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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올곧은 인성, 진실의 곳간
- 윤태란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며
영혼을 드러내는 투박한 그릇, 윤태란 수필이 담긴 진실의 곳간이다. 풋풋한 향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인간애, 윤태란의 올곧은 인성이 품어내는 품맛이다. 진실의 곳간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 그것을 말하지 않고 윤태란 수필을 말할 수 없다. 윤태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인간학의 명제에 바로 답한다는 데 그 가치가 있다. '문여 기인', 즉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다. 무심히 내뱉는 말 속에는 이미 그의 인생관이나 처세의 방식이 드러나 있어,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윤태란 수필은 인간학에 부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겠다. 수필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 없이 쓰여지지 않는 글이다. 그렇다고 모든 수필이 사랑만 있다고 쓰여지지 않는다. 그 사랑은 사과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양분 같이 작품 속에 용해되어 있어야 하고, 다른 보조관념의 도움을 받아 삽화나 영상적으로 구체화되고, 문장을 통해 상징적으로 의미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소리 없이 내리는 빗줄기가 메마른 대지를 적셔 생명력을 주듯,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어야 한다. 윤태란 수필은 위 조건에 정확히 부응한다.
윤태란은 마음을 텅 비우고 고요함에 들기를 좋아한다. 사색에 즐겨 빠진다는 것은 그녀가 삶의 현장에서 유난히도 욕심 없이 비움의 미학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증거다. 그녀는 기침소리에도 몸을 움츠리는 작가다. 수필의 핵심은 자기 성찰, 바로 무의식의 의식화, 즉 그림자의 인격화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향기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조화나 다름없다. 꽃도 향기를 갖고 있고, 사람도 그 나름의 향기를 낸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이 매력적 요소라면, 인간적 향기는 절대적 요소다. 정의 문학으로 불리는 수필의 향기는 외부의 번득임이 아니라 내부의 번득임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윤태란은 아름다운 대지에 꽃을 피울 봄을 불러오는 작가다. 오늘도 진실하게 자기를 바르게 가다듬는 일에 정진하는 착한 여인이다. 윤태란은 일찍이 「에세이문예」로 등단하여 문인이 되었고, 본격수필에 대한 희구로 오랫동안 본격수필 이론을 배워왔다. 그녀의 수필은 순수의 빛깔과 인정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진실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I. 윤태란의 수필세계
1. 인상과 인정의 집결체, 감동의 편린
윤태란의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이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의 고유한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기에 그녀의 글은 향기를 지닌다. 수필을 인간학이라 부르는 소이도 수필의 내용이 인간에 대한 성찰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윤태란의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의 드러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비워내기를 통한 무욕의 소중함을 수필적 소재로 취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현대는 단절과 소외로 특징되는 시대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윤태란 작가 역시 고독과 외로움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수필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녀가 순수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있는 이유는 누구보다도 착한 심성이 그 원천으로 작용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윤태란의 수필들은 내면의 물음들을 접하고, 진실 찾기로부터 삶의 의의를 깨닫게 한다는 측면에서 유의미한 글이다. 아래 작품은 자기발견의 소중함이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하기에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미 내 마음은 우산을 접은 듯이 구겨졌고, 또래로 보인다는데 어찌하랴. 속상한 마음을 털지 못하는 속 좁은 여자가 나였음을 인정하리라. 잊어버리자. 그리고는 메모지에 숫자 2를 쓰고 해를 그렸다. 이해를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어느새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입을 벌린 석류 알처럼 내가 웃고 있는 게 아닌가. 해결점도 찾았다. 앞으로 내 나이를 물으면 태양처럼 뜨는 해 라고 말하련다. 요즘 곳곳에 혁신 바람이 분다. 노력 여하에 따라 몰라보게 변하는 게 마음이라고 했던가. 봄바람처럼 마음이 가볍다.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성숙시킨 지혜의 힘은 이제 나의 스승이고, 나의 도반이 되었다. 그 남자의 폭언도 일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이라고 생각하련다.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은 편견이고, 열려 있는 사람은 사랑이라 하지 않던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리라.
