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를 배운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소위 '절대음감'이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절대음감'까지는 못 되어도 '상당한 음감'(?) 정도는 타고난 까닭인지 어릴 때부터 새 노래를 비교적 잘 배우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에 다녔던 부산의 제일영도교회에서는 중고등부 SFC 찬양대가 주일 밤마다 찬양을 했었는데, 어느 주일 밤에 '할렐루야' 코러스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할렐루야'의 테너 파트를 혼자 집에서 찬송가만 가지고서, 그것도 악보도 보지 않고 외우게 될 정도로 완전히 떼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연습하는 첫 시간에 테너 파트에서 쩔쩔매는 고등부 형님들을 제가 마치 파트장이 된 것처럼 가르쳐 주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학교에 어떤 음악대학교에서 교육실습생 선생님들, 약칭 '교생 선생님'들이 오셨는데, 그 분들이 계실 동안에 각 반 대항 합창경연대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2학년 9반은 '라 쿠카라차'라는 노래, "병정들이 전진한다 이 마을 저 마을 지나 소꿉놀이 어린이들 뛰어와서 쳐다보네... 라쿠카라차라쿠카라차"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처음으로 연습하게 된 시간에 저는 원래 테너였지만, 그 노래에는 테너 파트가 없어서 앨토 파트를 자원했었습니다. 그때 학생들에게 앨토 파트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클라리넷으로 '딴딴딴 딴따란딴딴 딴다'라는 앨토 멜로디를 불러 주시던 교생 선생님께서 하필이면 바로 제 곁에 계셨는데 딱 첫 번째 연습이 끝나자마자 "나보다 기현이가 더 정확하게 부르네."라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조금도 자랑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워낙 '타고난' 음감인지라 또 한 번 어쩔 수 없이(?) 돋보이게 되는 사건이 작년 말에도 또 한 번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경향교회 노래가 새로 작곡되었을 때에 민한기 집사님께서 그 악보를 목양실에 있던 제게 가져오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경향교회 노래의 새 멜로디를 처음으로 보게 된 순간 무심코 '미레도솔 도레미파솔 솔솔라솔 도레미레'하고 흥얼거려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민한기 집사님께서 "야, 당회장 목사님의 계명창 솜씨가 대단하십니다."하면서 감탄하셨는데, 아마 민 집사님께서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씀은 '참 천재적(?)이십니다.'가 아니었을까 짐작되는데, 하여튼 저는 원래는 그저 한두 소절만 불러보려고 시작했던 것이 그 칭찬 때문에 결국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불러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새 노래' 잘 배우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저도 배우기 어려운 노래들이 있습니다. 바로 요즘 젊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인데, 제가 그것들을 배우기 어려운 이유는 그 노래의 형식이 힙합이니 랩이니 혹은 무슨 'R & B'라는 따위의 전혀 생소한 것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노래들이 내포하고 있는 감흥을 제가 전혀 공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나오는 대중가요들을 보면 가사만 들어도 정말 기가 막히고 절로 낯이 뜨거워지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박지윤의 '성인식'이라는 노래는 여자 쪽에서 아예 대놓고 남자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가사로 일관하고 있고, 얼마 전에 나왔다는 엄정화의 어떤 노래는 그 희한한 영어 스펠링을 사용하고 있는 제목조차 제가 이 자리에서 인용하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노래들이 무슨 '19세 이상 청취불가'라는 제한조차 없이 이 나라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리에 애창되고 있으며,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도 그런 선정적인 노래들을 따라 부르면서 춤을 추는 것을 어른들은 귀엽다고 박수를 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의 SFC학생들은 자신의 mp3에 그런 망측한 노래들은 아예 저장을 하지 않아야 하고 우리 임마누엘 미혼청년회원들은 노래방에 가서도 그런 음란한 가요들은 콧노래로라도 따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사실 옛날에 이효리의 '10 minutes'라는 노래, 자기한테 10분만 주면 다른 사람의 남자 친구까지 자신 있게 빼앗을 수 있다는 가사의 노래를 처음 듣고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요즘 나오는 이런 음란한 대중가요들에 비하면 그 '10 minutes' 정도는 오히려 그저 애교스럽게 여겨질 정도인 것입니다.
