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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반복하여 강조해 온 복음의 핵심을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5장 전반부에서 다루었던 할례와 십자가의 문제를 다시 언급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던 거짓 교사들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육체의 할례를 강요하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바울은 만일 자신도 할례를 전하였다면 지금처럼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며 십자가의 걸림돌도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갈5:11).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갈5:6). 이런 점에서 바울은 편지의 마지막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갈6:14). 또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갈6:15). 이처럼 본문은 육체를 자랑하는 거짓 교사들과 십자가를 자랑하는 참된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면서 갈라디아서 전체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기록합니다. 로마서 16장 22절에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대체로 바울은 자신의 편지들을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쓴 것임을 친필로 확인하도록 하는 일도 있었는데, 고린도전서 16장 21절에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이렇게 기록하기도 합니다. 특히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절에서는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고 기록함으로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 썼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편지가 아니라 자신의 편지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물론 모든 바울의 편지에 자필로 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장 2절에 보면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 다시 말해 사도 바울 이나 다른 사도들의 이름을 사칭한 편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 편지가 자신이 쓴 것임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할 때 이렇게 자필로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보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쓴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대필자를 통해 쓰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친필로 쓴 것이지, 아니면 갈라디아서 전체를 바울 자신의 손으로 쓴 것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칼빈이나 매튜 풀 주석에서는 갈라디아서 전체를 바울이 쓴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단지 내 손으로 편지를 썼다고만 말하지 않고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만약 대필자를 통해 쓰고 난 뒤 이 부분에서 바울이 자필로 쓴 것이라면 이 부분에서 큰 글자로 쓴 것이 될 것이고, 갈라디아서 전체를 바울이 썼다고 하면 다른 편지들과 달리 글자 크기가 크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전체 글이 바울이 쓴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 갈라디아서가 자신이 쓴 편지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편지의 성격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복음에 대하여 저주를 선언할 만큼(갈1:8-9) 편지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렇게 강하게 말한 것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갈1:6). 물론 처음에 강하게 말하다가 점점 부드러워지는 면이 있지만, 바울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신의 편지에 대하여 좀 더 주의 깊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칼빈) 이 편지가 자신의 편지임을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딤후3:16). 당시 거짓 사도가 있었고, 그들을 통해 거짓된 편지들도 있었지만, 참된 사도를 통해 기록한 모든 말씀, 나아가 비상직분으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한 모든 말씀들은 그들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사도로서의 권위도 분명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변호하기도 했고, 그것을 통해 편지를 좀 더 주목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단지 개인의 견해로 내놓은 글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글은 그들 개인의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 11절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할 때 그만큼 더욱 주의하고 주목해서 볼 것을 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너희가 거짓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의하고 주목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로 말합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갈라디아서 5장 1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할례, 그리고 의식과 같은 것을 거절하는 것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어떤 자들인가?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모양을 낸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기 위해 이렇게 말할 뿐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17절에서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할례라는 육체의 모양을 통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그런 흔적들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냄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볼 때 육체의 모양이 행위 공로가 되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거기에 인간의 행위 공로를 열어 놓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행위 공로를 열어 놓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그것이 행위 공로이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할례 자체가 그들의 행위 공로인 것이고, 행위 공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원의 유무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3:2-3) 본문에 대하여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손할례당’(개역한글)입니다. 그들을 삼가고,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면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곧 할례파인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손할례당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본문처럼 그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얼마나 자랑하고 신뢰하는지,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정도입니다.
