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벚나무
어김없이 봄이다. 나는 지금 앞마당에 서 있는 위핑 체리 한 그루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Weeping Cherry, 한국말 검색어에 넣어보니 ‘처진올벚나무’라고 나온다.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우는 벚나무’가 되겠다. 축축 늘어진 가지를 타고 피고 지는 꽃잎이 눈물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일 테다. 나무가 흘리는 꽃눈물이라…. 듣기만 해도 가슴 한쪽이 저릿해진다. 이렇게 감정이 담긴 나무를 집 마당에 들이기로 마음먹은 건 3년 전 어느 봄날이다.
카툼바에서 에어비앤비를 하는 지인 덕에 블루마운틴에 자주 들락거릴 때였다. 그날도 문우 김 선생, 공 선생과 함께 봄나들이 겸 올라간 길이었다. 마을을 산책하던 중에 길 끝 모퉁이 집 앞에서 자연스레 발을 멈추었다. 입구에 쌍둥이처럼 서 있는 두 그루 꽃나무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 벚나무인데 그냥 벚꽃이라고 하기엔 수형이 사뭇 달랐다. 키가 일반 벚나무보다는 작고, 굵은 기둥 끝에 자잘한 꽃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김 선생은 그 모양이 활짝 펼친 양산 같다는데 내 눈에는 영락없이 공중에 떠 있는 꽃무덤처럼 보였다. 뿜어내는 색이 얼마나 화사하던지 온 누리에 퍼붓고 있는 봄 햇살을 뚫고도 남았다. 오묘한 아우라를 내며 공중에 떠 있는 꽃무덤이라…. 동쪽 바다로 가는 길에 도화가 만발한 과수원에서 색을 탐했다던, 온 마음을 모아 색을 쓰는 도화가 어여뻐 요절을 꿈꾸던 청춘이 갔음을 알았다던, 김선우의 시 「도화 아래 잠들다」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그 시를 내 집 마당으로 들이고 싶었다. 요절을 꿈꾸진 않았어도 온 마음을 모아 색을 쓰던 시절을 내 집 마당에 들여 해마다 보고 싶은 욕심이 났다. 그즈음 나에게서는 청춘은 물론이거니와 조금 남아있던 생물학적인 여성성마저도 사라지던 중이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반려 식물쯤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화원으로 달려갔다. 이미 꽃을 피우느라 한창인 계절이었으니 묘목이 있을 리 없었다. 그해 겨울을 기다리라는 조언을 듣고 두 계절을 넘겼다. 겨울이 되었는데도 묘목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화원에 문의해 보니 위핑 체리의 북방한계선에서 걸렸다. 호주는 적도 아래에 위치에 있으니 남방한계선이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위핑 체리는 겨울잠을 충분히 자 두어야만 하는 체질이었다. 최소한 섭씨 7도 이하에서 일정 시간을 기다려야만 발아가 제대로 되는 나무라는 말이었다. 온난성 기후인 시드니 근교에서 그 한계선에 들어있는 지역 중 하나가 블루마운틴이었다. 다행히 내가 사는 체리부룩(Cherrybrook)도 아슬아슬하게 한계선 안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더 적극적으로 위핑 체리 묘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찾는 크기는 수형이 잡혀 2차 생장을 준비하는 나무였으니 묘목이라 하기엔 정확하지 않은 면이 있다.
며칠 후, 그날도 블루마운틴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지인이 에어비앤비를 정리하면서 몇 가지 가구를 가져가라 해서 밴을 빌려 올라가고 있었다. 스프링우드 과일 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길거리 좌판 앞에 두 줄로 열병식을 받는 군인처럼 도열해있는 위핑 체리가 보였다. 급하게 차를 멈추었다. 대부분 우듬지가 정리되어 있고 기둥이 말끔했다. 몇 개 안 되는 가지였지만 축축 늘어져 있는 것이 위핑 체리가 분명했다. 그런데 사방으로 예쁘게 가지가 뻗어 내린 건 한 그루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가지가 한쪽으로 쏠려있었다. 우선 한 개를 먼저 차에 싣고 나머지 중에 비교적 건강해 보이는 놈으로 골라 실었다.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날 나는 마침 밴이 있었고, 그 시간에 누군가 위핑 체리 묘목을 과일 가게에 가져다 놓았고, 마침 내가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고, 차가 그리 쌩쌩 달리는 도로에서 나는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우는 벚나무’ 두 그루가 운명처럼 내 집으로 왔다.
잘 키우고 싶었다.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색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매이는 것이 싫어서 동식물에 의식적으로 정을 주지 않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집착처럼 몰두했다. 전문 정원사까지 불러 나무 심기를 거행했다. 자리를 잡고 땅을 파고 영양제를 넣는 동안 문안에서 살금살금 엿보기만 했다. 혹시나 참견해서 잘못될까 조심스러웠다. 식재 의식은 길지 않은 시간에 끝이 났다. 작업시간에 비해 비용이 좀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그저 봄이 되면 이 마당을 환하게 빛내줄 청춘의 색만을 상상했다.
가지가 예쁘게 늘어져 먼저 집었던 녀석을 현관 가까운 쪽에 두었다. 더 많이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세상사가 바람대로만 된다면야 무엇이 문제일까. 수형이 맘에 들지 않아 조금 구석진 쪽으로 배치한 놈은 나날이 물이 오르는데 특별히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녀석은 가지가 마르고 잎이 퍼지질 않았다. 꽃은커녕 살아주기만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물도 열심히 주고 잎도 따주고 하면서 정성을 들였건만, 봄이 다가오는데도 칙칙하고 옹졸해 보이는 잎은 그대로였다. 한날한시에 이식된 두 나무가 어떻게 이리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색을 어찌할 수 없듯이 내 힘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사는 것도 네 운명, 죽는 것도 네 운명이다. 안타까움을 안고 외면하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예쁘게 모양을 잡느라 거세당한 수관의 깊이가 컸을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낯선 환경에서 버티려고 저는 얼마나 더 힘이 들겠는가. 안쓰럽고 미안했다. 그렇게 봄을 맞았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정말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빅뱅이었다.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여는데 흰빛에 가까운 연하디연한 분홍 꽃송이 두어 장이 하늘거렸다. 실눈만 한 청춘의 색이 앙상한 가지 끝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꽃무덤을 만들기엔 너무 작은 양이었지만 그 시작을 알리는 밑그림쯤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 그뿐이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어도 잎은 초록을 품지 못하고 바로 낙엽이 되었다. 내게로 오기 전에 가지가 잘리면서 이미 고운 눈물을 다 쏟아냈던 것일까. 두 해 동안 겨우 서너 장 꽃눈만 틔고 있으니, 세 번째 봄을 앞둔 지금 이름값을 못 하는 벚나무 앞에서 내가 울고 있는 것이다.
운다는 행위는 생명의 강력한 몸짓이다. 돌이켜보니 젊음이 마르면서 눈물도 말라갔다. 어쩌면 나는 지금 벚나무 한 그루를 앞에 두고 내게 남아있는 열정의 눈물을 보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기다리자. 꽃을 피우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꽃이 피면 피는 대로 기다림은 떨림이고 희망일 테다. 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조용히 나무를 어루만진다. 이렇게라도 버텨만 다오. 얼마 남지 않은 내 욕망의 눈물처럼.
유금란 / 시드니에 거주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고 있다. 산문집으로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해외 5인 공저 <바다 건너 당신>이 있다. 재외동포문학상, 동주해외신인상 수상. <문학과 시드니>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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