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묘왜변(乙卯倭變)
을묘왜변(乙卯倭變)은 조선 명종 10년, 왜구가 침입하여 1555년 6월 9일(음력 5월 11일)부터 7월 25일(음력 6월 27일)까지 현 전라남도에 있었던 여러 군현들을 유린하고 제주도를 약탈거점으로 삼고자 공격한 사건이다. 왜선 70척에 5~7천명 규모로, 당시 조선이 건국된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왜구의 침입이었다. 당대 방비의 허술한 점을 보여준 사건이다.
조선 정부는 삼포왜란(1510년)과 사량진왜변 등 변란이 있을 때마다 왜인들의 세견선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이에 왜인들이 교역 규모가 줄어들고 생활필수품이 부족해지자 통교의 확대를 요청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응하지 않았다. 1544년(중종 39년)에 일어난 사량진왜변을 계기로 조선은 대마도인의 통교를 금지하였다. 그 후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요청을 받아들여 1547년(명종 2년) 정미약조를 맺고 다시 통교를 허용하였는데, 이전보다도 대마도의 통교에 대한 규정이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호족들이 세력 다툼을 하던 전국시대로, 국내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워 실정막부(室町幕府, [무로마치 바쿠후])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일본 서부 지방에 사는 연해민들이 조선과 명나라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아 국제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데다, 혼란한 일본의 국내 정세 속에서 왜구가 조선의 연안을 대규모로 침입하여 약탈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조선 정부의 통제에 불만을 품은 왜구는 1555년 5월 11일 명나라 해안에서 노략질을 하고 돌아가다가 조선의 해안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70여 척의 병선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이진포에서 달량포까지 동서로 나누어 상륙하여 인가를 불태우고 약탈하는 한편 달량성을 포위·공격하였다.
▲ 1차 침공
1555년 5월 16일(음력), 전라도관찰사 김주(金澍)로부터 '5월 11일에 왜선(倭船) 70여 척이 달량포(達梁浦)(현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梨津浦,어란포?)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 아래의 민가를 불태워버렸고 결국 성이 포위되고 말았다.'는 내용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왔다. 이에 의하면 왜구들이 해안가로 상륙해서 행패를 부리자, 13일, 가리포수군첨사(加里浦水軍僉使) 이세린(李世麟)이 즉각 전라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원적(元績)에게 이를 알려서 원적이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영암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그를 구원하려고 달량포로 달려갔다가 포위된다. 원적과 한온은 달량포에서 버티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왜구에게 화친을 제안했지만 죽임을 당하고 이덕견은 항복하는 척 하다가 도망친다. 그렇게 해안가 일대가 순식간에 장악당하고 만다.
병마절도사의 정예군이 격파당하자 당시 각지를 지키던 장수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조정에서는 급히 이광식(李光軾)을 후임 병마절도사로,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순찰사로, 김경석(金景錫)은 전라우도방어사(防禦使), 남치근(南致勳)은 전라좌도방어사로 각각 임명하여 내려보내고 이준경의 형인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도 이에 합세하도록 한다. 또한 금군(禁軍) 등 수도 한성부의 정예군을 동원함과 동시에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 (공을 세우면 면천시켜준다는 조건으로) 공사노(公私奴), 승려들 또한 징집하였다.
전라도 병마를 책임지는 전라병사 원적이 전란 초반에 전사하고 수군과 각 군현들마저 연전연패하면서 지휘관을 잃자 병사들은 도망가면서 전황은 급격히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강진만으로 들어온 왜구들은 이후 강진, 병영, 장흥을 차례로 침탈하면서 영암 땅을 향하고 있었는데 포로가 된 영암군수 이덕견을 대신하여 가장(假將)으로 무예에 재능이 있던 전주 부윤 이윤경(李潤慶)을 파견하고, 전라우도 방어사 김경석과 전라좌도 방어사 남치근이 함께 영암에 진주하게 하였다.
이준경의 지휘로 영암성 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쳤지만, 일선 장수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다. 왜구는 퇴각하면서 26일에 강진현을 습격하는데, 강진현의 장수가 그냥 도망침으로써 함락된다. 이 장수는 조정에 "부하들이 명령을 듣지 않사옵니다."라고 거짓 장계를 올리고 이에 기세가 오른 왜구가 "이 길로 바로 한성까지 가자!"라고까지 한다. 27일에는 가리포를 습격하였는데, 이세린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여겨 산으로 올라가 항전하였지만 곧 함락된다.
