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와의 인연
김 화순
어디서 온 아인데 저리도 까맣고 바싹 말랐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먼 나라 동남아에서 왔나 싶을 정도로 까맣다.
한눈에 들어오는 저 아이는 유난히도 불쌍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놀고 있는지 한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어느 해 가을, 우리 아들 5살 적 일이었다. 그날따라 아들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갔었는데. 그 아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 까맣고 깡마른 아이가 유난히 안쓰러워 보여서 옆에 다가가 살며시 물어보았다. “얘야, 너는 어디 사는 아이니? 너는 누구랑 사니?”물어보았지만 아이는 힐끔 쳐다볼 뿐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 아이가 놀이를 끝낼 때까지 나는 기다려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살며 어떻게 사는지 혹시 몸에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그 아이 부모가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했다. 한참 후에야 아이는 모래가 잔뜩 묻은 손을 툭툭 털고는 일어섰다. 혼자서 투덜투덜 천천히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따라서 가보니, 그 아이가 들어가는 집은 곧 무너질 듯 초라하고 어수선했다. 나는 그 아이와 그 집을 보고는 가슴이 아파 그대로 돌아올 수가 없어 몇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다. 아이가 달려와서 문을 열어주어 들어가 보았다. 손자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데 살림살이가 너무 낡고 허술하여 볼품이 없었다. 팔십 대의 노인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어디서 왔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 저 아이와 놀이터에서 놀다가 아이를 따라와 봤어요.” 나는 물어보았다. “할머니, 누구랑 사세요? 저 아이가 너무 가여워서 따라왔어요.” 그랬더니 조금 후에서야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막내아들이 낳은 아들이요. 지랄하느라고 며느리 년이 바람이 나서 도망을 쳤는데, 그러고 나니 우리 아들까지 정신이 이상해지더니 집을 나가 버려 우리 불쌍한 손자랑 나만 둘이 남았다오.” 할머니의 말이 기도 안 찼다. TV에서나 보던 가난하고 슬픈 집이 바로 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저놈이 불쌍해 죽 갰다오.”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할머니는 앉은뱅이처럼 앉아서 모든 일을 하신다며 돌봐 줄 사람 좀 찾아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나는 불쌍한 아이와 할머니를 그냥 두고 올 수가 없어서 “그럼 할머니, 저 아이를 며칠만 저의 집에 데리고 있을게요.” 했더니, 할머니는 얼른 “그럴 라우? 고맙소, 젊은이.” 나는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그 아이를 데려왔었다.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다 놓았더니, 우리 식구 모두 저 아이가 누구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며칠만 묶고 보내자고 했다. “며칠만이라도 우리가 돌봐요.” 남편에게 아이 처지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그럼 우리가 얘를 키우자. 사람 한 명 더 있다고 해서 우리 집 형편이 기울겠느냐.”며 그 불쌍한 아이의 부모를 찾을 때까지만 돌봐주자고 남편이 선뜻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이 너무 고마웠다. 사실 나도 그런 마음이었는데 남편의 눈치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아마 남편도 당신이 어릴 적에,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던 그 가난했던 시절을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남편의 넓고 깊은 마음에 감동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 는 말이 있지만, 남편은 당신이 어려웠었던 그때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고, 어려운 사람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그 후 그 아이와 우리 아들은 형, 동생 하며 아이가 붙임성이 있어서 누구와도 잘 지내고, 먹는 것도 잘 먹고 아이가 찾아서 눈치껏 애교도 부리곤 했다. 저녁이 되면 초인종을 울리면 아빠라며 반기고 내 남편 사랑을 독차지 했다 설상, 내 아들은 멀리서 번둥거리며 어색할 정도로 그 아이는 잘 따랐다. 나는 그 아이가 매일매일 꾸김없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좋았다. ‘우리를 만나서 저 아이가 조금이나마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며
때로는 손자를 남의 집에 보내고 혼자서 외로이 사시는 그 아이의 할머니도 마음에 걸려서 가끔 아이와 함께 찾아가 간단한 반찬을 전해주곤 하지만 할머니는 매번 젊은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며 눈물로 호소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지만 아이는 신난 듯 할머니와 손을 흔들며 해어지지만 못내 안타깝기도 했다. 그 후해 가 바뀌고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다른 아이 못지않게 몸에 살도 통통하게 붙었다.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아주 예쁘게 자랐다. 끼니때만 되면 얼마나 많이 먹는지 먹어도 끝이 안 날 것처럼 먹어댔다. 그 아이는 가난과 부모의 부재로 허기가 가슴 안에 꽉 차 있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우리 친정어머니께서 ‘저 아이 배속에는 걸구 가 들었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 많이 먹이세요. 저 아이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다 부모 잘 못 만난 탓이지요. 아이가 무슨 죄가 있나요?”라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3년 후 한 남자가 라면 두 상자를 들고 내 집을 찾아왔다. “저... 저... 저기요...제... 제가... 아이 아빤데요... 우리 아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껏 못 데리러 왔어요.. 정말 죄.. 죄송해요... 그리고 고... 고마워요..” 하면서 그는 뒤늦게 새색시를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다며 삼 년의 자초지종을 풀어놓았다. 떡 방앗간을 시작하려고 한다면서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떡을 우리 집에 해주고 싶었노라고 했다. 두 라면상자에 가득히 떡이 채워져 있었다. 말을 더듬대면서 감사 인사를 더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말을 더듬거리니 본인 마음대로 표현이 잘 되질 않아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떻든지 내 눈에 비친 그는 “순 박” 그 자체였다. 그는 덧붙여 “조.. 조금만 더 기.. 기.. 다려주세요. 제.. 제가 자리 잡으면, 꼭 우리 아들 데리러 오겠습니다.”라며 머리를 긁적이며 되돌아갔다.
그 순간 나는 하늘을 날아갈 듯 행복감과 보람을 느꼈다. ‘내가 정말 옳은 일을 했구나.’ 나는 그 떡을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잔치 떡처럼 자랑을 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드디어 우리 집에 왔었다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정말 잘 된 일이며 함께 자기 일 인양 좋아 들 했다. 그 이듬해 가을, 그 남자는 아이를 데려갔다. “얘야, 건강해라, 꿈을 가지고 잘 살아가야 해.” 우리 가족은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내야만 했다. 그 아이는 말했다
“ 아빠 이제 나 안 버리고 도망 안 가나요? 또 그러면 다음에 또 와도 되나요.” 나에게 물음에 눈물이 왈칵 나왔지만 보내는 순간 내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4년 동안 우리 집 울타리 안에서 잘 자라준 그 아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무소식이 희소식일까? 그 후론 안타깝게도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새엄마의 사랑 속에서 잘 자라고 있으리라 믿는다. ‘대성아. 지금은 성인이 되었겠지?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또 멋있게 자라서 한 번쯤은 이 아줌마에게 찾아주려무나
보고 싶구나. 대성아.
2001. 2004년 동안 내 곁에 머물렀던 아이 생각나는구나.
첫댓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