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육열이 높으신 부모님 덕택에 22세까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어려웠던 경제난 가운데도 이런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은 나로서 다행한 일이었다.
1948년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에 나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원당에서 3년간 중동중학교 강의록으로 중학 4년 과정을 마친 뒤였다. 이 해는 동아기독교가 김용해, 한기춘, 안대벽 목사 등을 선정하여 미국의 남침례회와 제휴를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간부로 일하고 있던 고향선배의 주선으로 전남 화순에 있는 광업소의 검탄계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 광산은 2,000여 명의 종업원에, 부양가족까지 합하면 1만 명이 넘는 식구를 보유한 대규모의 회사였다. 남선항에 배치되어 600여 광부들이 2교대로 항내에 투입되어 채탄을 했다. 내 업무는 광부들이 채탄을 해서 항외로 올릴 때 그 양과 질을 검사하여 결재하는 것이었다.
그 때 나의 나이는 22세.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경험이 부족했지만 수백 명의 광부들과 직접 상대하여 일처리를 해야 했으므로, 큰 담력이 필요했다. 연소자 검탄계원이 부임해 왔다고 감장님으로 호칭하면서 각항 대표들이 제각기 선물공세로 접근해왔다. 그럴 때마다 지혜롭게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자 때로는 공갈과 위협을 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담대하게 대항하며 더욱 철저히 대처했다. 몇 차례 이런 과정이 지난 다음 그들은 회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상부에서는 나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고, 강경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익혔다. 직장생활에 보람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도 무방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활도 잠시뿐, 머지않아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돌연 여수 순천 사건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제주도 4ㆍ3사건의 잔비(殘匪)를 소탕하기 위해서 출동준비중이던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1대대 소속 40여 명이 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군내(軍內) 적화(赤化)와 사회의 공산화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모든 차량을 동원하여 시내의 좌익학생, 단체를 규합하여 10월 20일 상오 9시경 여수시를 완전점령하고 반란군에 합류한 순천 주둔 제4연대 소속 1개 중대와 합세하여 순천까지 점령했다. 이 세력은 곧 우리 광업소를 점령하게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일대에 소동이 일어났다. 회사 본부에서는 모든 직원에게 직장을 사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통행증이 중단되고 매일 사무실에 집결하여 공포분위기 속에서 일과를 하고 밤에는 제각기 숨어 지냈다. 두려운 것은 종업원 중에 조직되어 있는 좌익분자들이었다. 그들이 타도할 대상은 회사 경영주와 직원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한 시간 보내는 것이 너무 곤욕스러웠다. 공포는 끝이 없었고, 모든 사람들의 절망은 극에 달했다. 나는 틈만 있으면 기도했다. 그 때 나의 기도는 간단했다.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 살려주세요. 죽음의 골짜기에서 건져주시면, 일평생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서원 기도를 반복해서 드렸다. 위급할 때 기도는 짧다는 것을 느꼈다.
반란군이 들어오기 전에 정부에서 전국경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했지만, 실패하고 군산(群山) 주둔 국군 제12연대가 투입되어 접전 끝에 1개월만인 11월 12일과 15일에 각각 순천과 여수를 탈환했다. 그 때 반란군에 대한 정부군의 진압작전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반란군과 정부군 모두 같은 군복을 착용해 구별이 힘들게 되자 정부군은 철모, 차량 등에 흰색 띠를 부착했다. 시간이 지나자 광업소는 다시 평정을 되찾았고, 통행증도 발급되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사표를 제출하고 통행권을 발급받아 집으로 돌아오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런 나를 만류했다. 사태가 수습되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데 왜 돌아가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 곳을 떠났다. 지난 세월을 회고해보면 모든 여건이 나를 주님의 종으로 이끌어낸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