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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느림보 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빈산
어제는 비가 내렸다. 평지에는 비가 내렸지만 고산지대에는 눈이 내렸을 것이다. 속세를 떠나는 산, 속리산의 환상적인 설경을 보기 위해 보은군 내속리면으로 향한다. 속리산은 사시사철 멋진 경치를 아낌없이 보여주지만, 설경도 매우 아름다운 산이다.
수많은 역사와 전설이 묻혀 있는 산, 속리산..... 속리산의 산봉우리들과 골짜기에는 제왕과 영웅호걸, 문인과 무인, 그리고 기인들의 숨결이 구비구비 서려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속리산에 들어온 이래 형제들을 죽이고 왕권을 잡은 조선조 태종과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세조도 이 산에 들어와 그들의 죄업을 씻었으며, 송시열은 화양천의 화양구곡(華陽九曲)에 은거했고, 이황은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에서 선경에 도취되어 노닐었다. 조선의 명장이라 일컫는 임경업 장군도 속리산에 들어와 수도를 하면서 뜻을 세웠으며, 당대의 석학이자 낭만적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임백호의 발자취도 찍혀 있다. 나도 오늘 속리산으로 들어가 속세를 떠나 선경에 취해 보련다.
속리산(俗離山, 1057.7m)은 충청북도의 보은군, 괴산군과 경상북도의 상주시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한국팔경(八景) 중의 하나이다. 속리산이라는 이름 말고도 광명산(光明山), 지명산(智明山), 미지산(彌智山), 구봉산(九峯山), 형제산(兄弟山), 소금강산(小金剛山), 자하산(紫霞山) 등 여러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속리산은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이라고 하며, 신라시대부터 속리산이라 했다고 한다. 또 '문헌비고'에는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바위봉우리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玉芙蓉)같이 보이므로 소금강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나와 있다. 예로부터 속리산은 아름다운 경치와 뛰어난 산세로 이름난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나온 백두대간의 마룻금 가운데 자리잡은 속리산은 화강암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암봉들이 줄을 지어 솟아 있고 계곡 또한 깊어서 웅장하고 장엄한 산세를 간직하고 있다. 속리산은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를 만난, 달구지를 끌던 소가 율사에게 절을 올리자, 달구지를 타고 있던 사람이 율사의 불심에 감동하여 속세를 떠나 입산한 곳이라는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즉 세속 속(俗) 자와 떠날 리(離) 자를 써서 속리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속리산 가는 길의 정이품송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가에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이 기품 있게 서 있다. 기상이 있고 품위가 있는 저런 나무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경건한 마음이 된다. 시원찮은 나보다 훨씬 나은 소나무다. 정이품송 앞에서 무언으로 전해지는 한소식을 듣는다. 이 소나무는 약 600여년이나 나이를 먹은 소나무로, 세조가 정이품이란 벼슬을 내려 주었다. 세조(1464년)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그가 탄 연(가마)이 이 소나무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나무의 가지가 늘어져 있어 연이 지나갈 수 없었다. 그때 '연 걸린다.' 하고 소리치자 소나무 가지가 번쩍 들어올려져서 연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이에 세조가 이 소나무에게 정이품이라는 높은 벼슬을 하사했다는 전설..... 그런 사연으로 정이품송을 '연걸이 나무'라고도 부른다. 정이품송 뒤로 법주사를 품에 안고 있는 수정봉이 보인다. 저 멀리 문수봉에서 신선대를 지나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속리산맥에 눈이 하얗게 뒤덮혀 있다. *속리산관광호텔에서 바라본 속리산맥
법주사 입구 소형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주차료는 4천원. 좀 비싸다는 느낌이다. 화왕산에 갔을 때는 주차료가 천원이었는데..... 속리산관광호텔 앞에서 다시 한번 속리산을 바라보고..... 634봉 너머로 문장대와 문수봉, 청법대, 신선대 등 속리산의 연봉들이 솟아 있다. *법주사 일주문
사내교를 건너 오리(五里)숲길로 들어선다. 사내교에서 속리산 법주사에 이르는 길 좌우로 수령 백년 이상의 참나무와 소나무, 떡갈나무, 단풍나무 등이 우거진 울창한 숲을 지나게 되는데, 그 거리가 5리(2km)에 달한다. 오리숲길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어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오리숲길을 걸어가다 만난 법주사 일주문.....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이라 씌어져 있는 현판이 고색창연하다. 일직선상의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첫번째 문으로 오로지 일심(一心)을 가지라는 상징이렷다. 속리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속세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리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주문을 넘어간다.
