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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0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6
설교 제목: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10~11
설교를 위한 묵상:
이번 주간에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이 땅에는 하나님이 계셨는가?’ 이 질문은 나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 이유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무엇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가? 결국 그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복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것은 설교에도 해당되는 질문이다.
또한 이 질문은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과 자연신학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이 같은 분이냐는 물음을 낳는다. 그 두 개념은 결코 달라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복음전도가 사람을 비인간화할 때 그것은 결국 천국문을 가로막고 더욱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 잘못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의 가사를 보라. 우리나라를 보우하시는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한번 헤아리고 그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보우(保佑)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것을 다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 개요:
1. 요나 이야기의 교훈
2.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3.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
4.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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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나 이야기의 교훈
구약성경 요나서는 좀 특별합니다. 네 장으로 이루어져 짧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는 더욱 특별합니다. 줄거리도 매우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그 명령은 이스라엘의 제1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예언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의 내용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을까요? 그는 이 명령이 니느웨를 살리시고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면 이스라엘의 제1적대국인 앗수르는 다시 번영할 것입니다. 요나는 그것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려고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 배는 풍랑을 만났고 선원들은 신의 저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저주를 일으킨 사람이 배에 있다고 생각한 선원들은 제비뽑기를 실시했습니다. 요나가 그 제비에 뽑혔고 그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회개를 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물고기를 니느웨로 인도하셔서 요나를 바닷가에 토하게 하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의 제1적대국의 수도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룻길을 다니면서 그 성에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본래 그 성읍은 사흘 동안에 다녀야 하는 큰 도시였습니다.
어쨌든 요나는 자신의 임무를 하루만에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악독한 백성이라 생각했던 니느웨 시민들이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사십일이 지나면 이 큰 성읍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요나의 메시지는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왕은 스스로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온 국민의 금식을 선포하고 죄에서 돌이킬 것을 명령했습니다. 니느웨가 한 사람 요나의 전도로 완전히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먹이를 주지 않으면서 죄에서 돌이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보시고 그 성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그 성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랐기에 성밖에 나가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성에 재앙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나뭇가지를 모아 얼기설기 엮어서 초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박넝쿨이 자라더니 그 초막을 덮었습니다. 박넝쿨이 뜨거운 뙤약볕을 가려주니 요나는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었고 박넝쿨은 금방 시들었습니다. 날이 밝아 뜨거운 동풍이 불 때 요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10~11
이렇게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납니다. 그 질문은 하나님이 어린 아이들과 가축들을 아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대답을 기대하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2.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니느웨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 나라의 십이만여 명이나 되는 어린아이들과 수많은 가축, 그리고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어떻게 사는 것을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들이 계속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셨습니다.
우리나라 애국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에 나오는 이 가사는 하느님이 우리나라를 영원히 보우하시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습니다. 보우(保佑)한다는 말은 보호하고 도와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항상 우리나라를 보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보우하실 뿐 아니라 니느웨도 보우하십니다. 하지만 니느웨는 요나의 이스라엘에게는 제1적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를 아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의 제1적대국인 북한도 보우하십니다. 북한의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하나님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백성들도 아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기 전에 니느웨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건강하고 상생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요나를 설득하셔서 니느웨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니느웨 같은 거대한 성읍도 하나님이 회개하게 하신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 요나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요나의 이야기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사실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 도시와 시민과 가축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아끼시고 보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그곳에 갑니다. 그 전령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가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아끼시고 보우하시기에 나도 같은 마음으로 그들에게 가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필리핀 임마누엘교회를 섬기시는 방효천 선교사님을 생각해 봅니다. 그 산지에 교회를 세우시고 전기를 공급하고 청소년도서관을 건립하고 쌀을 나눠 주시고, 앞으로 그곳에 병원을 세울 계획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그 산지에 있는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복음전도는 오로지 그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완성됩니다. 사랑이 없는 복음전도는 말 그대로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느끼는 아쉬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고 나서 마음에 허전함을 느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최근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의 메시지에 온 마음을 쏟느라 청중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한 것이 원인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기 전에 그 청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고 강단에 서는 것은 자신에게도 청중에게도 모두 손해가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이 그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더 나은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3.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
복음전도자가 기억해야 할 일은 또 있습니다. 그 전도자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서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서 그 백성을 보우하고 계셨습니다. 복음전도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경우에 복음전도자는 그 대상자들에게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맞추라는 식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생활방식을 그대로 이식하는 것을 전도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 백성을 보우하시는 일입니다. 돌보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강제로 어떤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올바른 전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경우에 한국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공부하고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고자 노력한 분들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을 위해 병원을 설립하고 모국에서 모금하여 학교를 세우고 청년들에게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후원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은 선교를 넘어 조선과 조선 국민을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에는 이런 비문이 있다고 합니다: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겠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루비 켄드릭(1883~1908). R.K.켄드릭(1883~1908)은 미국 선교사로, 1907년 9월 텍사스주 엡윗청년회의 후원으로 내한했습니다. 영어를 가르치며 어학을 공부하던 중 내한 9개월도 되지 않은 1908년 6월 맹장염으로 별세했습니다. 그 선교사가 죽기 전에 고향의 부모님께 보낸 편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 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중략-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 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조선 땅에는 많은 꽃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해 가지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출처] 나에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작성자 핑크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쳤는지를 이런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선교사가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조선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을 바라보는지, 하나님은 조선을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누군가와 나눌 때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 그것이 복음전도자가 누리는 기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4.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
여기서 저는 예수님이 어떤 전도자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15).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전도한 후에는 그들을 더 나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마 삶이 더욱 나빠진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사람이 더 착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신앙 때문에 더욱 외골수가 되고 편협한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곧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어떤 사람은 종교를 가지면 가족도 친척도 멀리하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려고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자기 민족의 감정을 앞세웠던 요나와 같은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민족이나 국가를 앞세웁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를 더욱 중시하기도 합니다. 교리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 같은 교리로 어떤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일을 벌였습니다. 교리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모든 세대는 자기 시대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기 위하여 새로운 교리를 만들고 기존의 교리를 다듬어 가는 일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30년 전에 시한부종말론에 휩쓸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리고 가정과 사회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와 메시지가 범람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가르침에 포박되거나 아니면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는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려면 역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많은 교리가 있지만 오늘날에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가 무슨 주장을 펼칠지라도 예수님을 의지하고 본받아 사는 사람은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더불어 화목하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예배하며 권면합니다. 여기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이나 교리라 할지라도 단호하게 선을 그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어지러울 때 그처럼 미혹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태복음 24:23~26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 기독교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과정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가르침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기존에 배운 것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사실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삶에 필요한 교훈과 조언을 배우고 담는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자라나다가 어느 때가 되면 이제는 기존에 담은 것을 버리고 자신만의 생각을 다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금요일 밤 기도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라는 가사는 바뀌어져야 합니다. ‘돈 때문에 못 가요 하나님 나라’로 말입니다. 그리고 어여뻐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라는 구절도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웃는 얼굴 착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믿고 본받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어갈 것이니까요. 믿음으로만 들어간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을 오해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운행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팽이치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라는 거대한 팽이를 치시므로 오늘도 우주는 돌아가면서 생명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팽이치기에 동참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팽이치기는 우리의 애국가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처럼 이 세상과 자연과 사람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바로 이 일에 동참하라고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언제 어디서나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이처럼 신나고 기분 좋은 일에 한 마음으로 동참해 봅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