- <화> 중에서
그림자의 인격화란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아하-경험’으로 인식하여 솔직하게 드러낼 때만 가능하다. 위의 작품 <화>는 주부의 자리에서 겪었던 내면의 그림자를 작가가 정면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 글이다. 이 수필의 제목을 ‘화’라고 한 것은 감상포인트다. 그녀는 세상 일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지혜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위를 관심 있게 살피며 위험에 처했을 때, 용기 있게 나서는 사람들의 자세를 보면, 존경스러워 하며 자신을 반성해 보기도 한다. 유리창 밖이 세상이라면, 세상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에서의 부딪침 순간을 참아냄으로써 얻은 지혜를 수필화한 것이다. ‘나누고 비우고 섬기며 살아갈 때, 내 마음에도 빙하가 멈추고 잔잔한 기쁨이 일렁거리지 않을까’하는 주제의식을 말해주고자 라캉도 홀츠도 불러내었다.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자기 내면의 물음에 답하는 과정을 지하철 체험으로 잘 형상화한 글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자기의 그림자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며, 그림자를 의식화해서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갯벌에 깊은 골이 생기듯이 얼굴에 주름살이 있으면 어떠리. 건강하면 내 생의 봄날이니라. 세월이 가면 누가 내게 계급을 달아주겠는가. 잘 살아왔다고, 또 앞으로 잘 살아갈 거라고, 주는 훈장이라 생각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웃자. 공으로 가는 기쁨의 절반은 기다림 속에 깃들어 있다고 하지 않는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내려놓음’과 ‘비움’은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제공한다. 그 자기를 찾아가는 모습의 실체화는 인간이 표현하면서 어떤 인격을 완성해 가는지에 대한 연구가 적다는 차원에서,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인생사를 통해 삶의 진리를 체득하고 있는 이 수필이 수필집의 첫작품으로 장식된 것만 봐도 그녀에게 ‘비움’의 자세가 절실했고, ‘비움’으로 인해 이제 행복을 찾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하겠다.
알 수 없는 없는 게 인생 아니더냐. 설렘으로 기다렸던 봄,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한 뼘과 한 줌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베란다에 히아신스 꽃이 별빛처럼 매달려 웃고 있다. 군자란 꽃대도 근엄하게 내밀고 올라왔다. 누군가가 아닌 온전히 나 자신을 진정 보호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원하는 사람과, 보내는 것이 삶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출했다가 뒤돌아 온 나의 웃음소리를 봄꽃이 데리고 온 게 아닐까. 내 목소리를 들으면 속이 뻥 뚫리고 제일 많이 웃는다던 친구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어봐야지.
- <잃어버린 웃음> 중에서
윤태란의 수필은 인간적인 유대가 확인되는 따뜻한 심성에서 출발한다. 수필쓰기는 자기 속에 내장되어 있는 기억을 불러내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잃어버린 웃음>은 바로 숨어 있는 실체를 파악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수필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의 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개인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유효하게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필은 찬란하고 정결한 정신의 축제라 할 수 있다. 삶을 통한 선택된 체험의 미학적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베란다 히야신스와 군자란의 봄꽃이 잃어버린 웃음을 데려온 것이 아닐까하는 사유가 깨달음을 이룬 작가가 자신의 내부와 만나는 장면을 중계하고 있어 우리는 상상과 연상으로 윤태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상징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기 한계에 직면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건강하게 형성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은 바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림자다. 자신의 그림자를 의식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자신의 인격으로 통합하고자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작가의 탈속적 노력은 현실적인 삶의 가치에 온 힘과 정신을 쏟아 붓는 데서 잘 드러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문학적 향취가 풍겨나는 것이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될 때, 문학적 감동이 찾아드는 것이다. “가출했다가 되돌아 온 나의 웃음소리를 봄꽃이 데리고 온 게 아닐까. 내 목소리를 들으면 속이 뻥 뚫리고 제일 많이 웃는다던 친구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어봐야지.”라는 진술은 매사에 진실되게 참된 자세로 반성적 성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윤태란을 잘 비유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친구에게 최고의 힐링이 된다’는 에토스적 진술은 윤태란의 성격적 특성, 즉 작가의 진실성과 순수성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윤정희가 나오는 영화 ‘시’에서 김용택 시인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보아야 한다고 했다. 맞다. 개구리가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는 멀리 더 멀리 뛰기 위함이 아닐까. 찔레꽃의 향기를 느끼려면 가시에 찔리는 고통이 있더라도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야 짙은 향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꽃향기보다 고운 글에 더 매력을 느끼며 달걀의 흰자가 생명체이고 노른자가 자양분이듯 마음 밭을 가꾸며 나도 어느 지인의 말처럼 글을 쓰고 싶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 놓인 이 길을 운명처럼 여기리라. 맛깔스러운 글을 쓰려면, 고정관념의 틀에서 탈출을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나타나지도 않은 멧돼지에 벌벌 떠는 내 모습이 좀 더 대담해지길 바라본다.