속리산 아홉 연봉들을 배경으로 수정봉 산자락 천하의 명당자리에 자리잡은 법주사를 지난다. 불법이 머무는 곳이라는 법주사..... 멀리서도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청동미륵대불이 눈에 확 띈다. 높이가 33m에 달하는 청동미륵대불에는 청동이 무려 116톤, 금이 80kg이나 들어갔다고 한다. 저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려한 불상을 보고 과연 부처님은 기뻐하실까? 으리으리한 로마교황청에는 여호와가 거하실까? 바벨탑처럼 인간들의 욕망이 쌓이고 쌓여서 저런 초대형 불상으로 나타난 것일지니..... 모든 것이 헛되고 또 헛되도다.
법주사(法住寺)는 한 때 길상사(吉祥寺)라 부르기도 했다.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제자 영심(永深) 등을 시켜 속리산의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길상사를 짓고 교법을 펴게 했던 것..... 법주사는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서역에서 돌아올 때 나귀에 경전을 싣고 와서 이 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이 절은 553년(신라 진흥왕 14년) 의신조사가 창건한 뒤 오랜 세월이 지나 임진왜란으로 붙타 없어진 것을 조선 인조조에 중건한 사찰로 상당히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국보급만 하더라도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과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 석련지(石蓮池, 국보 제64호) 등이 있고,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15호)을 비롯해서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보물 제216호), 철확(鐵鑊, 보물 제1413호),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보물 제1417호),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361호), 소조삼불좌상(塑造三佛坐像, 일명 삼존불, 보물 제1360호), 괘불탱(掛佛幀, 보물 제1259호),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보물 제848호) 등의 보물이 있다. 특히 팔상전은 한국의 탑 가운데 가장 높은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문화재이다.
법주사의 산내말사에는 성불사(成佛寺), 미타사((彌陀寺), 봉곡사(鳳谷寺) 등이 있고, 산내암자로는 수정암(水晶庵)을 비롯하여 여적암(汝寂庵), 복천암(福泉庵), 탈골암(脫骨庵), 중사자암(中獅子庵), 관음암(觀音庵), 상고암(上庫庵), 동암(東庵), 상환암(上歡庵) 등이 있다. *목욕소
법주사 입구를 지나면 저수지가 나타난다. 저수지 상류에 놓인 태평교를 건너서 올라가면 왼쪽으로 비구니 도량인 탈골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신라 성덕왕 19년에 창건된 탈골암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암자인데, 경내에는 유명한 약수가 있다. 신라 탈해왕 때 경주김씨 시조인 김알지는 자신의 흉한 얼굴을 한탄하다가 이곳에서 나오는 약수를 마시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달려왔다. 김알지가 약수를 한모금 마시자 정말 듣던대로 환골탈태하여 준수한 용모로 변했다는 전설에서 탈골암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또 일설에는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제자들에게 수도를 하게 한 결과 모두 번뇌를 해탈하여 조사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탈골암이라 했다고도 한다. 불교에서 탈골이란 수도자가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는 구하는 마음을 쉬며, 나아가 일체번뇌의 뼈를 벗어버리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탈골암 갈림길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목욕소가 있다. 목욕소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영월로 귀양보낸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어느 날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가 나타나 그를 노려보더니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잡아가겠다.'고 말한 뒤 곧 맏아들인 도원대군이 죽었다. 또 어느날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세조를 노려보다가 침을 뱉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그 이튿날부터 침자국이 곪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온몸에 종기와 악창이 생겨 고통이 극도에 이르렀다. 세조는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전국의 용하다는 명의를 다 데려다가 온갖 명약을 써보았으나 낫지를 않았다. 마지막에는 부처의 가호로 고질병을 낫게 하기 위해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가 속리산 법주사에 이르게 되었다. 세조가 어느 날 이곳에서 목욕을 하는데, 보살의 화신인 미소년이 나타나 '곧 병이 완치될 것입니다.'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세조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과연 종기와 악창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리하여 세조는 목욕소가 있는 이 고을의 이름을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보은이라 지었다고 한다.
