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논공불평
이번 반정에 대북(大北) 영수 이이첨과 소북(小北) 영수 박원종 유희분이 다 죄로 주육을 당하고 북인(北人)들이 전부 실패한 후 반정에 성공한 자는 다 서인(西人)이다.
오랫동안 정계에 굴욕을 당하던 서인들은 별안간 세력을 얻어 국권을 잡음에 조야가 다 머리를 들고 바라기는 저들의 손으로 나라가 바로 잡히고 지치의 세상의 되기를 희망하였다. 반정 후 청사(淸社) 공을 의논할 새 김유 등 53인에게 철권(鐵券)을 주어 맹서하다.
처음 반정 시에 김유 이귀 등이 이괄(李适)의 재주 있음을 알고 자기들의 비밀을 다 이괄에게 고하였더니 괄이 강개한 마음으로 허락하고 반정 날에 여러 가지 계획을 다 이괄이 주장하였다. 이때 공은을 의논할 제 이괄이 마땅히 제일에 거할 것이 도리어 제이에 떨어졌다. 도갑대장 이수일(李守一)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벼슬이 공조판서에 올랐고 이괄은 도리어 그 밑에 한성판윤이 되어 이괄이 내심으로 불평이 있었다.
이해 5월에 관서에 근심이 있다 하여 장안으로 도원수를 삼고 이괄은 부원수를 삼았다. 원수부는 평양에 두고 부원수부는 영변에 두어 장만 하에 있어 그 절제를 받게 되었으니 이것도 이괄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켰다. 이괄은 고 참판 이육(李陸)의 후손이다. 이육은 성종 때 사람으로 호를 청파거사(靑坡居士)라 칭하고 벼슬을 대사헌과 호조참판 변조참판에 이르렀고 청파극담(靑坡劇談)이란 저서까지 있어 시인의 칭찬을 받은 선생이다.
이괄은 그의 후손으로 문지도 혁혁하고 이번 반정에도 공이 제일에 거할 것인데 어찌하여 올라가지 못하였는가 혹이 말하되 인조 용상에 오르기를 두려워하고 재삼 사양할 때 이괄이 자기가 용상에 올라앉으며 이렇게 앉지 못하느냐고 모본을 보였다.
그때 인조의 마음에 이괄이 무엄하고 범상할 자로 의심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수공을 줄 수 없다 정한 듯하다. 역사에 없는 말이다. 정평은 내릴 수는 없으나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이다. 이괄이 충의가 있는 사람이면 자기의 불평으로 나라 일을 그릇치지 않겠지만 그런 야심가에 있어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니 조정에서 이것을 알지 못함도 한 실수이다.
반정 시 모든 장영들이 홍제원에 모일 때 김유가 좀 늦게 도착하였더니 오늘은 군법을 지켜야 할 터인데 김유가 늦게 온 것으로 토벌하려 하는지라. 여러 장영들을 우리가 성공하기 전 먼저 벌불에 쓰는 것이 불가타 하여 정지한 일도 있다. 하여튼 이때 이괄의 불평은 정당타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