- <고정관념> 중에서
자아가 페르소나와 동일시하여 외부세계의 요구에 잘 순응하면 할수록 내면의 세계, 즉 무의식과는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나타나지도 않은 멧돼지에 벌벌 떠는 내 모습이 좀 더 대담해지길 바라본다.‘는 진술은 그녀의 소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정관념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녀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탈출할 때를 ’지금‘이라고 설정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많이 세웠다는 증거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리라는 다짐이 여러 수필에 자주 나오듯이, 여기서도 작가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각오다. ‘맛깔스런 글을 쓰려면’에 비추어 볼 때 작가는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좋은 작가가 되는 데 두고 있다. 본격수필을 위해 오랫동안 공부를 해온 작가로서 열린 가치를 존중하면서, 현재보다 더 대담해지기를 기대하면서 긍정하는 태도로 건강한 자아를 형성해 가는 모습이 믿음직스럽다.
이 수필의 문학성은 경험의 구체화에 있다. 백미는 마지막 결구 문단에 있는 비유 부분이다. 작가는 “개구리가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는 멀리 더 멀리 뛰기 위함이 아닐까. 찔레꽃의 향기를 느끼려면 가시에 찔리는 고통이 있더라도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서야 짙은 향기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와 같이 주제의식을 비유를 통해 간접화함으로써 문학성을 담으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수필은 전략성에서 문학성의 꽃을 피운다. 가장 독자의 지지를 받는 부분이 치환원리가 아닌가. 본격수필가라면 담론전략을 짤 때,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마지막쯤에 가서 간접화전략, 즉 주제를 제재에 겨누어야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수필의 맛은 아무래도 손맛이 이 아닐까. 자본주의적 욕망이 득실거리는 세상 속에서 순수한 양심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대면하며 건강한 자아를 구축하려는 일만 해도 가치로운 일이다.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것으로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해준 <고정관념>은 작가로서의 소망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라 하겠다.
우리 남매들도 시험을 치룰 때마다 나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매번 어찌 견뎌냈을까. 과정보다 결과에 비중을 더 실었던 나였음을. 미안하다. 사랑한다. 한들 그 때를 되돌릴 수 없지 않은가. 세상에는 당연이라는 것은 없다.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리라. 비록 불합격이었지만, 이력서도 써봤고, 세상 밖의 치열함도 느껴봤고, 이야기 할머니를 계기로 요양원을 찾아가 동화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시작한 내게 박수를 치고 싶다. 처음에 요양원을 방문하던 날, 게시판에 인쇄된 글이 표어처럼 붙어 있었다. “당신도 언젠가는 늙는다. 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보였다. 곧 깨달음과 효에 대한 경각심이 아니었을까.
- <꿈> 중에서 -
위 수필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났듯이 이 수필은 설득의 원리 중 에토스적인 호소력이 짙다. 안분지족의 인생관이 그대로 농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꿈의 실현은 인격 성숙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작가는 국학진흥원이 모집하는 이야기 할머니가 되는 과정에 응모하였다가 떨어지고 대신 요양원에 찾아가 동화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처음의 꿈은 못 이루었지만 차선책을 택해 자원봉사자의 길을 걸어가도 있는 것이다. 성숙을 위한 진통의 순간을 겪을 때, 인간은 차선의 기회를 가질 수 있고, 이를 통해 성숙을 거듭한다.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기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도록 용기있게 남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타자의식을 갖는 작가의 모습이 훌륭하게 비치는 것은 결과에 비중을 둔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 때문이다. ‘당신도 언젠가는 늙는다.’는 말이 작가에게 제일 먼저 보였다는 것 역시 에토스적 설득전략이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최상의 지혜는 깨달음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본질에 천착하는 윤태란은 그래서 인간적이다.
꿈을 이루는 데 있어서 최선에만 집착하지 않고 차선을 택해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자세를 다지는 데도 용기가 있어야 하고, 또 자기 느낌에 솔직해야 한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미로를 여는 열쇠는 자기 마음을 솔직히 들여다보는 데 있다. 윤태란 수필가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로 누구보다도 자기 느낌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녀의 멋짐은 실패한 꿈의 도전기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아름답게 채색하거나 이상자아로 현실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서 나온다. 실패 뒤에 숨어 있는 대안을 찾아내어 그것을 순리와 운명으로 접맥하려는 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언술은 우리 마음 속으로 깊숙이 젖어들어 급기야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어르신을 통해 나를 위한 꿈에 도전해 보리라.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건배사를 외치는 것처럼 ‘당신 멋져’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고 쓴 마지막 결구 문장은 작가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상상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그녀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짐작하게 한다고 하겠다.