세심정(洗心亭)휴게소까지는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다. 세심정휴게소에는 문장대(3.2km)와 신선대(2.7km), 천황봉(3.1km)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다. 오늘은 세심정에서 용바위골을 타고 문장대에 오른 다음 백두대간 속리산맥을 따라 문수봉, 청법대, 신선대, 입석대, 비로봉을 넘어서 천황봉까지 종주한 뒤 배석대, 은폭동계곡을 거쳐 다시 세심정으로 내려오는 원점회귀 산행을 하려고 한다. 세심정에서 마음을 씻고 용바위골을 따라서 오르다가 '이뭣고다리'를 건너니 복천암이다. 속세를 떠나는 산에서 '이뭣고?' 화두를 건너니 복이 시냇물처럼 흐르는 도량이 기다리고 있구나. 나는 언제나 '이뭣고?'에서 헤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두 발은 속세의 진흙구덩이에 푹 빠진 채 눈길만 먼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멀고도 먼 길이다.
복천암은 720년(성덕왕 19년)에 창건된 암자로 본당인 극락전의 현판 ‘無量壽(무량수)’라는 글씨는 고려 공민왕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는 이 암자에서 신미(信眉)와 학조(學祖)라는 두 고승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계곡 아래에 있는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고질병을 고친 뒤 세조는 이 암자를 중수하고, 만년보력(萬年寶曆)이라고 쓴 사각옥판(四角玉板)을 하사하였다. 경내의 문화재로는 신미의 수암화상탑(秀庵和尙塔, 충북유형문화재 제12호)과 학조등곡화상탑(學祖燈谷和尙塔, 충북유형문화재 제13호)이 있다. *보현재휴게소
아름드리 소나무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용바위골을 따라서 보현재에 올라서면 함석으로 지붕을 덮은 휴게소가 기다린다. 휴게소 마당에 박혀 있는 점판암 돌기둥에는 '경상도집'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굴뚝을 보니 어린 시절 나무를 때던 시골의 고향마을이 생각난다. *냉천골휴게소
보현재를 넘으면 냉천골로 이어진다. 냉천골로 들어서자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보현재를 지나면서 충북알프스의 봉우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중사자암 갈림길을 지난다. 왼쪽길로 오르면 중사자암이다. 중사자암은 720년(성덕왕 19년)에 창건된 암자로 바위모양이 사자를 닮았다고 해서 사자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장대 아래에는 원래 상사자, 중사자, 하사자 등 세 암자가 있었는데, 상사자암과 하사자암은 약 90여 년 전에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세조는 이 암자에서 복국(福國)의 이물(利物)을 기원했다고 하며, 6·25전쟁 때 소실되어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1957년 10월에 중건하였다. 법당 안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후불탱화(後佛幀畵)가 봉안되어 있다. 중사자암은 문수보살이 항상 머물고 있다는 문수도량(文殊道場)으로도 유명하다.
산을 오를수록 눈이 점점 더 많이 쌓여 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반들반들 빙판으로 변해 있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냉천골휴게소에 도착해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초가지붕의 냉천골휴게소에서는 잔치국수와 컵라면, 막걸리 등을 팔고 있다. 여기서 문장대까지는 7백 미터의 거리다. *냉천골 계곡길 *냉천골 숲터널에 피어난 상고대
냉천골휴게소를 지나면서 환상적인 설경이 펼쳐진다. 마치 동화속에 나오는 눈의 나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상고대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눈을 보면 언제나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의 노벨문학상 수상작품 '설국(雪國)'이 떠오르곤 한다. 설국은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홋카이도(北海道)의 에치고유자와(越後湯澤)온천장을 배경으로 도쿄(東京) 사람 시마무라(島村)를 사이에 두고 게이샤(藝者)인 고마코(駒子)와 미소녀 요코(葉子)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된 미묘한 심리가 복잡하게 전개되는 소설이다. 그의 시적인 산문이 보여주는 서정과 낭만은 가슴을 아련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만 되면 홋카이도로 떠나는 여행을 꿈꾼다. *문장대휴게소
문장대휴게소에 올라서자마자 펼쳐지는 눈의 바다..... 이 얼마만에 보는 황홀한 설경인가! 휴게소 앞마당에는 산행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여기서 동쪽 계곡길을 따라 성불사를 거쳐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로 내려갈 수 있다. *문장대
문장대로 오르는 길은 사람들이 하도 많이 다녀서 반들반들하다. 한겨울인데도 문장대로 오르는 철계단과 난간을 보수하는 공사를 하고 있다. 문장대 정상표지석 앞은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추억을 간직하고픈 것은 누구나의 소망이 아닐까? 가파른 철계단에도 눈이 다져져서 미끄럽기 짝이 없다.
