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에서 깨어난 그는 세수도 않고
밥 먹을 생각도 않고 부시시 거실로 간다
식구들 아무도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집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조금 심심하고
피곤하다 지저분한 머리칼 건성 쓸어넘기며
그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뒤적인다 늘 그랬던 것처럼
구인란 광고를 본다 마땅한 것이 없다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문다 이윽고 한숨 색깔로 피어나는 연기
보던 신문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그는
벽시계를 본다 정오가 가깝다 별 흥미없이
손 닿는 거리에 있는 TV를 켠다 의리 없는 짜식
오늘은 이 당꼬바지가 손 좀 봐 주겠어 천천히
화면 밝아지며 두 사내 주먹으로 맞서 있다 유선
방송은 항상 액션물을 방영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두 사내의 손발이 허공에서 엇갈린다 야아앗 이얏
재떨이에 한심하게 재가 쌓이고
그의 눈은 어느덧 천장에 머물러 있다 너 정말 이러기냐
술병과 안주 접시 와장창 깨지는 소리 여자의 비명 소리
그만해요 제발 TV 화면은 그와 무관하게
클라이맥스를 향해 신나게 치닫고 느닷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며
왼손으로 천천히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난 또 누구라고
그의 눈은 다시 TV 화면에 머문다 당꼬바지가
카운터 앞에 맥없이 쓰러진다 그의 눈은 보고
입은 말한다 뭐 돈을 천이나? 미친 자식들
다른 사내의 검은 장갑이 당꼬바지 멱살을 거머쥔다
응 알았어 딴 데 알아보지 뭐 수화기를 놓고
그의 입과 귀는 동작을 멈춘다 TV화면에서 눈길 떼며
그의 손은 무감각하게 TV를 끈다 집안은
고요하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는 부시시 거실을 나가고
재떨이에 꽁초만 남아 연기를 낸다
-시집 [시국에 대하여](198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