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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행이 악행보다 훨씬 쉽다>의 줄거리:
선행상이 있습니다. 선행이 얼마나 귀하면 상까지 주는 해프닝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착하고 어진 행실인 선행이 있고 악독한 행위인 악행이 있고 이런 판단으로부터 중립적인 그냥 삶을 위한 행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선행 아니면 다 악행입니다. 그리고 선행이 훨씬 쉬운 이유는, 쭉 쉬면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행이 악행보다 훨씬 쉽다
(누가복음 6:6~11)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선행이 악행보다 훨씬 쉽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선행이 악행보다 훨씬 쉽다’
선행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행이 얼마나 귀하기에 상까지 줘야하는지 일종의 해프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악행을 하게 되면 상 대신에 벌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상이 주어져야 할 선행과 벌이 주어져야 할 악행이 있기 때문에 그 중간에는 상을 줄 필요도 없고 벌을 내리기에도 마땅치 않은 행동들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상 줄 일도 아니고 벌 줄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중립적인 행동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중립적인 행동을 하다가 간혹 선행을 하면 상을 받고 악행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상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리와 복음에 입각하여 볼 때에 사람의 행위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선행이거나 악행입니다. 그리고 선행은 상을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악행에 비해 무척 쉬운 일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악행을 한 사람에게 벌을 줄 때에는 “참 어려운 일 하느라고 수고는 했지만 그것이 악행이기에 벌은 주겠다.”라고 하는 것이 정상일 정도입니다. 이처럼 선행은 본래 악행보다 훨씬 쉬운 일입니다.
선행에서 중요한 것은 선행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을 이루는 것입니다. 조건만 맞으면 선행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흐르듯이 나오게 됩니다. 삶을 선행의 열매로 가득가득 채워가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고 복지의 삶입니다. 한편 선행이 아니면 다 악행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중립적이라고 생각해 온 모든 일은 실은 악행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행의 특징은 사람을 어렵고 힘들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선행은 하면 할수록 신나고 즐겁습니다. 이런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쉽다 어렵다는 말이 나오니까 좁은 문과 좁은 길, 넓은 문과 넓은 길에 대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라는 소설도 그런 상식적 그릇됨에서 파생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의 특징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을 뿐 가기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한편 넓은 문과 넓은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닐 뿐 쉬운 길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넓은 문과 넓은 길은 찾기가 쉬울 뿐 가는 길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찾기가 어려울 뿐 가는 길이 어렵다는 것은 아닙니다. 좁은 길이 오히려 신바람 나는 길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1장 28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쉬면서 행동하는 것이지 쉬엄쉬엄 일하며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쉼이 유지되는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과 연관하여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선행은 쉬면서 하는 일이기에 쉽습니다. 반대로 쉼 없이 하는 일이 악행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쉼이 지속되는 것이 안식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본문에서도 안식일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께서 안식일과 행함을 연결시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본래 안식일과 행함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연결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안식일에는 행함 즉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허용치 않는 것이 안식일의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안식일의 의미와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따지고 보면 선행과 악행은 안식일에만 문제시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평상시에 엿새를 사는 동안에도 항상 선행과 악행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악행은 하지 말아야 하고 선행은 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선행을 안식일의 의미와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보십니다. 오른손이 말랐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왼손잡이인 분들도 계시지만 오른손은 주로 일을 하는 손으로 여겨집니다. 즉 삶을 위해 필요한 인간의 행동 전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손이 말랐다는 것은 피가 흐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기에 근육과 살이 빠진 앙상한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깨에 뼈만 매달려 있는 상태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황으로부터 예측컨대 이 사람의 병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치시면서까지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을 유발하실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긍휼한 마음이 드셨을지라도 하루 참으셨다가 고치셨다면 바리새인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실 필요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선행이 언제나 행해야 될 일임을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선행이 안식일뿐만 아니라 나머지 엿새 동안에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조건이 채워지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는 악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긍휼하심으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상태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상징으로 삼으셨고 이를 고치심으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셨습니다.
손이 말랐다는 것은 아무런 행위를 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좀 더 확장시키면 행위는 마음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즉 생각과 말과 행동 전체가 선행이 나타날 수 없는 상태의 상징인 것입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영적인 의미에서 손이 마른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선행도 나타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안식을 누릴 수 없다면 하는 행동마다 악행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에 따라 선행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선행입니다. 반대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가운데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악행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안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식(安息)은 평안할 안(安)에 쉴 식(息)을 써서 말 그대로 편히 쉬는 것입니다. 쉼이라는 단어로 안식의 개념을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이해가 쉽습니다.
안식을 누리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선행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는 악행입니다. 따라서 삶이 힘들고 지치고 어려운 이유는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악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쉼은 진행되고 있던 일의 완성 뒤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 번에 최종 목표까지 도달하지는 못할지라도 과정 중의 한 단계라도 끝나야 쉴 수 있습니다. 축구도 전반전이 끝나면 쉬고 후반전까지 끝나면 지든 이기든 쉬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쉼은 일이 끝나든지 중단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자녀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진학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3년 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며칠이라도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푹 쉬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쉼에 앞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에는 공통적인 속성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속성 때문에 일하고 움직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이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에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사업가가 사업을 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돈을 벌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계속해서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함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잘 키우려고 애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조차도 궁극적으로는 마음이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공백을 채우고자 자녀를 잘 키워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정당인으로써 활동하고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도 근원적 이유를 살펴보면 마음의 공백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안식 즉 궁극적인 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채워지면 안식으로써의 쉼은 주어지게 됩니다.
