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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박물관이 살아있다! 그럼 안 되는데>의 줄거리:
'박물관이 살아있다' 총 세번에 걸쳐서 제작 상영 된 시리즈 영화의 제목입니다. 밤마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이 깨어 살아 움직이면서 나타나는 에피소드를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지요.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의 계획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진행 되는 내 인생은 나 자신에게 박물관이 되도록 의도 되었었습니다. 나는 내 삶에 대해 제3자로 구경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에덴의 삶이었지요. 타락 후 나타난 가장 큰 문제는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그럼 안 되는데
(사무엘상 19:1~24)
11. 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12.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13. 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14. 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이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15. 사울이 또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째 내게로 들고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16. 전령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는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17.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박물관이 살아있다! 그럼 안 되는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그럼 안 되는데’
영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박물관이 살아있다”라는 영화를 아실 것입니다. 3편까지 제작이 된 시리즈 영화인데 1편의 배경은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이고, 2편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박물관이고, 3편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입니다. 내용은 밤이 되면 박물관의 수천만점의 전시물들이 살아나면서 생기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던 영화로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을 염두에 두고 나 자신의 생애와 연관을 시켜봅니다. 비유적으로 내 인생 전체는 ‘나’라는 사람의 인생사박물관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들이 전시되는 박물관인데 어떤 의미에서 내 생애를 박물관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내 인생의 시간의 흐름을 따라 생기는 사건들이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될 수 있는 이유는, 내 삶의 모든 일과 사건에 대해서 구경꾼이 되고 제3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물관은 살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것은 내 생애의 모든 사건과 일들이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지 않고 내가 대처해야 하는 살아있는 문제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박물관이 살아있는 상태로 삶을 살아갑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삶은 인생사박물관입니다. 에덴은 아담과 하와의 인생사박물관이었다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에덴에는 아담과 하와의 인생의 사건들이 전시되어 있고 아담과 하와가 그 전시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삶에서 아담은 주어진 사건에 대해 판단하지 않습니다. 판단하지 않으면 그 사건을 생각할 수 없고, 그 사건을 생각하지 않으면 계획 할 수 없으며, 계획이 없으면 소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의 인생에 판단과 생각과 계획과 소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과 계획과 소원에 의해서 아담의 인생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아담이 스스로 움직여 행하는 모든 일조차도 인격적인 차원에서 보면 자신의 판단에서 자신의 생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담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제3자가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움직이는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제3자가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에덴에서 살도록 되었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이 사시는 나의 인생을 구경하는 자로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나의 인생을 박물관에서 전시물을 보듯이 제3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인격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을 향해서입니다. 에덴에서의 삶에서 내 인생에 어떠한 사건이 부딪히더라도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나는 아무리 위급하고 절박한 일이라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판단하고 생각하시고 계획하시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내가 주체적이고 인격적으로 대처해야만 하는 분야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향하여 내 마음은 살아있을 뿐이고 내 인생의 문제는 아무리 다급해도 나는 제3자로 구경하는 자가 돼야 하는 것이므로 타락 이전의 에덴의 삶은 아담과 하와의 인생사박물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에 대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당면한 일과 상황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생각하시며 계획과 소원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나의 판단과 생각과 대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판단하시는 대로 이끄시며 내 육체를 통해서 해야 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행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나는 구경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내가 끌어안고 판단하면서 그 모든 문제들이 박물관의 전시물이 아니라 내 마음에 살아있는 문제들로 등장을 하여서 삶의 문제가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많은 경우에 문제가 끊이지 않음을 비유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바로 믿어서 그 생각과 판단하심을 인정한다면 자녀들은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어버립니다. 야곱처럼 열두 아들이 있어도 다 전시물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구경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매로 훈육을 하는 상황에서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제3자로서 구경하면서 내 몸을 움직이는데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신앙의 신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하면서 삶의 전시물들이 되었어야 하는 것들이 다 살아서 움직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큰 변화가 주어지는데 하나님이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셨습니다. 기독교인에게 물어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생애의 문제들을 박물관의 전시물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의 문제들에 대해 대응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전시물에 구체적인 이름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내 마음에 부딪히고 계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어떤 사건보다도 먼저 인정 받으셔야 하고 먼저 현실이 되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아서 생각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고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문제가 터졌다고 생각해보세요.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는 내 마음에 살아서 들어올 수 없고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대처할 뿐입니다. 그럴 때에 문제는 전시물이 될 수밖에 없고, 나는 그 문제에 대한 제3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윗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왕가의 균열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왕인 아버지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그 왕의 아들과 딸인 왕자와 공주는 다윗을 구하려고 합니다. 다윗으로서는 너무너무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이 주어지는데 재미있습니다.
