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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역린을 뽑아 화병을 평강으로>의 줄거리:
용의 목에 거꾸로 붙어 있는 비늘인 역린(逆鱗)을 건드리면 용이 분노로 길길이 날뛰면서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린은 군주의 분노 또는 군주가 분개할 만한 그의 약점을 가리키며 동시에 건드리면 반드시 진노를 사서 살해됨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용을 옛 뱀, 사탄 마귀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마치 용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 듯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십자가가 아니면 제거할 수 없는 역린이 있습니다.
역린을 뽑아 화병을 평강으로
(예레미야 26:1~24)
8.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9.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10. 유다의 고관들이 이 말을 듣고 왕궁에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 여호와의 성전 새 대문의 입구에 앉으매
1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고관들과 모든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사람은 죽는 것이 합당하니 너희 귀로 들음 같이 이 성에 관하여 예언하였음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역린을 뽑아 화병을 평강으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역린을 뽑아 화병을 평강으로’
고대 중국의 사상서인 한비자(韓非子)의 세난(說難)편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세난’이란 간단히 말해 ‘설득의 어려움’이라는 뜻입니다.
“용이라는 동물은 온순해서 길들이면 올라타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목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만일 그 비늘을 건드리면 용을 길들인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죽는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군주를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아야 설득을 기대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군주를 설득하여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할 때는 군주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충정어린 마음으로 지혜로운 전략을 이야기할지라도 그것이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면 분노를 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로 든 용은 실재하는 짐승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용을 사탄, 옛 뱀, 마귀로 칭하고 있습니다만 동양에서는 용을 상서로운 짐승으로 여깁니다. 동양에서 생각하는 용의 몸은 81개의 비늘로 덮여 있다고 합니다. 이 비늘 중에서 하나가 목 부분에 있는데 방향이 반대라고 합니다. 다른 비늘은 꼬리 쪽을 향해 누워있는데 이 목에 있는 비늘만큼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이 목에 있는 거꾸로 난 비늘은 굉장히 민감해서 건드리게 되면 용은 분노해서 날뛰다가 심지어 용을 길들인 주인이라 할지라도 죽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나온 역린(逆鱗)이라는 표현이 군주의 약점이나 치부를 일컫는 관용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역린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명종 때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경상남도의 유학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1548년부터 1555년에 걸쳐서 명종이 내린 벼슬을 계속 거부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문정왕후가 12살에 즉위한 명종을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명종이 20살이 되어서 친정을 펼칠 때에도 문정왕후와 외척세력들의 전횡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때에 조식 선생이 모든 벼슬을 거부하고 상소를 올립니다. 그 때에 문정왕후에 대해 “궁중 깊이 거하는 한 과부의 지혜가 어떻게 수백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감당할 수 있으며 억만 갈래로 갈라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문정왕후가 명종에게는 항상 역린이었습니다. 이 상소로 인해 대노한 명종은 조식 선생을 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말려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린은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쥔 군주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당장 앙갚음할 수 있는 힘이 없는 능력이나 신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심지어 노예일지라도 역린은 있습니다. 요새 갑질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아랫사람의 역린을 부당하게 자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역린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랫사람은 화를 내거나 앙갚음을 할 처지가 아니기에 참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마음에 쌓여서 화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분노가 생겼는데 분출할 곳이 없어서 삭히기만 할 때에 화병이 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에 창씨개명을 정당화하거나 또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주장할 때에 한국 사람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한편 일본에도 역린은 있습니다. 그들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려 할 때마다 일본은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것이 정당하든지 정당하지 않든지 역린이 된 이상 건드리면 분노하게 됩니다.
앞서 보았던 한비자에서는 타인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내 입장에서 나의 역린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의 역린을 처리하는 방식도 무척 중요합니다. 내가 늘 짜증을 낸다면 속에 화가 차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건드리기만 해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이 불쑥불쑥 튀어 나옵니다. 본래 성격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그 속에 화가 있으면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게 됩니다.
