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13.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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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불과 물, 우리는 서로를 불태우며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망해가는 나라니까. 악천후의 지표니까. 우리는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붙였고, 오줌을 쌌고, 자주 울었고, 나무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첫사랑
나는 견갑골이 날개 뼈가 되는 이야기에 중독되었지. 천사 병에 중독되었지. 나는 매일 그 이야기만 썼어. 이렇게 춥고 얼어서. 벽을 건너 다른 곳에서 걸을 때마다 부서지는 소리에 중독되었지. 날지도 못하면서 어깨는 왜 새와 비슷하게 생긴 것일까. 나는 단추를 풀며 숨을 죽인다. 옷은 영혼의 집. 뼈와 뼈가 웅성대는 집. 아무리 멀리가도 볼 수 있다. 옷처럼 날개를 입고 있으면. 이 금을 넘어가도 볼 수 있다. 침대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어깨만 만졌는데. 너무 무서워서 더듬기만 했는데. 너를 건너 다른 곳에서 걸었지. 너의 중력에 내가 부서지는 소리. 추운데도 옷을 벗고.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중독되었지. 날아가는 이야기에 빠져들까 봐 옷을 벗고. 이제 쓰는 것은 그만해. 너는 펜을 버린다. 이렇게 벗고 있으면 영혼을 버린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너의 중력에 내가 뭉개지는 소리. 발밑에서 뼈와 뼈가 녹아내리는 소리. 팔에 돋은 털이 너무 없어서 창피해. 긴 털을 가진 자를 떠올린다. 입김이 서리는 안경을 벗고. 이 얼굴을 넘어가도 볼 수 있다. 입술을 맞대고 깨물면 부정하게 물드는 것 같아. 영혼을 벗고 비릿한 냄새를 맡자. 원래 이 이야기의 끝은 냄새 아니니? 그래. 견갑골이 부정하게 흘러내리는 순간. 어떤 구멍에는 악취가 있다. 우리는 우리를 벗고 침대에서 꼭 껴안고 있다. 이제 날 수가 있어. 생각만 해도 아름답지? 너는 내 입김에 부서진다. 하수구에서 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
은, 멈추지 않는 소년
- 오은 시인에게
소년의 그림자가 너무 깊어 나를 덮을 때
이것을 나무라고 불러야 할지
무한으로 뻗어 나가는 알 수 없는 정서라고 불러야 할지
숲은 흔들립니다
내가 눈먼 사람이 되어 잠망경으로 그림자의 바닥을 들여다볼 때
소년이 나무껍질을 파내며 새처럼 목이 길어질 때
어디에서부터 불을 붙일까 무한을 더듬으며
숲이 넓어집니다
소년은 제 안의 계단이 너무 많아
그림자를 하나씩 흘리고 올라갔는데
이것은 구름의 일부분
자꾸만 숲의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고 맙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곤충처럼 그의 그림자에 무늬를 짤 때
여름이면 어지럽고 겨울이면 회오리로
자꾸만 슬픔으로 원을 그릴 때
영원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소년의 계단은 결벽처럼 희게 물들고
그것이 끝나지 않는 우리의 산책일 때
여름의 애도
비 오는 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어머니는 부서진 날개를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옆구리일까요. 그때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털 뭉치처럼 온몸이 가려웠었죠. 죽은 사람이 두고 간 것인데. 어머니는 중얼거리다 말고 빗물이 쏟아지는 마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발자국이 지워졌습니다. 어두운 자리 하나만 남아서 점점 깊어지고 있었죠. 모든 게 빗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인데. 너의 할머니는 이것을 두고 갔구나. 우산을 들고 어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을 듣지 못하고 나는 털 빠진 개처럼 옆구리를 긁고 있었죠. 개다 만 빨래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시간. 떠내려가지 못한 날개를 건져 올린 것은 어머니입니다. 찢기고 바스러진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다 완성할 수 있을까요. 물에 젖은 어머니의 발자국이 천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슬레이트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 이 다정한 악몽의 시간에 잠깐 쉬었다 갈게. 죽은 사람의 날개가 힘없이 부서집니다. 어머니의 등에서 흰 빛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컹컹 웃기 시작합니다. 목이 아프도록. 깃털이 흩어져 쓸려갑니다. 그 위로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
게스트 하우스
나는 해변에 서 있다. 이곳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나는 없거나 너무 많은 방을 가지고 있다. 때로 섬에 사는 염소들이 없는 방에 들렀다가 수많은 방으로 빠져나간다. 발굽들이 남기고 간 흔적, 포말처럼 부서지는 이 집요한 얼룩들을 쓰느라 나는 미궁에 빠진다. 이 해변에는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다. 아무도 오지 않지만 누구나 와서 머물다 간다. 잠깐 들어와 뿔을 내려놓고 잠이 든 염소들. 그들의 젖은 꿈을 쓰느라 나는 선 채로 긴 잠에 빠진다. 발을 버리고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수면으로 들어간다. 끝이 없는 바닥이 있다면 바다에 있겠지.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내가 머물지 못한 방들. 모든 문이 열려 있다. 나는 하루 종일 해변에 서 있다. 없는 발이 푹푹 빠지는 기묘한 현상을 느끼며 딱딱한 머리통을 쓰다듬다가……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젖은 문장을 말리고 있다.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
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 속에서 이빨을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 지은이 / 이영주
- 펴낸 곳 / 문학과지성사
- 펴낸 때 / 2019년 9월
이 영 주
- 1974년 서울 출생.
-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
- 2000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 시집으로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차가운 사탕들』,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