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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박경선
1. 볶은 소금, 꽃소금
“아빠, 여기서 내려줘요. 벚꽃 보며 걸어서 갈래요.”
내 말에 아빠가 운전을 멈추더니 뒷자리의 우리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다정이도 언니 따라 내릴 거야?"
다정이도 '헤헤' 웃으며 따라 내렸다. 활짝 핀 벚꽃이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길을 폴짝폴짝 뛰어갔다. 투스텝으로. 달달한 냄새가 진동하며 따라왔다.
“언니, 할머니가 소금 볶을 때 나던 그 벚꽃 냄새야!”
다정이 말에 깜짝 놀랐다. 소금 볶는 할머니와 가마솥 옆에 서서 벚꽃 향기를 퍼 나르던 벚나무 모습이 그림처럼 살아났다. 할머니는 늘 장 담그기 전에 소금을 볶았지만, 작년에는 장 담그고 나서도 소금을 자주 볶았다. 음식에는 할머니가 볶은 소금만 썼고, 화장실에도 조그만 소금 단지를 올려놓고 양치질용으로 썼다. 할머니는 아예 손님들에게 선물할 소금 병을 조그만 유리병으로 많이 사 오셨다. 동네 어르신들과 집에 놀러 오는 손님들, 여기저기 봉사활동 갈 때도 소금 선물을 챙겼다. 그것은 할머니의 선물 나누기 놀이였다. 우리도 그 놀이에 끼어들었다. 할머니가 볶은 소금을 병에 담는 것, 두꺼운 종이(마분지)로 상자 만드는 것, 소금 병을 상자에 담고 빈 공간에 주워 온 꽃잎을 담아 장식하는 것 등 놀이의 재미가 쏠쏠했다. 할머니의 소금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볶은 소금’ 이야기보다 ‘꽃소금’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불순물을 다 날린 볶은 소금을 먹으니 오래 살 것 같어. 그보다 벚꽃잎까지 담아준 그 정성이 고와서 눈물이 다 나네!”
“아이고, 소금 한 줌 가지고 뭔 공치사를……. 많이 볶아 둘 테니 자주 놀러 오쇼!”
할머니가 이웃들과 나누는 이런 이야기를 무심코 들으며 지냈는데 이젠 할머니가 안 계신다.
2. 우리 친구 할머니
다정이랑 벚꽃 길을 걸어가길 잘했다. 내 마음속에 들어있는 할머니를 열어보기 좋은 길이다. 우리는 갓난아기 때부터 시골 와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 직장 때문에 바쁜 엄마, 아빠 대신 우리를 키워주신 할머니는 우리의 친구였다. 소꿉놀이할 때는 오히려 할머니가 아기 역을 맡았고 내가 엄마가 되고 다정이가 언니가 되었다.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도 많이 해주었지만 젊었을 때 여행 갔던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하셨다. 재작년에 할머니랑 벚꽃길을 걸을 때, 할머니가 꿈 이야기를 하셨다.
“내년엔 우리 가족 여행 한번 갔다 오면 좋겠다!”
“어디로요?”
그때 하얀 소금꽃 나라 이야기를 하셨다
“이런 벚꽃보다 더 하얀 소금꽃이 있는 나라야.”
할머니 말에 내가 아는 체 나섰다.
“할머니, 할머니가 보던 여행 가이드 책, 저도 봤어요. 보송뽀송 소금꽃 나라에요?”
“보송뽀송 말이 운율도 있고 더 재미있네. 본래 이름은 ‘우유니’라는 나라야.”
“우유니 나라라고요? 소금꽃으로 만든 우유니? 맞니? 호호호!”
할머니는 내가 조잘대는 이야기에 늘 맞장구를 치며 재미있어하셨다. 할머니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 금세 할머니 댁에 다다랐다. 할머니가 안 계시는 줄은 알지만, 대문에 들어서며 소리쳐 보았다.
“할머니, 저 왔어요.”
내 말에 다정이도 옛날 기억이 나는 듯 따라 했다. 할머니가 마당을 내다보며 웃어야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 돌아가시고부터 빈집에 내려와 그림을 그린다던 삼촌이 웃으며 맞았다. 고소한 음식 냄새 대신 유화물감 냄새가 거실에 가득 찼다. 우리를 차에서 내려주고 먼저 온 엄마, 아빠는 점심 도시락으로 상을 차려두었다. 나는 식탁에 앉으며 할머니의 빈 의자에 자꾸 눈이 갔다. 학교 갔다 올 때쯤이면 따끈따끈한 부침개나 떡볶이, 어묵탕 등으로 늘 군것질거리를 준비해 두셨는데. 할머니 없는 식탁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할머니 산소에 따라갔다.
