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항년南恒年(1460~1530)| 병절교위 영양 남 공의 묘갈명 병서 [秉節校尉英陽南公墓碣銘 幷序] _ 김도화金道和∙
영가永嘉(안동) 남쪽 봉지산烽枝山 서남쪽 언덕의 우뚝한 무덤이 돌아가신 병절교위 영 양英陽 남 공南公의 옷과 신발이 갈무리된 곳이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400여 년이 지났 는데, 예전에 제체祭砌∙1 오른쪽에 있던 작은 빗돌이 여러 번 전쟁을 겪고 비바람에 깎여 글자가 닳아서 읽을 수 없고, 아울러 지은이의 성과 이름도 인멸되어 전하지 않으니, 자손의 끝없는 아픔이 마땅히 어떻겠는가. 오호라! 공의 이름은 항년恒年이고, 자는 구옹久翁이다. 남씨의 조상은 중국의 여남汝南 에서 나왔는데, 당나라 천보(742~756) 연간에 안렴사 김충金忠∙2이 바로 성姓을 받은 조 상이다. 3세 뒤에 익翼은 태자첨사를 지냈고, 영양을 습봉襲封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군보君甫가 추밀원 직부사를 지냈는데, 이분이 위위시 동정을 지낸 공약公若을 낳고, 공약이 문하시중을 지낸 비備를 낳고, 비가 전병 판서를 지낸 성로星老 를 낳았다. 성로가 판도 판서를 지낸 유손有孫을 낳고, 유손이 낳은 휘주暉珠는 역적을 토 벌한 공훈으로 전리 판서에 올랐는데, 바로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민생敏生은 고려가 망할 때 몸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아 충절忠節하다는 칭송이 있었고, 할아버지 의량義良 은 수의교위를 지냈다. 아버지 치정致晶은 진사이고, 권자겸權自謙·이증李增 등과 함께 우향 계友鄕禊를 만들었는데, 사가 서거정이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어머니 의인宜人 음성박 씨陰城朴氏는 중추부 판사 순淳의 아들인 첨추 소昭의 따님이다. 공은 천순 경진년(1460)에 태어났고, 월과 일은 전하지 않는데, 어려서부터 대절大節을 지녀 가족이나 살림살이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찍이 서울의 도제동都諸洞∙3으로 이사 하였고, 중종반정 때 원종훈原從勳으로 특별히 병절교위에 임명되었다. 남씨는 성姓을 얻 은 뒤로 족보를 만들지 않았는데, 공이 앞장서서 종중에 의논을 내어 세보世譜를 정리하 여 밝히니, 이에 남씨가 비로소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경인년(1530)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였다. 부인 강양이씨江陽李氏는 강양군江陽君 요瑤의 증손이고 현감 택澤의 따님으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서린瑞麟이고, 둘째는 계공랑 서귀瑞龜이며, 셋째는 진사 서룡瑞龍으로 막내 숙부 창년昌年에게 출계하여 후사를 이었다. 서룡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호선好善은 공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둘째 계홍繼洪 은 첨추를 지냈으며, 셋째 호문好問도 공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넷째 호학好學은 교수를 지 냈다. 그 아랫대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안동 일직현一直縣에 사는 이는 모두 호문의 후손인데, 호문의 아들 호군 황煌이 바 로 나의 선조 진사공進士公 이상爾相의 장인이다. 오호라! 공이 살았던 때는 이제 멀어졌다. 공의 평소 행적에는 반드시 빛나는 것이 많았겠지만,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위로는 원종훈의 녹권錄券과 아래로는 종친의 화목을 도모한 족보인데, 그 영향影響∙4이 아득히 멀어져 300년 동안 전해진 것이 단지 귀에 들리 는 소문뿐이었다면, 어찌 긴 세월이 지나도 공의 행적이 없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후손 극화極和와 병규炳奎 등이 바야흐로 묘비를 고쳐 세우려고 친족인 병두炳斗를 시켜서 내게 갈명을 부탁하였는데, 나도 자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일에 대해서 감히 늙었다고 사양할 수 없어 그 대략을 서술하여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뿌리가 깊은 것은 根之深者 잎이 반드시 무성하고 葉必茂 근원이 먼 것은 源之遠者 흐름이 반드시 유장하니 流必長 만일 내 말을 못 믿겠으면 如吾不信 빗돌 위에 새긴 명을 살펴보시라 請觀石上之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