이다. 핏빛 붉은 하늘구름과 형형한 석양의 굴곡진 웨이브는 태생적으로 저주받은 정신적 육체적 나약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과 갈구를 씨줄 날줄로 엮어내며 채색을 입혀 항거한다. 그 채색의 행간 배면에는 그러한 불안감과 절망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키고자하는 뭉크의 당찬 노래가 언어화 되어 생기롭게 배열되어 있다.
블랙 블루의 피요르드가 꿈틀거리며 농울치는 핏빛 노을 구름과 환상적으로 조응하고 있다. 그 남성다운 굵은 블랙 블루는 강하게 꿈틀대며 저 붉음의 열정 속으로 파고들어 하늘에 끝자락에 열기를 이어주고 있다. 뭉크의 무의식 세계를 과감하게 분출해 냄으로써 페르소나(Persona)적인 정신의 평정을 북돋아주는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이제 동행했던 친구들이 타나토스가 보낸 죽음의 사자가 아니라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검붉은 절규는 어느새 선홍빛 열정과 견고한 푸름의 에너지로 전이되고 승화되어 오슬로 해변도로에 희망의 반향을 일으킨다.
이제야 절망적이던 뭉크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며 「절규」의 진실이 또한 차분하게 읽힌다. 그대는 이제 그토록 죽음과 불안과 공포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정신공항장애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 「절규」를 희망의 ‘광기’로 육지와 바다와 하늘에 불을 지르는데 성공 한 것이다. 또한 그대의 광기어린 「절규」를 통해 우리는 이 처절하리만큼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절규를 대리만족하는 카타르시스마저 경험하였으니 어찌 명작이 아닐 수가 있으리요.
3. 뭉크의 「절규」 미술관을 나오며
세상에서는 뭉크의 「절규」를 절망으로 보았지만 필자는 광기어린 ‘희망’으로 읽었다. 화가(畫家)의 자화상은 표면(表面)의 얼굴을 회화한다지만, 뭉크는 내면(內面)의 얼굴까지 형상화 하였으니 이제 ‘詩人 뭉크’라고 문학사에 한줄 새기어 호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을 詩로 읽어 낼 수 있는 묘미를 선사 해 준 선각자는 언급한 바처럼 무의식의 세계에 言語의 전도사를 자임한 라캉이다. 물론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으로의 무의식 개념이 기반을 이루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그림 속 구도와 색감과 붓 텃치(touch)를 ‘말 없는 言語의 詩’로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기에 화가 뭉크를 ‘詩人 뭉크’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이러한 선언이 가능한 것은 그는 절절한 체험에서 우러나는 무의식을 영혼의 노래로 육화(肉化)하여 캔버스에 오롯이 그려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절규」를 통해 내재되어 있는 분열과 소외를 경험하지만 이를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광기어린 희망의 절규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화가였기에 온가족의 죽음이라는 ‘태생적인 잔혹사’를 극복하고 팔순을 넘기는 생을 구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정신분열자가 아니라 페르소나(Persona)를 유지하고 있었던 정상인이었건 것이다. 이러한 추론을 상기할 때 실존적인 절망의 역설(paradox)이 가능하며 필자는 글을 맺으면서 지난 무서리 내리던 새벽의 고독한 무당거미를 소환하여 형상화 해 봄으로써 뭉크의 「절규」에서 읽어 낸 ‘절망에 맞서는 방법’을 그림 없는 言語로 음미 해 보기로 한다. 절망은 시로서도 극복이 가능함을 믿으며 < 悳泉>
절망 앞에서
悳泉
어디서 내려왔을까
어스럼 숲길 무당거미 한 마리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앙상 가지 한 치 앞 허공으로
밤새도록 제 몸 쥐틀어
무서리 씨줄을 옹송그레 움켜쥐고 있다
늦가을 까맣게 가늘어진
한자락 바람에도 그리운
부나비 깔따구 하루살이 보이지 않고
살천스런 바람만 스치운다
너의 이악스런 침묵 앞에
너의 새치름한 욕망 앞에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오르던 숲길을 내려오자
하, 분주히 움직이는 줄타기
통통한 흰나비
씨줄에 휘감긴 채
퍼드득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