가끔 우스갯소리를 할 때 내가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본인들의 생각과 다르면 내숭쟁이라 부른다. 사람과 부딪히며 알아가는 묘한 신기술을 발견할 때, 알곡처럼 여물어가는 내 모습에 박수를 치리라. 요즘은 몰라도 모른다는 말을 안 하고 입을 다문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우스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육십이 코앞인데 오글거려도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내숭 떠는 여자로 한 번 살아볼까. 맞선을 보던 날, 맞선남이 묻는 말에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까닭에 딱지를 맞았다. 그때 내숭을 좀 떨었더라면 내 인생은 토끼처럼 주판알을 튕기듯이 계산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리라. 내숭 떠는 여자가 되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과연 행복했을까.
- <내숭 떠는 여자> 중에서 -
윤태란의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에 비유된다. 그녀는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지 않는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 <내숭 떠는 여자>는 작가의 인품과 덕성이 거울에 비치듯 드러나 있다. 이 수필은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진정한 자기를 솔직히 들여다봄으로써 큰 감동을 준다. 어쨌거나 나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가면을 쓰고 있는 ‘나’를 진정한 ‘자기’라 생각하며 산다. 윤태란은 결코 내숭을 떠는 여자가 아니다. 이 수필은 농담을 순간적으로 알아듣지 못해 즉각적인 반응을 잘 못 하는 자신을 사람들이 내숭이나 떠는 여자로 여기는 데 대한 항의문이다. 이 수필에서 그녀는 자신을 찾기 위한 길고도 험한 길을 떠나고 있음이 확인된다.
진실한 마음을 찾아가고자 하는 것은 잉여 고통을 화두로 삼아서 ‘왜’에 대한 답을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과 부딪히며 알아가는 묘한 신기술을 발견할 때, 알곡처럼 여물어가는 내 모습에 박수를 치리라.’는 진술에서 우리는 그녀가 드디어 자기와 대면함을 본다. 깨달음은 자기 그림자와의 대면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알아가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알아 성숙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고, 즉 단순히 지난날을 되돌아본다고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아니다. 세상이 복잡계라는 걸 체험을 통해 음미하고 재음미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어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인 것이다. 맞선남이 묻는 말에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까닭에 딱지를 맞았던 아픈 기억이 있는 자신을 ‘내숭 떠는 여자’로 보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라는 윤태란 항변과 해명은 “그때 내숭을 좀 떨었더라면 내 인생은 토끼처럼 주판알을 튕기듯이 계산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리라.”란 진술에서 극점을 찍는다.
삶의 순수가 터져 나온다. 순수의 채굴학인 그녀의 수필은 연출이 무의미하다.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은 윤태란다운 면모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수필 속에서 융이 말한 치료자 원형을 본다. 성숙한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의식을 찾아 작가는 여행을 떠나고 있는 셈이다. 글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 이 작품은 마음을 열고 솔직한 일면을 밝혀나가면서 자기 자신을 해명하고 자기를 찾아가는 그 과정을 재미있게 풀어내어 감동을 준다.
2. 존재의 근원을 연 그리움의 미학
윤태란은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하여 주부의 소임을 빈틈없이 처리해나가는 작가다. 그녀의 수필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가족에 대한 지향성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족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 앞에서는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여린 심성의 소유자인 윤태란에게 있어 애정의 대상은 남편을 비롯하여 가족이 전부다. 그 패밀라즘의 귀착지는 가정을 지켜낸 남편이다. 작품 하나하나에 남편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난다. 한마디로 절절한 부부애의 응축물이다. 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올곧은 인성을 소유한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수필들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 지극한 정성, 부부애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짐> 이 입증한다. ‘짐’이 주는 환기력은 대단하다.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강한 문학적 힘을 가진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 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가족을 최고로 여기는 데서 순수가 빚어낸 인간적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고 하겠다. 윤태란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가족의 존재다. 가족간의 우애와 애정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수필 속에 녹아 있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윤태란 수필의 한 축은 자신을 가족에 의지해 지탱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잘 보여준다.