심지어는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분노와는 방향이 반대인 것 같지만 실은 같은 맥락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내가 꼭 지키고 싶어 하는 소중한 것이 있는데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불안합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수 없고 누군가 침해하려 한다고 여길 때에 두려워합니다.
마치 마음에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불안하고 불만이 차있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조그마한 일에도 견디지 못해서 불쑥불쑥 화를 내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 마치 지옥에서 사는 것 같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린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을 보면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동양의 용과 성경에서 말하는 용을 비유적으로 서로 연결시켜보면 사람은 사탄의 자녀로 살아가는 동안에 용의 역린을 가지게 됩니다.
가스레인지를 보면 가스에 불을 붙이는 점화플러그가 있습니다. 이 역린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해 불을 붙게 만드는 점화플러그입니다. 역린이 용의 목에 달린 방향이 반대인 비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에 꾐에 빠져서 마귀의 자녀처럼 살아가게 된 모든 사람은 이런 역린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역린을 뽑지 않으면 건드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에서 불평불만이 생겨나게 하고 억울함과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두려움과 불안을 생겨나게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화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역린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때가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의 하나였으리라 예상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모일 때에 성전 뜰로 들어가는 문에 서서 예언을 했을 것입니다. 이 예언을 들은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은 분노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를 보면 같은 내용의 예언을 한 우리야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예언활동으로 인해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애굽으로 피신을 갔지만 그곳에서 잡혀서 본국으로 연행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우리야처럼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살해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오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장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에게 맞섰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본래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백성 편에서 하나님과 백성을 중재하는 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예언을 받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대적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바로 앞서 보았던 역린의 이야기와 연결이 됩니다. 역린을 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린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분노해서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예레미야가 이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역린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당시에 남 유다는 므낫세 왕과 그 아들인 아몬 왕의 시대를 거치며 57년 동안 극심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이 기간을 거치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심각한 왜곡현상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성과 성전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과 성전의 본래 의미가 퇴색하고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선민으로써 어떤 삶을 살아가든지 성전만 건재하다면 유다 나라와 예루살렘성은 지켜지리라는 믿음입니다. 성전으로 인해 개개인의 삶과 민족의 번영이 보존되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심지어 과거의 기적들까지 미신화 시킵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하기 120년 전쯤인 BC.701년에 히스기야 왕 시절을 일을 떠올려봅니다.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침공이 있었던 때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옴을 통하여 하룻밤 사이에 산헤립의 군대 십팔만 오천 명이 멸절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호사밧 왕 때에도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에게 침공을 당했을 때에도, 왕이 성전에서 금식하고 선지자의 말씀을 따라 찬양대를 앞세워 나갈 때에 적들이 자멸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성전을 미신화 시키는 용도로 사용하여 백성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이들의 설교의 핵심은 성전 건물이 건재하고 백성들이 끊임없이 제사를 드린다면 나라는 번영할 것이고 개인의 삶도 지켜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철밥통을 지켜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막이 있었기에 이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례미야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성과 성전은 이러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민들의 마음을 올곧게 지켜내기 위해 필요로 여긴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반드시 지켜져야만 했고, 모든 유다 백성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헌금을 내는 일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나타나서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으니 이들의 역린을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용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용은 대노합니다. 역린을 건드린 예레미야를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예레미야에 대한 분노이기에 앞서 하나님을 대적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역린이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특별히 내 삶에 주어진 땅의 가치들 중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역린이 됩니다. 이것을 건드리려하고 침해하려하고 이것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어서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다 주려는 모든 것들이 적이 됩니다. 역린을 자극당한 용이 심지어 자신을 길들인 주인조차 죽이려는 것처럼 하나님마저 대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레미야를 죽이려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대적함이 드러납니다.