제가 대중가요라고 해서 다 공감이 안 되고 배울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의 학생 시절 때에 그보다 몇 십 년 전에 나왔던 옛날 대중가요들을 들었을 때에는 요즘의 그런 노래들을 들을 때와는 그 첫 감흥부터가 전혀 달랐습니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맨발로 절며 절며 울고 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구성진 곡조를 들으면, 저는 육이오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부모님들이 그 민족의 비극을 통과하시면서 뼈에 사무치도록 겪으신 그 '단장'의 고통, 즉 '창자가 끊어질 듯이 맺힌 한'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이 '비 내리는 호남선'은 대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캠핑을 가서 기타를 치면서 생전 처음으로 불러보았는데, 바로 첫 순간부터 그 한 소절 한 소절이 그 전에 제가 부르던 그 어떤 동시대의 연가보다도 훨씬 더 가슴에 짝짝 와 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흘러간 옛 노래'들은 이처럼 우리 부모님들의 정서가 제게도 고스란히 공감되기 때문에 그토록 단숨에 배웠고 지금도 원로목사님 생신잔치 때나 교역자 단풍놀이 가는 버스 안에서 언제든지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잘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어떤 '새 노래'를 잘 배우기 위해서는 일단 '음감'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노래의 감흥이 자신의 정서와 잘 맞아 떨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늘나라에서도 바로 그런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십사만 사천 인이 부르게 될 새 노래'입니다. 1절에서 사도 요한이 "또 내가 보니"라고 증거하고 있는 대로,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장면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는 광경이었는데, 이것은 심판주로서 재림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거룩한 산 시온에 서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었윱求?
그리고 바로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인"이 서 있는 장관이 펼쳐졌다고 했습니다. 이 숫자는 3과 4라는 완전숫자들을 서로 곱한 12라는 또 하나의 완전숫자, 그리고 그 12를 다시 12로 곱해서 나온 144라는 숫자에, 10이라는 완전숫자를 세 번 곱한 1000이라는 완전숫자를 또 곱해서 나온 것으로서, 그야말로 완전숫자들만을 곱하고 곱하고 또 곱해서 나오는 숫자입니다. 즉 이것은 바로 구원 받은 택자가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채워졌음'을 상징하는 숫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십사만 사천 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재삼 확인됩니다. 즉 만세 전부터 하나님께 속한 소유로 인쳐서 예정되어 있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그 구원이 완성된 택자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 천국의 성도들이 하늘의 대합창을 부르게 되는데 그때 부르게 되는 노래가 바로 3절에 나오는 "새 노래"라고 했습니다.
이 '새 노래'를 배우기 위해서도 바로 '영적 음감'이 있어야 하며 또한 '영적 공감대'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 '음감'은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그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서 요한계시록 1장 15절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묘사할 때 나왔던 표현입니다. 그 소리는 또한 "큰 뇌성"과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요한계시록 6장 1절에서 하늘의 "네 생물"의 소리, 계시록 8장 5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들의 음성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물소리'와 '뇌성'이 이제 사도 요한의 귀에는 "거문고 타는" 소리처럼 아름다운 음악으로 완벽히 조화되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지금 '새 노래'를 부르는 십사만 사천 인들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음성' '천사들의 소리'로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천당에 가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 성도들은 절대로 음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사만 사천 인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이 영화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음감' 역시 다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 노래'를 배우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인 '공감대'는 어떻게 얻게 되는 것입니까? 3절을 다시 보시면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하자면, '구속함을 얻은 자'는 이 노래를 아주 쉽고도 정확하게 배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새 노래'의 주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완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노래 자체는 이전에 없었던 '새 노래'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 노래의 가사는 '구속함을 얻은 자' 즉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뜨거운 눈물로 감사드릴 줄 알았던 성도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 구속이 완성되어 이제 자기 자신이 실제로 그 천국의 시온산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된 감동으로 그 노래를 부르니, 정말이지 사전연습도 필요 없고, 계명창도 필요 없고, 입만 벌리면 절로 다 일심동체의 찬양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새 노래이며, 이 얼마나 감격적인 대합창이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아무나 배우거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닙니다. 반드시 구원받는 택자의 수에 들어가야만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절대음감'을 소유하고, 그 십자가 대속을 믿어 영생 구원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게 된 뜨거운 '감사의 공감대'가 통해야만 부를 수 있는 이 천국의 대합창, 십사만 사천인의 새 노래를, 오늘 이 밤에 부활의 기쁨과 은총을 찬양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반드시 함께 부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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