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걷고 먹고 웃는… 일상의 은총체험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신비를 체험할 것 권유
칼 라너 신부
■ 일하는 것, 걷는 것, 보는 것….
칼 라너 신부의 묵상집 「일상」의 원제는 ‘일상의 것들(Alltagliche Dinge)’입니다. 말 그대로 이미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살아가면서 행하고 체험하는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목이 뜻하듯, 이 책에서 라너 신부는 독자들에게 영성적 묵상에 어울린다 싶은 별스러운 영적 체험과 장소를 찾아다니기에 앞서서 우리가 거의 습관적으로 수행하며 반복하는 일들과 익숙한 삶의 자리에서 신비와 만날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목차를 대하면서 우리가 갈망하는 신비 체험의 계기들이 놀랍게도 우리의 일상사에 함께 묻어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일하는 것’ ‘걷는 것’ ‘앉는 것’ ‘보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신비의 현현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영성입니다.
라너 신부는 먼저 이러한 일상적인 일들을 차분하게 관찰하고 묘사합니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우리가
이러한 익숙한 행위들이 품고 있는 소중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음을 던집니다.
그 물음은 조금씩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사가 반영하는 ‘신비’에 대한 깊은 차원의 성찰로 이어지고, 이렇게 ‘의식된’ 일상은 영적 체험의 자리가 됩니다. 라너 신부가 이 소책자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일상적 행함에 대한 새로운 성찰들 중에서 몇 가지를 옮겨 봅니다.
“일은 우리가 평일 또는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적 내용이다… 일의 신학이 해야 할 첫마디는,
바로 일은 그대로 일이라는, 또 언제나 그러리라는 말이다. 즉, 고달프게 단조로운 것,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것, 일상적인 것이다.(‘일하는 것’)”
“우리는 걷는다. 그리고 이미 이 신체적인 걸음만으로도 여기가 우리 정처가 아님을, 우리는 길을 가고 있음을, 어디엔가 정말로 이르러야 할 몸임을, 아직도 목적을 찾고 있는 나그네임을, 두 세상 사이의 방랑자임을, 길손임을 말한다.(‘걷는 것’)”
“앉는다는 몸짓은 부정도 표명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평정과 고요와 항구의 복된 향유에서, 잃을 두려움 없이, 한마디로 평정한 앉음에서이다.(‘앉는 것’)”
“일상의 보는 행위로 되돌아가자. 이 행위 자체도 이미 인간이 하나의 전체로서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곧 인간은 열려 있고, 두루 살피고, 멀리 있어 좌우할 수 없는 것에도 마음을 둘 줄 알며, 자기 자신을 내보이고, 내심을 드러내고, 남이 나를 있는 그대로 알기를 용납할 용기와 순진을 갖춘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보는 것’)”
“일상에는 일의 심각성뿐 아니라 바라건대 웃음도 어우러져 있다.… 이런 웃음은 모든 것과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만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볼 줄 아는, 탁 트인 호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웃는 것’)”
“인간 실존의 위대하고 숭고한 그 무엇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드러내려면 회식이 그 우선적 상징이 됨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회식은 먹는 이들 상호 간의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지는 일치의 상징, 아니, 실행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존의 기반인 신체적 식사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자신을 서로 베풀어 주기 때문이다.(‘먹는 것’)”
“잠은 인간 세계가 근본적으로는 올바르고 안전하고 선함을 신뢰하는 행위, 천진의 행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현실을 수락하는 행위이다.(‘자는 것’)”
■ 세계 긍정에서 시작되는 일상의 영성
라너 신부는 여기서 우리에게 일상의 경험 자체에 대해 환상을 갖거나, 그것을 미화하고 신비화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범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일상에 배인 수고와 고뇌와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기보다는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깊이 이해하면서도 그것까지도 포함하여 나에게 주어진 세계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
그는 이처럼 일상의 세계를 긍정하는 결단을 감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세계’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내면 깊은 데서부터 ‘세계긍정’이라는 태도를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를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신비와의 만남입니다. 라너 신부는 우리가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으면서 굳건하게, 진정한 의미에서 정신적이고 영성적 차원에서 나의 일상의 세계를 만나는 삶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그가 속한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가르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경구가 담은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편 라너 신부의 영성이 현대인들에게 갖는 의미를 높이 평가하는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승이자 저명한 영성가인 안셀름 그륀 신부는 라너 신부의 ‘일상의 영성’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제시한 신학의 정식인 “경험을 통한 하느님 인식(Cogito dei experimentalis)” 경구와 깊이 상통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너 신부의 신학과 영성은 교회 전통에서 열매 맺은 신학과 영성의 정수를 오늘의 언어와 상황에 맞게 되살린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라너 신부의 이 묵상은 상당히 오래전에 쓰여진 글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삶의 기예’의 철학과 비교해 볼 때도 적지 않은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기예’라는 말은 고대 헬레니즘 철학에서 유래한 용어이지만, 특별히 최근에 들어 삶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보여지는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에서 벗어나 일상에 깊이 뿌리박고 우리가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며, 성공적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 윤리학과 인간학을 추구하는 철학들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너 신부의 일상에 대한 묵상들을 이러한 경향의 철학들과 비교해보면 사실 서로 적지 않은 접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만큼 그의 묵상이 오늘날에도 시의성을 지니고 있고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깊이 살펴보면 그가 보여주는 일상의 영성과 신학은 ‘삶의 기예’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라너 신부는 우리가 일상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삶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올바른 길을 안내하는 ‘삶의 기예’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하고 선용하면서도, 그것을 궁극적인 영성의 대안으로 삼을 수 없다는, 그리스도교적 식별의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은총체험’을 일상의 영성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너 신부의 묵상 마지막 장에서 감동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의 기예’를 넘어 ‘은총체험’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의 신학의 근본적 주제인 ‘초월’에 대해 접근하게 됩니다
칼 라너 신부의 묵상집 '일상'
최대환 신부 (의정부 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