처음 가보는 산소라서 무덤에 동그마니 누워계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외로울 텐데!’ 걱정하며 따라가는데, 산소 올라가는 길목에도 벚꽃이 한창 피어 떨어진 꽃잎들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할머니가 벚꽃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우리는 뒤처져서 할머니 무덤 위에 벚꽃 뿌려주자며 꽃잎을 윗옷 양 주머니에 한가득 주워 담고 뒤쫓아갔다.
“저기 보이지?”
삼촌이 턱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키 큰 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고, 비석도 없었다. 나무 가까이 다가가자, 아빠가 우리에게 설명했다.
“할머니가 친환경 친환경 하며 사신 것 알지? 평소에, 돌아가시면 환경 안 해치는 수목장이 좋다고 하셨어. 그래서 할머니 유골을 이 나무 둘레에 뿌렸어. 나중에 우리가 죽어도 이렇게 수목장으로 하는 게 좋아!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지!”
아빠가 어제 얼어 죽은 치자나무를 뽑아내면서 하던 말이 떠올랐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지‘ 하던 말! 오늘 와서, 할머니 무덤도 없네 할까 봐 미리 일러준 것 같았다. 내 마음에 커다란 슬픔이 와락 안겨 왔다. 다정이가 슬퍼할까 봐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다정이도 내가 쥔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할머니께 각자 기도를 드린 뒤, 나는 몰래 챙겨온 소금 병을 가방에서 꺼내었다. 할머니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할머니가 볶아놓은 소금 뿌려드릴게요. 썩지 말고 오래 사세요.’ 할머니 나무 둘레에는 이미 벚꽃잎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는 주머니에 구겨 넣어온 벚꽃잎을, 산에서 내려오면서 바람에 날려 보냈다. 뭔지 모를 슬픔이 바람 타고 휘날렸다.
3. 하느님께 드린 부탁 편지
돌아오는 길에 아빠 차 속에서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내가 보는 '어린이 유머집' 책을 좋아했다.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면 ‘아이고 배야! 재치가 뛰어나구먼, 재밌어. 배 째지겠다!’ 하면서도 또 해보라고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도 배 째질 이야기를 엄청 많이 해드렸다. 할머니는 눈물까지 흘리며 재치 있고 재미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다음 날, 학교 갔다 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앞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병원 구급차가 와서 할머니를 태우고 마을 이장님과 같이 읍내 병원으로 가셨단다. 아빠. 엄마가 한걸음 늦게 와서 우리를 태우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차 속에서 나는 내가 너무 웃겨드려서 할머니 배가 째져서 사고가 난 거라고 엉엉 울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평소에 심장이 안 좋아서 병원에 다녔다며 괜찮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구급차에서 내려 할머니를 침대로 옮기는 분들이 ‘오는 길에도 심폐소생술을 계속했는데 반응이 없어요.’ 했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와서 장례 이야기를 할 때에야 비로소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엉겁결에 가방에서 메모장을 꺼내어 하느님께 부탁 편지를 썼다.
<하느님, 우리 할머니 하늘나라 가시면 잘 돌봐주세요. 부탁드려요! 우리랑 여행 갈려고 했는데......> 그 편지를 할머니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고 병실에서 쫓겨나왔다. 그때 내가 할머니 옷 속에 넣어드린 편지를 하느님이 보셨을까? 그래서 지금쯤, 우리 할머니를 잘 돌봐주실까? 아빠가 운전하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흔들리며 꼬박꼬박 조는데 내가 하느님께 보낸 부탁 편지가 할머니 주머니 속에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4.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잠깐, 그 할머니 주머니에 편지가 들어있는 것 같은데…….”
할머니를 부축해서 하늘 문을 들어서려던 베드로 아저씨를 금빛 수염 하느님이 불러 세웠다. 베드로 아저씨가 할머니 재킷 주머니를 여며 보더니 쪽지 한 장을 끄집어내었다.
“아, 그거 내게 보낸 편지 같은데?”
“하느님께요? 겁도 없이 친서를…….”
아저씨가 혓바닥을 내어 고개까지 젓더니, 쪽지를 금빛 수염 하느님께 건네주었다.
<하느님, 우리 할머니 하늘나라 가시면 잘 돌봐주세요. 부탁드려요! 우리랑 여행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를 부탁하는 마음이 지극하구나.”