요점은 역린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게 주어져 있는 것들 중에서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것을 건드리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어미 곰에게는 새끼 곰이 역린입니다. 새끼 곰을 건드리려고 하면 어미 곰은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나를 어미 곰처럼 화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은 나를 극도로 억울하게 하거나 분노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역린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주어져 있는 것들 중에서 지켜야 될 것이 있을 때에 심지어 자존심이나 미래의 노후까지도 역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역린을 자극하는 대상들에 대해 실제로 앙갚음을 하지 못할지라도 화가 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의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듯이 역린을 드러내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입니다. 성전과 예루살렘성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는 철밥통이었습니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한 신념체계로 여호와 신앙을 이용한 것입니다. 성전 건물이 건재하고 제사와 헌금을 통해 충성한다면 나라와 가정이 망하지 않으리라는 맹신을 만들고는 철밥통을 유지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이 땅에 주어진 것들은 비록 성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목회의 성공입니다. 목회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마음에는 항상 화가 머물고 있습니다. 기쁨과 감격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교인 수를 늘리고자 할 때에 교인들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 피해가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이 땅에서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있고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제사장과 선지자들처럼 이런 것들을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목회를 성공시키려고 합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지키고 싶어 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만 건드리지 않으면 그래도 참아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역린을 향하여 십자가는 전해지고 있고 바로 그 역린을 뽑기 위해 직접 공략합니다. 역린이 있는 한 마음에 평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항상 불안하고 두렵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고 짜증이 납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상황이나 사건이나 사람을 통해 어떻게든 건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이라면 부부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부모자녀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 목숨 나라 건강 재산 등을 비롯해 추상적으로는 자존심에 이르기까지 내가 지켜야 할 것이 아닙니다.
강릉의 경포대를 가면 특이한 조형물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얼굴을 내밀면 그 조형물의 일부가 된 것 같이 사진을 찍게 해둔 곳이 있습니다. 멋진 사람의 몸을 만들어 놓고 얼굴만 내밀면 그 사람처럼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내가 만들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얼굴만 내밀고 내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결코 내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통령이나 정치인이나 군인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실은 하나님이 지키고 계십니다. 결혼해서 30년, 40년, 50년 이혼 안하고 잘 살아온 이유는 부부십계명을 잘 지켰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살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건강을 지켜왔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지키는 것은 내 것일 때에 성립하는 말입니다. 실은 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만 지킨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시편 127편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배우자를 붙들고 또 배우자가 나를 붙들어서 부부관계가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부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지켜졌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켜야하고 또한 지켜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남자 내 여자라고 생각할수록 버틸 수가 없어서 이혼해버리고 맙니다. 재산도 마찬가지고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마음 하나뿐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깨끗하게 지켜내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자녀 배우자 재산 건강 등이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건강에 이상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건강을 지키겠다고 달려듭니다. 그런데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가자 이것이 역린이 되어서 마음을 불안하고 화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병을 주실 수 있냐며 불평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음을 깨달았어도 마음을 하나님의 자리로 지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지켜내실 것입니다. 목숨도 마찬가지고 재산이나 가정도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마음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마음에서 승진을 받아들이고 나면 역린이 됩니다. 승진이 안 되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납니다. 뜻대로 승진을 해도 기쁨은 오래가지 않기에 또 다른 승진을 바라게 됩니다. 지켜내고 싶은 것과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역린이 되어서 나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지키고 싶어 하는 것들 대신에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역린을 뽑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사실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이 지켜집니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어떤 것이라도 마음에 끌어들여 지키려 한다면 역린이 됩니다. 역린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 대신에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죽은 나에게는 세상 것이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장소로 마음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죽은 마음이 되면 세상 것들은 하나님의 뜻이 지키십니다. 심지어 명예나 자존심까지도 지키려하지 마세요. 나의 명예나 자존심을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기대하면 또 그것이 역린이 됩니다. 죽었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은 하나님을 모실 수 있도록 지켜져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지킴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재산을 지키는 자들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재산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건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건강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를 통해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보전될 수 있습니다.
역린을 뽑아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면 역린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신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용의 자녀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린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뽑힐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지켜가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유지해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이 세상에서 지키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사실을 지켜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역린을 뽑고 화병에서 평강으로 바뀌는 삶을 오늘 하루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에서 지키고 싶어 하는 역린을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지킴으로써 뽑아버리게 해주셔서 짜증과 화가 가득한 마음에 하늘의 평강이 채워짐을 실제로 느끼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