문장대 정상에 올라서자 만학천봉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아...... 장엄화려한 백두대간 속리산맥..... 이곳에서는 속리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속리산을 미인에 비유하자면 문장대는 바로 얼굴에 해당하는 봉우리다. 문장대(文藏臺, 글에 묻혀 있는 대)는 거대한 암봉이 하늘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처음에는 운장대(雲藏臺, 구름에 묻혀 있는 대)라고 불렀다. 바위봉우리 정상은 평평하여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으며, 북쪽 절벽 사이에 있는 감로천(甘露泉)이 유명하다.
전설에는..... 세조가 속리산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에 나타난 월광태자(月光太子)로부터 이곳에 올라 기도를 올리면 병이 나으리라는 계시를 받고 신하들과 함께 구름속에 숨은 바위봉우리에 오르자 넓은 반석 위에 삼강오륜을 밝힌 책이 한권 놓여 있었다. 이에 크게 감동한 세조는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글을 읽으며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그후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을 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로 고질병을 치료하면서 문무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글을 읽고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충북알프스
북서쪽 활목고개로부터 시작되는 충북알프스의 산맥이 미남봉과 매봉을 지나 상학봉, 묘봉, 관음봉을 거쳐 문장대를 향해 거센 기세로 꿈틀대며 치달아 온다. 바로 앞에 하얀 눈이 덮혀 있는 봉우리가 관음봉이다. 속리산과 구병산을 잇는 43.9km에 이르는 충북알프스는 보은군 내속리면과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지점인 활목고개로부터 시작해서 동남방으로 상학봉과 묘봉, 관음봉을 지나 문장대에서 백두대간과 만난다. 문장대에서 백두대간과 만난 충북알프스는 문수봉, 청법대, 신선대, 입석대, 비로봉,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속리산맥을 따라서 형제봉과 갈령삼거리를 거쳐 못재에 이르러 백두대간과 갈라진다. 못재에서 잠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튼 충북알프스는 690봉과 동관음, 장재를 지나 620봉에서 다시 서쪽으로 구병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구병산에서 서원리로 뻗어간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속리산맥
문장대에서 동남쪽으로 백두대간 속리산맥이 문수봉, 청법대, 신선대, 입석대, 비로봉을 지나 천황봉을 향해서 웅장한 기세로 뻗어간다. 설국으로 변한 속리산의 산마루와 골짜기들이 그야말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919봉과 청화산
북동쪽으로 보이는 백두대간 청화산 산마루에도 눈이 하얗게 뒤덮여 있다. 천황봉에서 문장대를 향해 북쪽으로 달려온 백두대간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919봉을 지나 밤티재로 내려선 다음 경미산을 넘어서 늘재를 건너 청화산으로 이어진다. 문장대에서 밤티재로 내려서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내가 60일간에 걸쳐 백두대간을 순례할 때 문장대에서 밤티재로 내려가다가 바로 저 919봉에 이르는 암릉의 수직암벽에서 애를 먹은 적이 있다.