올 해 임금피크제에 들어 간 남편이 손수 짐을 챙겨왔다. 삼십사 년 동안의 직장을 다녔던 짐은 세 박스였다. 그 짐을 보는데 왜 이렇게 허망할까. 예전 같으면 호기심으로 박스부터 열었을 텐데 시선을 회피했다. 차마 열어 볼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 안에 남편의 헌신과 땀, 그리고 눈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스 안에는 가족들이 기념일이나 생일날 보낸 편지가 고스란히 있었다. 힘들고 지칠 때 읽어 보았으리라. 늘 일이 남편을 재촉하며 따라다녔던 세월의 흔적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퇴직을 앞두고 직장에서는 남편의 등을 밀고 종을 치려고 한다.
- <짐>에서 -
직장에서 정년을 맞은 남편의 짐을 보고 쓴 작가의 마음에는 가족을 사랑했던 남편, 남편을 응원했던 자신과 아이들의 마음이 절절하게 녹아난다. 진실로 자신을 믿어주고 밀어주는 가족이 있다면 남자의 인생은, 성공한 삶이다. 이 남자의 인생을 말해주는 ‘짐’은 그녀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아내로 부각시킨다. 정년퇴직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한 여인이 남편의 ‘짐’을 통해서 사랑과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걸 잘 보여준다.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과 인간의 생활 중에서 주요한 소재로 취급되고 있는 ‘사랑’을 테마로 해서 우리 시대 부부상을 다시 반추한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역사에 담긴 퇴직이 아내의 사랑에 버물어져 탄생한 것이어서 공감을 준다. 일상사의 사소함에서 출발된 행복들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임을 밝혀준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함이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부부애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 짐을 보는데 왜 이렇게 허망할까. 예전 같으면 호기심으로 박스부터 열었을 텐데 시선을 회피했다. 차마 열어 볼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 안에 남편의 헌신과 땀, 그리고 눈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는 작가의 짐에 대한 단상이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여운의 맛을 준다. 파토스 전략이 극대화된 이 부분은 섬세하고 세련된 작가의 정서를 잘 담아낸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남편의 짐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다 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신성한 구도자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랑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리라. 직장을 잃은 남편에 대한 측은지심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의 추구다. 남편의 가족사랑을 상징하는 ‘짐’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그것은 곧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건강해야 우리 가족에게 웃음꽃 핀다.’는 명언을 지어냈던 윤태란 작가의 <내 남자>란 수필 또한 부부애가 진하게 내어나온다.
그런 과정에서 남편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맞았다. ‘남편이 건강해야 우리 가족에게 웃음꽃 핀다. 는 명언을 지어냈던 내가 그새 지나간 일을 까맣게 잊었나 보다. 오늘도 나의 눈은 시계의 분침을 노려보며 “너무 합니다. 너무 합니다. 당신은 너무합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남편을 기다린다.
- <내 남자>에서
이 수필의 핵심은 반전에 있다. 남편이 테니스를 너무 좋아해서 테니스공에 질투를 느끼던 작가가 테니스를 치다 다쳐온 남편을 보고 난 후 오히려남편이 운동할 수 있도록 좋은 날씨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재미를 준다. ‘시계의 분침’에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심이 끈적하게 녹아있고, 사랑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부부애와 그리움의 미학을 주제로 하는 수필은 현대사회의 특성상 여성 수필에서 필연적으로 자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이 잘 드러난 ‘내 남자’는 오늘을 살아야 하는 윤태란의 존재이유다. ‘너무합니다.’라는 멜로디는 남편에게 주는 일종의 애교스럽고 아름다운 격려다. 그것은 새로운 권태를 전지하는 진실한 기도이고, 애정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가정에서 남편만 오기를 기다리는 삶,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사랑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기다리는 여심을 현대수필에서 목도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아내라는 위치가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기다림의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필에서 여성의 위치는 가정이며 여성의 임무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위 인용문 앞에는 기다림이 어떻게 해서 자기 인생관이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과정이 놓여 있다. 자신의 반쪽을 기다리며 사는 삶, 시간은 흘러도 그녀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자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부부애를 보여주어 감동을 준다. 주제를 의미화하기 앞서 그런 인생관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시공의 순서에 따라 논리정연하게 서술한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윤태란의 순수와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지금은 참 좋은 세상이다. 요즘은 바닥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 그릇들이 즐비하다. 돈만 있으면 마음에 드는 그릇을 얼마든지 살 수 있지 않은가. 무거운 놋그릇을 꺼내어 닦으셨던 부지런한 어머니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였으리라. 그것을 까맣게 잊고 살아온 나는 어머니를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무쇠처럼 입이 무거우셨던 어머니는 동기간이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녔지만, 그러나 어머니를 대표하는 그 이름표가 나는 정말 싫었다. 마음 상한 일들이 살면서 왜 없었을까. 어떻게 참아 내셨는지. 놋그릇, 그 앞에 서면 어머니의 너른 가슴에 내 좁은 속내가 안개 속이듯 얼비친다.