삶이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이유는 마음이 하나님 크기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크기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이 간과되기 때문에 온전한 채워짐은 이루어질 수가 없고 안식도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공백을 피조물로 채우고자 시도하지만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그 결과 평생을 참된 안식 없이 부담을 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이 있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타락하기 전의 아담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담이 인간이라는 인격체로 창조되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의식을 가지고 처음으로 만난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안식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 중 제4계명인 안식일 규정을 봅니다. 여기서 안식일이 창조에 기원을 두었음이 나타납니다. 11절에서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기로 하신 일곱째 날이 아담에게는 첫째 날이었습니다. 아담이 창조의 마지막 날인 여섯째 날에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타락하기 전에 아담의 삶의 시작은 우리의 삶의 시작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삶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자영업자가 가게를 얻어서 열심히 장사를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사를 열심히 하는 궁극적 이유는 돈을 많이 벌어 마음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쉼의 자리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을 벌어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윽고 채워질 때가 있으리라 믿으며 계속해서 돈을 벌기에 열중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경우는 시작이 달랐습니다. 제일 처음에 눈을 떠서 만난 대상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로 연합하게 됩니다. 아담은 마음을 채운 상태로 삶의 첫째 날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채워지니 일이 끝난 후에 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이 시작되기 전에 쉼이 먼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쉼이 일의 완성이나 중단된 때에 찾아오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궁극적인 쉼은 마음이 채워짐으로부터 나타나는데 아담은 그것이 삶의 시작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종적인 목표에 이르기까지 다섯 단계의 일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쉼은 최소한 첫 번째 단계를 마친 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마주한 날은 창조가 끝난 후의 안식일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쉬게 된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한 일이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안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마음을 채우기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쉬는 것이 아니라 쉬는 중에 생애를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마음이 채워지게 되고 안식은 유지됩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에덴의 삶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쉬는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었기에 쉼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이상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기묘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타락전의 아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하게 됨으로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었고 피조물로 마음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마음을 채울 기쁨과 만족거리를 세상에서 찾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9절을 보면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피조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는 삶이 힘들고 괴로울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계속하여 쉼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타락 이전의 삶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삶에서는 온전한 기쁨이 주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쁨을 향해가고 있으나 기쁨에서 출발할 수는 없는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삶의 특징은 쉼이 먼저 있는 삶이었습니다. 어떤 목표에 도달해서야 얻을 수 있는 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두자면 세상에 목표가 있다는 것 자체가 타락의 증표가 됩니다. 삶에 쉼이 있고 안식이 주어져 있다면 목표는 이미 달성된 것이기에 다른 목표가 필요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마음 채움입니다. 어떤 대단한 일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생기지 않는다면 또 다시 다른 일을 하도록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온전한 기쁨과 만족의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겠다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자 하지만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세상으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죽어도 진정한 안식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단지 모든 일을 중단한다고 해서 안식이 주어질 수도 없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하나님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행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진정한 행함이 시작되는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일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이 안식으로부터 모든 일이 선행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안식일 동안 일을 중단하더라도 안식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후로 나오는 모든 일은 악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모든 일이 중단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이 기쁨이 된다고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로 마음을 채우려는 동안에는 결코 하나님을 통째로 모셔 들일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안식은 모든 행동의 시작점이고 조건이고 근원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룰 것이 없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모든 생각도 말도 행동도 악행입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질 때에 다 이룬 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에 쉼이 유지되고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선행이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을 때에 쉼 즉 안식은 주어집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내가 움직이고 내가 행동하면서도 하나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갈 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셨고, 사도들에 의해 로마 제국이 뒤집히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할 수도 생명을 구하는 선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게 만족과 기쁨을 구한다면 배우자를 대할 때에 나오는 모든 행동이 악행이 됩니다. 배우자가 악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배우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구하는 내가 악한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고 나면 쉼이 생기기에 배우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쉼은 완결되고 마무리되고 매듭지어졌을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이미 하나님으로 완결되어서 쉼이 주어졌다면 더 이상 배우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구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마음은 하나님으로 완결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다면 마음이 완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돈 주세요, 건강 주세요, 부흥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고 형통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가졌다는 사람이 피조의 세계에서 기쁨과 만족을 구한다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한다면 나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완결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의 마음에는 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께서 실제로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내 안에 실제로 모실 수 있고 진짜 쉼을 누릴 수 있을까요? 배우자를 만나도 쉼 중에 만나고, 자녀를 대할 때에도 쉼 중에 대하고, 직장에서 일을 해도 쉼 중에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모가 아이들과 놀이공원을 가면 열심히 돌아다니고 노느라 다리가 아프고 몸은 피곤해집니다. 그런데 몸이 피곤한 것 치고는 직장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스트레스는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것이 쉼이 유지되는 삶의 특징입니다. 삶 자체가 기쁨의 놀이동산이 되고 에덴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쉼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선행이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의 마음 안에 들어오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듯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게 되고 하나님과 친해지고 관계가 돈독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질수록 안식과 쉼은 확고해지고 나의 모든 행동들은 선행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힘이 들지 않는 안식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들이 인생의 내용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나타난 선행이 악행보다 훨씬 쉬운 이유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의식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인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십자가의 약속대로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게 하여 주시고, 세상과는 상관없는 절대 평강과 안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이 선행이 되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는 결실을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