다만 사태가 확대되지 않은 데에는 여타 장수들의 공도 컸는데, 당시 나주를 거쳐서 북상하려는 왜구는 이흠례(李欽禮) 등에 의해 격퇴당했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최종호(崔終浩)가 나로도(현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섬)에 정박한 왜구들을 견제하여 경상도까지 전장이 확대되는 걸 방지하였다.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녹도(鹿島)(현 전라남도 고흥시 도양면에 있는 소록도로 추정)를 습격하였는데, 흥양현감의 보고를 받은 남치근이 대군을 이끌고 가자 포위를 풀고 금당도(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에 있는 섬)로 도망간다. 남치근 등이 이를 쫓자 이번에는 보길도(현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있는 섬)로 도망간다. 남치근이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하여금 이를 또 쫓게 하자 마침내 왜구는 완전히 퇴각한다.
을묘왜변 1차 왜구 침략로
▲ 2차 침공
1차에서 전라도를 약탈, 유린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왜구는 같은 해 6월 1차때와 같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도를 침략했다. 1차의 단순한 약탈이라는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는 중국인 왕직이 대두목 중 하나로 참여하는 등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라도-제주도-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1552년 7월에 왜구는 제주 동쪽 천미포에 상륙해 2일 동안 조선군과 교전을 벌여 왜구를 격퇴하기는 했지만(천미포 왜란) 당시 제주목사 김충렬(金忠烈:1550~1552)과 정의현감 김인(金仁)은 이들을 막지 못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고 제주목사와 정의현감으로는 남치근(南致勤:78대, 1552~1555)과 신지상(愼之祥)이 부임하였다. 여담으로 제주목사 남치근은 1554년 5월에 천미포 인근에 정박한 왜인 10명 가운데 한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당시 비변사에서는 "때맞추어 추격하여서 한 놈을 쏘아 맞추어 참획하였으니 그 공로를 논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남치근에 대한 포상을 주장했지만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혹평하였다.
절해고도인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던 왜구는 전라도 남해안 일대를 침략해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다가, 퇴각하던 중 1555년 6월 1,000여 명이 선박 60여 척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하였다. 이후 3일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제주민과 왜구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79대(1555~1557) 제주목사였던 김수문(金秀文)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협력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는데, 여기에는 김성조·김직손·이희준·문시봉의 이른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공이 컸다. 당시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 실상을 전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 1555년(명종 10년) 6월 28일: 제주목사 김수문이 급히 장계를 올리기를 "이달 21일에 왜선 40여 척이 보길도(甫吉島)에서 바로 제주 앞바다로 와 1리가량의 거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습니다"라고 했다.
-1555년(명종 10년) 7월 6일: 제주목사 김수문이 장계를 올렸다. "6월 27일, 무려 1000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효용군(驍勇軍)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했으며,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로위 김직손(金直孫), 갑사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재차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한 왜군 장수가 자신의 활 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 김몽근(金夢根)이 그를 쏘아 무너뜨렸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했으므로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상륙한 왜적들이 진을 친 곳으로 김수문 제주목사가 날랜 군사 70여 명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가했다. 곧이어 김직손, 김성조 등 4명의 치마돌격(馳馬突擊)이 왜적을 무너뜨렸고, 김몽근이 적장을 쏘아죽임으로써 왜적은 퇴각했다. 승세를 잡은 아군이 왜적을 추격하며 다수를 참획했다. 이에 명종은 김수문의 벼슬을 올려주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치마돌격대에게는 건공장군의 벼슬이 제수되었다
을묘왜변 2차 제주대첩<탐라순력도-한라장촉>
여담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전투는 74명으로 13배가 넘는 1,000여 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첩이다. 심지어 저 74명 중 70명은 치마돌격대의 엄호와 적군 견제 역할이였고, 실제로 적진을 누비며 싸운 건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의 치마돌격대였다. 사실상 74명 VS 1000명이 아니라, 4명 VS 1000명이였단 소리. 물론 이는 기병 VS 보병 간 싸움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이렇게 침입한 왜구를 토벌한 뒤 조선 조정은 대마도에 대한 무역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강경책을 썼다. 그러자 그 해 10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해안가를 습격했던 왜구들의 목을 잘라 보내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한다. 왜구들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조정에서는 이전과 다른 대규모 침략에 대비하고자 제승방략을 도입하고 비변사를 상설화하였다. 특히 3정승과 공조 판서를 제외한 5조 판서, 각 군영 대장, 국경 지방 관찰사, 강화 유수 등이 모두 참석한 비변사는 이후 권한이 점점 막강해져 세도 정치 때에는 다른 모든 기구를 초월한 강력한 부서가 되어버렸다.
▲ 을묘왜변에 관련된 의령남씨 선조
- 남치근(南致勳) : 충경공 충간공 간성공파 10세 -전라좌도방어사 , 1555년 5월 20일경 1차 침공
<참고문헌>
나무위키-을묘왜번
위키실록사전-을묘왜변(집필자:한문종)
왜구토벌사, 국방군사연구소, 1993.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김병하, 「을묘왜변고」, 『탐라문화』 8, 1989.
윤성익, 「‘후기왜구’로서의 을묘왜변」, 『한일관계사연구』 24,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