빨리 데워지고 빨리 식는 요즘의 모든 일상, 유기는 분명히 나에게 어머니의 삶이 수용이나 포용, 그리고 헌신이었다는 걸 가르쳐 준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놋그릇이 눈물을 멈췄다. 빛이 난다. 그 안에 칠 남매가 웃고 있다.
- <놋그릇>에서
<놋그릇>라는 작품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정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수필이다. 현대인들은 자식들에게 능력되면 대학까지 보내주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불편 없이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부모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자식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윤태란은 이런 진리를 ‘놋그릇’이라는 제재를 통해 잘 보여준다. ’무거운 놋그릇을 꺼내어 닦으셨던 부지런한 어머니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였으리라.‘는 모정의 무한한 신비를 보여준다. 어머니와 자식간에 오고가는 사랑의 화음이 감동을 준다. 놋그릇의 상징성에 뭉클한 감동이 드는 것은 모녀지간의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어머니의 인내, 헌신, 포용 정신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모성이 의심받고 있는 현실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집 안의 귀퉁이에 놓인 놋그릇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본다. 그 앞에 서면 어머니의 잔영이 떠오르곤 한다. 어찌 그 영상을 내 부족한 표현으로 다 말하랴. 다만 나는 놋그릇을 보며 그것이 갖는 수용성이라는 관념과 만나기를 바란다. 잿빛을 벗겨내면 찬란한 빛이 깃든 그것은 위대한 모성성을 잉태한다. 그 안에 칠 남매를 별빛처럼 키워내던 어미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는 <놋그릇> 발단부는 윤태란의 문학적 역량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윤태란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모성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잿빛을 벗겨낸 찬란한 빛’을 모성원리의 미학으로 구축한 표현력이 압권이다. 문학성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간접화한다는 점이다.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표현능력일 경우가 많다. 윤태란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문학성이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적 성취를 담보해 주는 것이다.
전봇대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전신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전봇대의 두 기둥이 전선을 지탱하며 우리 시골에 환한 불빛을 선사하듯이 아버지는 가정의 등불이 아닌가. 말없이 그저 한 곳만 바라보면서 자신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전봇대를 보며 유년 시절의 추억을 그려보면 행복이 전신주를 타고 오는 불빛 같아 더욱 마음이 밝아진다.
- <전봇대> 중에서
유년시절의 추억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윤태란 문학의 본령이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 수필 속에도 본능적으로 과거에 대한 추억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귀소성이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속성이다. 작가는 찬란한 유년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지금은 결혼을 해서 서울에서 살다가 딸이 먼저 자리를 잡은 세종으로 이사를 갔다. 수필 속에는 식물성적인 고향 노래의 향연이 다채롭다. 어머니가 나오면, 연이어 아버지가 나온다. 그만큼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증거다. 인간은 누구나 추억의 긍정효과에 대한 믿음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문학가가 되고 문학성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많은 작가에게 향토적 소재는 벗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아버지의 헌신을 전봇대에 견주어 형상화한 저력에 박수를 보낸다.