사울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다윗을 죽이라고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이전에는 블레셋과의 전쟁에 내보내서 블레셋의 칼에 죽게 하려는 음모를 꾸밀 뿐이었지만 이제는 다윗을 죽이라는 왕의 칙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다윗은 사울 왕의 이러한 무고한 살해의도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 대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다윗의 움직임에 대한 묘사가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요나단과 미갈이 다윗을 구하려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장황하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당사자이자 주인공은 다윗인데 그 다윗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버렸고 다윗이 사라져버렸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는 지금 왕권을 쥔 자가 다윗을 죽이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위급한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의 삶의 국면에 대해 박물관의 전시물을 보듯이 구경하는 제3자가 되어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라’는 공공연한 왕의 명령에 대해 요나단이 감히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왕이 곧 법인 군주제에서 감히 아들이라도 이럴 수는 없는데,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충정어린 직언을 함으로서 다윗을 일단 구해내게 됩니다. 이후에 사울에게 또 악신이 임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이번에는 미갈이 다윗을 구해내게 되고 그 과정이 장황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다윗은 사울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않고, 복수를 다짐하지도 않고, 도피 계획을 짜거나 나라를 사울의 손에서 취하려는 어떤 꿈과 욕망을 실행하지도 않고 다윗의 존재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전사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나뒹굴게 했던 다윗은 어디로 가버렸고, 블레셋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던 천부장이었던 다윗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그 용맹하고 뛰어난 지혜와 모략을 겸비한 장군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는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상황의 다급함을 10절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라고 하는데 이것이 다윗의 움직임에 대해서 표현한 구절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요나단이 구하고 사울은 죽이려하고 미갈은 구하고 사울은 죽이려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에는 사무엘에게 도망을 갔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사울 왕이 옷을 벗고 하루 밤낮을 누워서 예언하게 하면서 피신할 틈새를 만드십니다. 이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신앙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신앙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선민이나 기독교인은 존재할 수 없는데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앞서 본 사무엘상 17장 26절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라고 합니다. 또 36절에는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라고 합니다. 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다윗의 고백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부인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다윗이 달랐던 점은 다윗은 골리앗도 눈에 보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사실인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먼저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현실로 받아들이면 생각하시고 판단하시고 계획하시고 소원이 있으시기 때문에 골리앗과의 전투는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고, 다윗은 자신이 물맷돌을 던져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구경하는 제3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 경우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입으로는 믿었지만 골리앗을 먼저 현실로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는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십니다. 그 전시물의 이름이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선민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에서 하정우 씨가 “살아있네!”라는 유명한 대사를 했습니다.
‘돈 문제가 살아있네’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박물관에 전시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 문제 살아있네’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건강 문제 살아있네’라고 하는 이유도 하나님이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풍랑 만난 배 위에서 두려워 떠는 것이 당연해보이지만 그 당연함은 유전 죄의 상태입니다. 주무셨던 주님의 모습이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풍랑이 살아있었고 하나님은 박물관의 전시물이었지만, 주님은 하나님을 먼저 현실로 받아들이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풍랑은 박물관의 전시물이 되어서 제3자의 입장에서 구경거리가 되어버렸는데 이런 삶이 선민의 삶입니다.
돈과 건강과 자녀 문제가 살아서 나를 압박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그 문제들보다 먼저 나의 현실이 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을 위해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리 뱀 장대를 바라보듯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문제에 대해서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는 내게서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유전 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판단하고 생각할 때에 박물관의 전시물이 살아나듯이 문제가 살아나게 되고 하나님은 전시물로 전락해버리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선악과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죽은 자’라고 고백하면 죽은 자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판단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사울 왕이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던 상황이 다급했지만 다윗은 자기 판단과 생각으로 도망갈 계획을 짜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이 계획을 짜고 요나단이 구명운동을 하고 미갈이 계획을 짜서 미갈이 피신을 시킵니다. 사무엘에게 가서는 사무엘이 피신을 시키고 사무엘에게 임하신 성령이 사울에게 강압적으로 역사하셔서 다윗이 도망할 길을 만드십니다. 다윗은 이 위급한 상황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위급한 상황을 뛰어 넘을 때 신앙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절박하고 위급한데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것이 선민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구분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선악과 이전의 상태로 내게 어떠한 사건이 주어지더라도 나는 죽은 자로 머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든지, 타인을 통해 역사하시든지, 상황을 바꾸시든지 역사하실 것입니다. 나는 ‘나’라는 인생사의 박물관에서 벌어지고 전시되는 사건들을 구경하는 제3자가 될 수 있고, 나의 주체적인 움직임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 따라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만을 가지기 위해서 아버지만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만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만을 살아계신 분으로 내 마음에 모셔 들인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이 사시는 여러분의 인생사 박물관을 구경하는 제3자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너무나 간단합니다. 날마다 수십 수백 수천의 문제들이 내 앞을 가로막아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그 문제들은 박물관의 전시물이 된다고 하니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사시는 모습을 구경하는 자로 살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