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3월 평택공립보통학교平澤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후 친구의 감화를 받아 항일투쟁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 1935년 11월경 실천운동을 위한 준비로 평택독서회平澤讀書會를 결성하고 회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이두종은 이 같은 활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1938년 7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 1939년 3월 28일 경성보호관찰소京城保護觀察所 보호관찰자로 분류되는 등 일제감시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 1939년 7월 상순경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수원읍水原邑 매향정梅香町 64번지 김계근金桂根의 온돌방 1칸을 빌려 극단 ‘향인좌鄕人座’를 설립했다. 과거 배우 활동경험을 살려 단원을 모집해 동지를 구하고 나아가 극단 활동으로 일반대중에게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려는 의도였다. 동년 8월 중순경까지 안수창安壽昌 등 5명의 배우 및 단원을 모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금난에 빠져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계근의 집에서 이원학李元學에게 신사회 건설 필요성과 자금주의 알선을 부탁하다 일경에 발각돼 체포됐다. 이로 인해 이두종은 194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해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