“말없이 그저 한 곳만 바라보면서 자신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전봇대를 보며 유년 시절의 추억을 그려보면 행복이 전신주를 타고 오는 불빛 같아 더욱 마음이 밝아진다.”는 작가는 이 수필에서 아버지를 전신주의 불빛으로 묘사해 두어 공감을 자아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전봇대는 두 팔을 벌려 말없이 전선을 잡아준다. 검은 나무 전봇대는 무거우나 가벼우나 전선을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라는 묘사로 그녀는 아버지의 헌신을 압축해서 간접화하는 문학적 역량이 드러낸다. 추억의 뒤안길에서 만나는 전못대를 메타포로 작용하게 한 수법도 대단히 전략적이다. 윤태란의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부모님의 숨소리와 그의 맥박,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자식의 도리를 다 하는 것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옛날 아버지는 오빠를 초등학교 삼학년 때 도회지로 전학을 시켰고 농사일을 전혀 시키지 않은 터라 지게를 지고 하는 일은 해보지 않았다. 오빠에게 왜 힘든 일을 혼자 했느냐고 여쭤보니 바쁘게 사는 동생들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오빠도 어느새 부모님을 닮아가는 걸까. 오빠 혼자서 무거운 돌을 지고 수십 번 언덕을 오르고 내리고 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한 때는 사업 실패로 부모님 걱정을 끼치게 했던 오빠였기에 마음이 더 아팠는지도 모른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도 지난 일은 훌훌 털고 오로지 건강만을 빌고 계실 것이다. 몸에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태양과 씨름하며 온 몸을 땀으로 적셔 혼신을 다 하던 오빠의 무거운 짐을 모두 다 내려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오빠와 지게> 중에서
이 수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동기간의 우애를 읽어내는 것뿐만이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잘 모르고 있었던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짜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고향 소재의 발견은 의의가 있다고 보겠다. 윤태란 수필에서 발견되는 고향을 공간으로 한 인물 소재 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치는 작가의 휴머니즘뿐만 아니라 삶의 반성적 성찰대 위에 자신을 세우는 데 있다. “검게 타버린 얼굴이며, 보드랍던 손바닥은 거북이 등처럼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였다. 새삼 뜨거운 애정으로 보듬고 싶은 오빠다. 나를 사랑해주는 오빠의 손만 꼼지락 꼼지락 잡고 아무 말도 못했다. 오빠가 힘들 때 위로가 되지 못했던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싶을 뿐이다. 지금껏 내 마음을 전하지는 못했었지만, 이제는 손수 만든 지게를 받쳐주는 작대기가 아닌 우리 칠남매를 화목케 하는 버팀목으로 남고 싶다.”는 다짐은 완고할 정도의 오빠에 대한 애정이며, 자기를 실존케 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 있다.
윤태란은 자신을 껴안아 자신을 배반하지 않는 모습으로 오빠의 지게 앞에 서있다. 현실이 각박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지게에는 오빠에 대한 애정의 향기가 서려 있다. 그 시간과 공간에서도 반성적 성찰과 깨달음이 빠질 수 없다. 작가는 가족과 산소를 다녀온 후, 오빠가 맏이로서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 수필 <오빠와 지게>에서 우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따뜻한 인정이요, 휴머니즘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이다. “오빠에게 왜 힘든 일을 혼자 했느냐고 여쭤보니 바쁘게 사는 동생들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동기간의 관계 속에서 얻은 체험을 ‘지게’라는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미적 감동을 준다. 이렇게 따뜻한 온기를 지니지 않고서 어찌 감동을 주는 한 편의 수필을 쓰겠는가. 동기간의 정은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게’는 그러한 의미에서 윤태란에게 고향이고 아버지다. 발길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삶의 자양분을 키워 준, 궁핍한 시대의 은혜로운 인정과 우정이 깃든 곳임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윤태란이 귀소적 회귀 심리 속에서 고향을 못 잊어 그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 수필은 ‘지게’를 제재로 휴머니즘을 담아낸 수필이라고 하겠다.
그 모습을 지켜 본 남매가 엄마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다. 새로운 것에 눈 맞춤하며 아름다운 자연과 친구가 되어 세상이 내 것인 양 활보를 할 터인데 당연한 일 아닌가.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나의 영원한 집이 아니다. 얼마 동안 머무르다가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한 때의 거처가 아닌가. 이 육체도 나의 영원한 몸이 아니라 언젠가는 벗어 놓아야 할 일시의 육이리라. 여행을 앞두고 인간은 지상의 나그네라는 생각이 찾아든다. 장단 소리에 추임새를 넣어 부르면 더 노래가 감칠 만나듯이 나 또한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가방만 보아도 배부른 것 같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여행 끝나는 날에는 아름다운 여행이기를 소망하지만 슬프고도 아픈 여행이었어도 뒤돌아보면 지우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되리라 믿는다. 짧고도 긴 아름다운 추억 여행을 앞두고 인생은 여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가방> 중에서
여행을 떠나는 기쁨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전업주부에게 집을 나서는 여행만큼 즐거운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사실을 이 수필은 잘 보여준다. 인생은 떠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여행은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 있다. 여행은 곧 그녀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에서 여행으로 얻는 기쁨이 잘 드러난다. 여행에 대한 이러한 설렘을 ‘가방’이라는 제재로 풀어낸 것이 문학적 성취를 빛낸다고 하겠다. 안 가본 곳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본향이다. 작가는 여행이라는 화두를 통해 현실 그리고 일과 자아 사이에서 괴로워하지 않고 현실에 방점을 찍으며 여성 정체성을 확보하는 모습에서 당당한 주부의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여느 여성 작가와 다르게 ‘기다리는 여심’으로 평생을 젖어 살 수밖에 없는 전업주부 아내이지만 이러한 유럽 여행에 대한 기대와 정열은 가정사의 단조로움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떠남은 그러한 의미에서 윤태란에게 위안이 되고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이 된다. 남편에게 당당한 아내, 아이들에게 떳떳한 어머니로서 비명을 지르며 행복하게 사는 일상의 모습을 그리며, 삶을 즐기는 모습이 현대적 어머니를 연상케 한다.