문장대를 내려오다가 우연히 후배 한의사를 만났다. 청주에서 개원한의사를 하는 그는 요즘 산에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서 산다고 한다. 문장대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휴게소 안에는 나무난로에 불이 활활 타고 있다. 시레기국을 한그릇 사서 밥을 말아서 먹는데, 어찌나 짜던지..... 결국 몇 술 뜨고는 남겨 버렸다. *문수봉에서 바라본 문장대
*문수봉 *문수봉에서 바라본 신선대와 비로봉, 천황봉
문장대휴게소를 떠나 문수봉으로 향한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눈길을 걸으니 마치 발밑에 스폰지를 깔아놓은 듯 폭신한 느낌이 전해온다. 설화가 만발한 숲터널을 걷노라니 마치 순백의 향연에 참여하기라도 한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문수봉에 올라 떠나온 문장대를 되돌아 본다.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인가! 찬란하게 피어난 설화속에 우뚝 솟아 오른 문수봉..... 저 봉우리에는 반야지혜의 화신인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거하심인가. 앞으로 가야 할 신선대와 비로봉, 천황봉이 한발 성큼 다가와 있다. *신선대휴게소에서 바라본 문수봉과 청법대
문수봉에서 청법대를 지나 신선대휴게소에 오른다. 문수봉의 남쪽 능선에는 청법대의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솟아 있다. 청법대는 신선대휴게소 앞에 있는 바위봉우리에 올라서 바라보아야 웅장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청법대는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의 절경에 넋을 잃고 헤매던 중 저 봉우리에서 들려오는 독경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는 전설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또 이들 바위의 형상이 흡사 부처가 앉아 있는 듯하다 해서 청법대라 불렀다고도 한다. *신선대휴게소
신선대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휴게소 지붕에도 눈이 하얗게 뒤덮여 있고...... 휴게소 마당에는 등산객 두어 사람이 다리쉼을 하고 있다. 바람은 잠잠하고 하늘에는 하얀색의 얇은 층운이 한가하게 떠 있다.
신선들이 백학을 데리고 놀았다는 신선대..... 신선대에는 속리산의 절경에 혼을 빼앗긴 어느 고승이 청법대에서 들려오는 독경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남쪽 능선을 바라보자 저 산봉우리에 백학떼가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었으나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선대 뒤로 물끄러미 앉아 있는 천황봉.....
신선대휴게소를 떠나 신선대를 넘는다. 순백색의 설화가 화려하게 피어난 나무들 사이로 신선대 암봉이 우뚝 솟아 있다.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바위봉우리에는 백학떼와 신선은 보이지 않고..... 전설만이 남아 있다.
道不遠人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山非離俗俗離山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신선대에서 바라본 입석대
신선대를 돌아드니 입석대가 바로 앞에 다가와 있다. 비로봉을 배경으로 하늘을 찌르듯이 반듯하게 서 있는 입석대..... 입석대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떠 있다. *입석대에서 바라본 신선대
신선대를 떠나 동화속의 나라로 인도하는 상고대 숲터널길을 걸어 입석대로 향한다. 눈꽃나라의 주인공이 되어 끝없이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 신선대를 내려오면 입석대와 경업대 삼거리가 나타난다. 여기서 금강골을 따라 관음암과 경업대를 지나 세심정으로 내려갈 수 있다.
속리산 특히 이곳 금강골에는 조선의 명장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에 대한 설화가 무수히 서려 있다. 경업대는 임장군이 독보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7년 동안 무예를 익히고 수련을 했다는 곳이다. 경업대 부근에는 임장군이 세웠다는 입석대와 그가 물을 마셨다는 관음암의 장군수, 수도기간을 채우지 않고 떠나는 임장군을 괘씸하게 여긴 독보대사가 도술로 반쪽으로 갈랐다는 바위, 장군이 수도했던 경업대 토굴, 높이가 15m나 되는 뜀바위 등이 곳곳에 있다.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간 임경업 장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친명반청(親明反淸)이라는 대의명분에 사로잡혀 병자호란 당시 명나라와 합세해 청나라를 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사나이......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으나, 김자점의 모함으로 곤장을 맞고 삶을 마감한 비운의 사나이......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는 같은 핏줄이었음에도 조선의 양반들은 왜 그토록 친명사대주의자들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만주족과 같은 오랑캐, 쌍놈이라는 컴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들은 결국 시대를 달리 해서 친일파가 되고 지금은 친미사대주의자로 그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해방이후 친일파의 시대는 가고 미군정을 거치면서 친일파에서 재빨리 친미파로 변신한 부류들이 득세하고 있다. 친일파가 매국노였다면 친미파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인간들이란.....