“쳇, 하느님도. 잘 돌봐달라는 달랑 한 마디가 뭐 그리 지극하세요?”
“베드로야, 너는 이 한마디 속에 담긴 손녀의 화살기도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아차, 죄송합니다. 하느님!”
아저씨가 목덜미 뒤를 긁적대자, 하느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손녀랑 할머니에게는 가족이 함께 떠나고 싶은 여행 계획이 남아 있었을 게다. 그들을 좀 도와주면 좋겠구나.”
‘아, 보송뽀송 우유니 나라!’
우리 가족이 한꺼번에 외치자, 바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더니, 하얀 마법사가 되어 우리를 감싸 말아서 우유니 소금사막에 순식간에 데려다 놓았다. 소금꽃 나라의 문이 투명한 빛을 내며 열리자, 할머니도 나타났다.
“할머니, 정말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어요. 우리가 보송뽀송 나라에 온 게 틀림없어요.”
“그렇구나. 소금 꽃눈이라서 눈 온 날도 춥지 않네.”
우리 가족이 꽃눈 위에 서자 가족 그림자가 소금 바닥에 비쳐, 밑바닥에 또 하나의 가족으로 서 있었다. 아빠가 설명했다.
“여기에 지금 소금이 100억 톤 넘게 묻혀있다네. 비 오면 호수 물이 차서 소금으로 덮인 물 위로 하늘이 비쳐서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 된다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위에 섰고, 안내자로 따라온 베드로 아저씨가 사진을 찰칵 찍어 보여주셨다.
“여기서 사진 찍으면 이승과 저승이 한꺼번에 담겨요. 보쇼. 위에 선 가족은 지금 다솜이. 다정이네가 사는 세상이고, 아래 소금 바닥에 비친 가족은 할머니가 사는 세상이죠. 그러니 이승과 저승으로 헤어져 살뿐,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어머, 우리 할머니와 함께 찍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사진이네요!”
내가 베드로 아저씨께 꾸벅, 절을 했다. 아저씨가 가고 나서 우리는 소금호수를 돌아다녔다. 여행 가이드 책에서 봤던 것들이 그대로 눈에 다 보였다. 거대한 선인장도 보이고 산호석도 보였다. 비늘 모양의 톨라나무, 딱딱한 이끼류 야레타나무, 가시잎 훈데나무는 할머니 말대로 원주민들이 땔감으로 쓰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훈데 나무가 장작으로 타는 불 앞에 둘러앉았다.
“따스한 불을 끼고 앉으니, 몸이 녹는구나. 우리 소금을 모아서 하얀 눈꽃 차로 한 잔씩 마셔볼까?”
할머니 말에 엄마가 맞장구를 쳤다.
“좋죠. 여행의 별미는 여행지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지요.”
엄마와 아빠는 장작불을 살리고, 우리는 할머니가 끓여주신 소금 눈꽃 차를 마셨다.
“눈꽃 차를 마시니 몸도 따스해지고 기분도 최고로 좋아지는데요?"
그러는데, 내 옆에 앉았던 다솜이가 어깨를 흔들었다.
“언니, 뭐야. 기분이 최고로 좋아진다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 바람에 ‘우유니’ 나라 여행이 끝나버렸다.
“아이고 아쉽다. 우유니 나라 여행 중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앞에서 할머니랑 가족사진도 찍었는데……!”
그 말에 다정이 눈에 글썽글썽 눈물이 고이더니 투정을 부렸다.
“언니는 혼자만 갔어? 나도 할머니 보고 싶었는데…….”
“너도 같이 사진에 찍혔는데 몰랐어?”
그래도 다정이는 새초롬하게 풀죽은 얼굴이었다. 나는 다정이에게, 하느님께 부탁 편지를 적어 넣은 덕택에 여행 갈 수 있었다고 생색을 내었다. 그러자, 다정이가 ‘나도!’ 하더니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옳아!’ 다정이도 하느님께 부탁 편지를 쓸 거야. 어쩌면 우리 온 가족을 불러내어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앞에서 가족사진을 다시 찍자고 할지도 몰라.‘ 나는 다정이가 할머니 꿈을 잘 꿀 수 있도록 두 팔로 꼬옥 껴안아 잠들게 해주었다. ’콜코올‘ 뒷좌석에서 다정이가 코고는 소리에 나도 차차 꿈나라로 다시 끌려가고 있었다.

첫댓글 선생님~~다시 쓰신 '소금에 대한 추억과 희망의 동화' 잘 읽었습니다.할머니와의 추억에 마음 따스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