윤태란의 글은 한 여름 밤, 범부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시원한 찬물처럼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일상적이고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삶을 투시하는 그녀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에는 따스함과 순박함이 병존해 있어서 정감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가정이란 울타리를 축으로 해서 따뜻한 가족애가 작품의 주조적 테마로 자리 잡고 있는 그녀의 수필 구석구석에는 <목의>처럼 사랑의 향기가 따스하게 물결치고 있다. 이외에도 주옥같은 작품들이 즐비하다. <공>, <호박>, <쓸개>, <틈>, <오월단상>, <소리>, <아버지의 틀니>, <제발>, <뒷모습>, <주문> ,<초대>, <살다 보면> 등은 소박하고 담백한 문장들이 주는 손맛과 파토스적 호소전략이 주는 감성자극이 주는 품맛이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III. 나오며
이상으로 윤태란 수필세계를 소상하게 살펴보았다. 그녀의 수필은 우선 건강하고 맑다. 신선하고 순수하다. 고뇌보다는 희망이 있고, 분노보다는 이해가 있고, 질시보다는 인정이 있다. 이기적인 본성보다는 이타적인 사랑이 녹아 있다. 그녀의 글은 하나같이 잔잔한 모습이다. 윤태란 수필을 읽는 맛은 여기에 있다. 지식이나 관념의 노래라기보다는 일상의 소중한 체험에서 개성화를 이룬 글이기에 그녀의 수필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향기가 풍긴다는 게 강점이다. 자신을 반성적 성찰대 위에 세우며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순명의 정신이 물결치는가 하면 인정의 넉넉한 품이 있어 좋다. 세상을 긍정하는 마음,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통찰을 통해서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를 통합하는 작가의 예지는 우리들의 메마른 공명상자를 울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보여진다. 가족의 사랑이 충만하기에 글에서 행복의 여운이 느껴진다. 이 수필집은 자기성찰로 시작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찬연한 꽃을 피우고 있다. 모든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비움의 미학은 그녀의 수필을 포근한 어머니의 치마폭처럼 따스하게 한다.
수필집 「당신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동사의 목적어로 놓고」는 그녀의 첫 번째 수필집이다. 첫수필집이라는 깃발을 당당히 들고 본격수필의 길에 나섰으니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좋은 놋그릇을 잘 닦아나가기를 당부하고 싶다. 이만한 품격을 갖춘 것은 그만큼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수필은 수필적인 생활에서 찾아지는 법이다. 비움에 대한 소중함을 그려내는 수필에서부터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수필까지 다양한 세계를 확보하고 있는 그녀의 수필 영토를 작가적 삶에 연계시켜보면 그녀의 긍정적 인생관과 비움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다. 모범적인 주부로서 누구보다도 순수함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족사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작가의식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그녀의 문학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아무쪼록 이 수필집 발간을 계기로 해서 더 큰 작가로 성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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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동아대) 명예철학박사(대신대학원대)
88년 월간 <동양문학> 등단,
<경북신문>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및 수필 부문 당선
2000 중국연변대 초청 수필특강(중국 연변)
2016 국제PEN한국본부 토론토지부 초청 문학특강(캐나다 토론토)
2016 미주 중앙일보 주최 문학특강(미국 달라스)
2018 해외한국문학학술강연 (영국 런던)
2018 미주 중앙일보 주최 문학특강(미국 달라스)
2019 한국문협 인니지부 초청 특강(인도네시아 자카르타)
2021 미주 LA한국문인협회 초청 문학특강(로스엔젤리스)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
현)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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