삼거리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서면 입석대다. 입석대에 올라 지나온 산길을 되돌아보니 신선대 암봉이 웅장하게 솟아 있다. 산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입석대
입석대는 금강골 정상부 능선에 우뚝 솟아 있다. 임경업 장군이 칠년 동안의 수도를 마치면서 내공을 시험하기 위해 누워 있던 바위를 번쩍 들어올려 일으켜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입석대..... 전설이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時呼時來不再來 때여! 같은 때는 다시는 오지 않나니
장부로서의 호연지기와 기개를 노래한 임경업 장군의 한시..... 그가 썼던 추련도(秋蓮刀)의 배 양면에 새겨져 있는 한시다. 이 칼은 충주에 있는 충렬사 유물전시관에 소장돼 있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입석대
입석대를 떠나 비로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오른다. 비로봉을 오르다가 되돌아본 입석대..... 산기슭에 설화가 장관이다. 입석대 바위봉우리들이 금방이라도 골짜기 아래로 우르르 굴러떨어질 듯 위태로와 보인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신선대
천황봉에 이르기 전 마지막 봉우리인 비로봉에 올라선다. 지나온 봉우리들을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이별이 아쉬워서일까? 문장대는 저만치 물서 있고..... 신선대의 또 다른 비경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골을 향해 숨찬 기세로 뻗어내린 신선대의 암릉들...... 속리산을 왜 소금강산이라 했는가를 비로소 깨닫는다. *비로봉 정상부 능선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비로봉의 바위봉우리들..... 비로자나불이 머무르는 곳이어서 비로봉이라 했을까? 금강산, 묘향산, 오대산, 소백산에도 비로봉이 있다. 이들 산에서는 비로봉이 최고봉이지만, 속리산에서는 천황봉과 문장대에 이어 세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비로(毘盧)'는 불교에서 '높다'는 뜻이다. '비로자나(毘盧遮那)'는 온세상을 두루 비치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말한다. 비로봉은 그 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붙이는 이름으로 전용되어 고유명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설에는..... 진표율사가 법주사에 온 이튿날 새벽 방안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밝은 빛이 방안에 가득히 비치는 것이었다. 이에 깜짝 놀란 율사가 방문을 열자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오색 무지개를 띤 밝은 빛이 눈부시게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율사는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오색 무지개를 따라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이 바위봉우리에 앉아 있다가 구름을 타고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율사는 비로자나불이 현신했던 바위봉우리를 이 부처의 이름을 붙여서 비로봉이라고 했다는 이야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모든 부처의 진신(眞身,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인 법신불(法身佛)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법신이란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색신(色身)이나 생신(生身)이 아니며, 우주 삼라만상이 이것을 근거로 나오게 되는 원천적인 몸이다.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할 때는 천엽연화(千葉蓮華)의 단상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가볍게 들고 있는데, 불상의 화대(華臺) 주위에 피어 있는 천 개의 꽃잎 하나하나는 바로 백억의 국토를 상징한다. 이것은 곧 이 부처가 있는 세계의 공덕과 광대장엄함이 무량한 세상, 즉 우주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연화장세계의 교주는 곧 삼천대천세계의 교주이며,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부처가 되는 것이니, 비로자나불은 허공과 같이 끝없이 크고 넓어 어느 곳에서나 두루 가득 차 있음으로 우주 그 자체나 조물주와 같은 존재이다. 크리스트교의 여호와나 이슬람교의 알라처럼......
*비로봉의 암봉과 설경 *비로봉에서 바라본 천황봉
비로봉을 내려가는 길..... 비로봉 산기슭에도 장관을 이룬 설화...... 이런 경치를 일생에 몇 번 볼 것인가! 비로봉 능선의 암릉에 커다란 바위가 파수꾼처럼 앉아 있다. 천황봉은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천황석문
비로봉을 다 내려가면 천황봉과 상고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계곡을 타면 상고암을 지나 봉황대를 거쳐 세심정으로 내려갈 수 있다. 상고암을 가리키는 표지판에 눈이 쌓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상고암은 법주사를 창건할 때 목재를 가공하고 저장하던 장소에 세운 암자이다. 중고암과 하고암도 있었다 하나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천황석문에 이르는 길가에 우거진 산죽들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거대한 바위가 만든 석문..... *법주사와 천황봉 삼거리에서 바라본 비로봉 *천황봉과 배석대 삼거리
천황석문을 통과해서 비탈길을 오르면 천황봉과 배석대 삼거리가 나온다. 지나온 비로봉이 금세 그리워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리움도 병이런가? 무슨 미련이 이렇게도 많으니 아무래도 나는 이승에서 도를 닦기는 다 틀린 것 같다. *천황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비로봉
*천황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비로봉 동쪽 능선과 백두대간 청화산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 우거진 숲이 터널을 이룬 가운데 설화가 만발하여 환상적인 느낌이 든다. 천황봉에 가까와질수록 산기슭을 온통 하얗게 수놓은 설화..... 천황봉 헬기장에 올라선다. 헬기장은 천황봉과 장각폭포 삼거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남동쪽 방향의 장각계곡을 타고 장각폭포로 해서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로 내려갈 수 있다.
또 다시 되돌아보는 비로봉..... 비로봉의 여기저기 앉아 있는 바위봉우리들은 여러 다른 모습으로 현신한 비로자나불인가! 비로봉의 동쪽 능선 너머로 백두대간 청화산이 솟아 있다. 청화산 뒤로 백두대간을 따라서 조항산과 대야산, 희양산, 백화산까지 보인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천황봉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육산인 천황봉 산기슭에도 설화 천지다. 설화의 바다..... 저토록 아름다운 설화의 장관을 표현하기에는 나의 문장력이 너무나도 짧다. 이제 저 능선만 오르면 천황봉이다. *천황봉 정상 한달음에 천황봉 정상에 올라선다. 정상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다. 천황봉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온세상이 발밑에 있다.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대자연의 장관에 넋을 잃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옛날 천황봉에는 대자재천왕을 모시는 사당인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가 있었다. 대자재천왕(Mahe○vara)은 본래 인도 바라문교의 창조신인 시바신(Siva神)의 다른 이름이고, 불교에서는 욕계마왕(慾界魔王)이라고 한다. 이 천왕신은 해마다 음력 10월 인일(人日)이면 법주사로 내려가서 45일 동안 머물다가 다시 올라오는데, 그동안 이 산 아래 사람들은 신령을 맞아 풍악을 울리면서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낼 때는 나무방망이를 깎아서 만든 남근(男根)에 붉은 칠을 하여 한바탕 놀이판을 벌임으로써 이 마왕을 즐겁게 해주었다. 남근(男根)은 마왕의 상징물로 부처가 깨달음을 얻으려 할 때 이 마왕이 방해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법주사는 그를 달래기 위해 대자재천왕을 이곳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초 음사(淫祠)라 하여 폐지되고, 산이름도 천왕봉에서 천황봉으로 바뀌었다. *천황봉에서 바라본 활목고개에서 관음봉에 이르는 충북알프스 *천황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속리산맥
북서쪽으로는 활목고개에서 시작되는 충북알프스가 상학봉, 묘봉, 관음봉을 지나 문장대를 향해서 거친 기세로 달려오고..... 문장대에서 문수봉, 청법대, 신선대, 비로봉을 거쳐 천황봉으로 뻗어오는 백두대간이 장엄하다. 아, 장엄하게 뻗어가는 백두대간..... 내 마음속에서도 백두대간이 일어나 꿈틀대며 용트림친다. 순간 벅차오르는 가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고, 이보다 더 장엄할 수 없는 속리산의 설경이 곧 연화장세계가 아니고 무엇이랴! *천황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형제봉
천황봉에서 남동쪽으로 형제봉(829m)을 향해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마룻금이 또렷이 보인다. 천황봉에서 703봉, 725봉, 667봉, 피앗재, 803봉을 지나 형제봉으로 치달려가는 백두대간..... 산마루에 흰눈을 덮어쓴 형제봉 뒤로 백두대간 봉황산(740.8m)이 솟아 있고..... 봉황산 너머 아스라이 보이는 봉우리는 백두대간 백학산(615m)이다. 형제봉 왼쪽에는 두리봉(일명 두루봉, 873m))이 앉아 있고..... 상주시 화북면과 화남면을 잇는 갈령이 두 봉우리 사이로 넘어간다. 두리봉 왼쪽 봉우리는 798봉이다. 백두대간 오른쪽으로 보이는 깊은 골짜기가 만수동계곡이다. 하얗게 얼어붙은 저수지 아래 자리잡은 마을이 만수동이다. 몇 년 전 내가 백두대간을 순례할 때 저 형제봉을 넘어 피앗재까지 온 다음 만수동으로 내려가 하룻밤을 묵어간 적이 있다.
천황봉의 남쪽에는 구병산이 솟아 있다. 형제봉을 지나 못재에서 백두대간과 이별한 충북알프스 구병산맥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원리까지 뻗어간다.
*천황봉에서 바라본 법주사골
천황봉에서 법주사골을 내려다 보니...... 천황봉에서 서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은 바로 앞에 보이는 920봉을 지나 저수지 왼쪽에 솟아오른 남산(639m)으로 이어지고.....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봉우리가 634봉이다. 이 두 봉우리와 삼각형을 이루는 꼭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수정봉이 솟아 있고, 법주사는 바로 이 세 봉우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은폭동(隱瀑洞)은 920봉과 그 오른쪽 능선 사이의 계곡에서 발원한다. 이 계곡에는 학소대와 은폭동폭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해는 이제 서산으로 기울고..... 서녘하늘에 점차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천황봉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웅장하고 장엄한 속리산맥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천황봉과 이별한다.
설화 숲터널길을 걸어서 하신길에 오른다. 비로봉과 배석대 삼거리로 도로 내려와 세심정으로 향한다. 상고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배석대에 이르렀을 때..... 서녘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찬란한 일몰이 시작된다. 황혼에 물든 저녁노을의 장렬한 아름다움..... 왠지 모르게 가슴 한켠을 파고드는 서글픔과 쓸쓸함..... 그리고 그리움.....
천황봉에서 내려오다가 상고암과 은폭동 삼거리 길가에 있는 배석대(拜石臺)는 마치 사람이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배석대에는 덕만공주의 전설이..... 신라시대 진평왕비 마야부인(摩耶夫人)은 덕만(德曼, 善德女王)공주와 법승(法昇)왕자를 데리고 속리산으로 들어와 나라의 융성과 왕실의 평온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덕만과 법승 남매는 날마다 아침에 지금의 배석대를 찾아서 진평왕이 있는 경주쪽을 향하여 절을 올리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덕만공주가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고개를 넙죽 숙이더니 다시는 들지 않더란다. 그후 이 바위를 배석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캄캄한 밤에 깊은 산속을 걸어가노라니 내가 마치 선승이라도 된 것만 같다.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은폭동폭포의 물떨어지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온다. 맑아서 서늘한 물소리..... 은폭동을 찾은 우암 송시열이 읊은 시를 떠올리며 밤길을 걷는다.
물은 양양하게 흘러야 하거늘 어찌하여 돌 속에서 울기만 하는가 속인들이 때묻은 발 씻을까 두려워 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네
주자학을 정치에 잘못 적용한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었던 송시열..... 그가 그토록 강조한 주자의 예학은 실은 임진왜란 이후 거세게 일어난 백성들의 봉건적 신분제 철폐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썩을 대로 썩어빠진 이씨조선왕조를 지탱하고자 했던 수구보수적 이론가였을 뿐이다. 그가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만년여당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개혁적인 인물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처형시켰던 송시열..... 그런 송시열도 속리산 은폭동에 들어와 저런 시를 남겼으니..... 속인들의 발에 묻은 때보다 자신의 손에 묻은 피가 훨씬 더러웠을 텐데..... 역사의 아이러니다.
세심정으로 내려오니 휴게소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다. 여기서 매표소까지는 아직도 3.4km를 더 가야 한다. 마침 세심정휴게소 주인부부가 보은읍내로 시장을 보러간다기에 차를 얻어탄다. 세심정휴게소 주인부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사내리 소형주차장에서 내린다. 다음에 속리산에 들어오면 꼭 들르겠다는 언약을 남기고...... 어둠속에 잠긴 속리산을 뒤로 하고 귀로에 오르다.
2006년 12월 10일 |
첫댓글 참으로 멋있는 우리의 명산입니다 접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