이런 자들을 의식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4절부터 보시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4-6) 문제는 이렇게 육체를 신뢰할 것들이 의와 구원을 주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즉 육체를 신뢰할 만한 모든 것을 버려야지만,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할 때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모든 것이 율법의 의로 있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3절로 오시면,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은 육체로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빌립보서 3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의를 율법에서 확인 받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으로부터 자신의 의를 확인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5장 3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로서 율법 전체를 행할 수 있는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선고될 수밖에 없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할례라는 육체의 모양을 내도록 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냄으로 자신의 육체로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육체로 자랑하면서도 그들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체로 자랑할 것 같으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인데, 율법 전체를 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율법의 한 부분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육체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구원와 의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과 의에 있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도록 만드는 모든 교리가 사실은 이것과 맞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육체로 자랑하고, 그런 측면에서 행위 공로를 버리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이단들이 다 그런 것인지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굵직한 이단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늘 인간의 자유의지와 공로에 대한 문제가 결부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와 관련해 하나님과 같아 지려고 한(창3:5 참고) 죄의 성격이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자랑하고 행위 공로를 주장하는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요, 복음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복음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에 인간의 행위 공로를 더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만큼 삭제시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만큼 삭제시킨다는 것은 그만큼만 삭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 전체를 무효화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와 그런 의미에서 육체를 자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저들과 달리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무엇과 무엇을 대조시키고 있는가? 육체로 자랑하는 것과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원수는 육체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자랑하는 것이 행위 공로라면 십자가는 복음인데, 지금 바울은 행위 공로와 복음을 대조시키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으로 인간의 모든 행위 공로를 거절하는 자만이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면서 행위 공로를 말하는 것은 복음의 변질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갈1:7). 그리고 이런 복음의 변질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복음이요 저주 외에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갈1:8-9).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십자가와 대조되는 육체로 자랑하는 것, 복음과 대조되는 인간의 행위 공로를 거절해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와 구원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이라도 거절해야 합니다. 육체로 자랑하는 것, 인간의 행위 공로를 거절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 공로를 말하면서 십자가를 말한다? 그러한 십자가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한다는 것인데, 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이 나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세상 밖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며, 또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 이상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습니다. 세상의 원리를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마태복음 5장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세상 누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일반적인 원리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요,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것입니다(마5:46-47 참고). 이런 점에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자 역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할 때 순수한 마음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아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는 압니다. 알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않을 때 말씀 앞에서 찔림을 받습니다. 좀 더 주께서 허락하신 길을 가지 못함으로 가슴을 치게 됩니다. 즉 세상 사람과 신자는 삶의 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원리가 다르다는 것은 삶의 기준 또한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결코 절대적인 진리에 있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에 기초합니다. 다른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은 믿는 자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믿는 자 역시 세상에 관심이 없습니다. 앞서 빌립보서 3장을 언급했지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3:7-8)이라고 말한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은 철저히 세상적으로 유익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으로 남다른 것을 마치 자신의 공로처럼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의 자신의 노력과 열심이 없었는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노력하지 않고, 열심을 내지 않고 세상적으로 남다른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삶의 원리과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때 내 열심, 내 노력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한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고전15:10 참고). 여기에 참된 겸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겸손을 가진 사람이 드뭅니다. 얼마나 세상적인 원리와 기준으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14절로 하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되지만, 전혀 못 박히지 못한 상태입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가? 어쩌면 참된 복음이 아니라 변질된 복음 가운데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참된 복음을 안다고 한다면 인간의 뿌리 깊은 공로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죄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그러합니다. 때문에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의 원리와 기준에 따라 살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원리와 기준은 늘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하고, 우리의 행동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와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할 때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도 우리의 의와 구원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러한 절기, 혹은 율법의 행위를 가지고 우리의 의와 구원을 논하자면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할례나 무할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 소위 율법의 행위로서는 결코 의와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우리의 의와 구원에 효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만이 우리의 의와 구원에 효력을 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본문은 동일한 의미에서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신자라고 해서 실제 생활에 있어 남다른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런 점에 있어서는 신자 된 우리가 많이 반성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별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지가 사건이 믿는 자들에게 헛되게 되지는 않습니다. 할례나 무할례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에 이탈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저주를 선언해서라도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면한 것이 갈라디아서 5장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신자의 구별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규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라고 할 때 분별을 요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할례와 같은 율법의 의식을 성경이 말하지 않는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 그리고 신약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 때까지만 행해야 할 것으로 있었지, 성취 이후에도 계속해서 행해야 할 것으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분별하여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교리와 함께 교리에 합당한 삶의 자세까지 포함합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함께 바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단지 혈통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로마서 9장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6-8) 이후 에서와 야곱에 대한 내용도 나오지만, 혈통으로는 이스마엘이나 에서나 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일지라도 영적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누구만이 영적 이스라엘이냐?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는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이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한 것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체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은혜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고 말하기 때문에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의와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씀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은 은혜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먼저 영원 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이요, 그런 선택이 때가 되어 부르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 규례를 행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라는 대조를 통해 살핀 것처럼 신자라 할지라도 육체의 일로 나타나는 일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과 말씀으로 역사하여 결국 이 규례를 행하는 자로 있게 하실 약속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말씀을 따라 힘을 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만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신자라 할지라도 갈라디아서 3장 10절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에게 맡겨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택하시고, 때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셔서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여기에 성령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두셔서 계속해서 말씀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도록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강을 말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혹 성경의 다른 구절에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다고만 말하는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9장 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제 편지를 마치면서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음을 말합니다. 17절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편지를 받아보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은 ‘이후로는’, 혹은 칼빈의 번역으로 하자면 ‘그 밖의 것에 관해서는’ 더 이상 바른 복음에서 다른 복음으로 이탈하여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에서 이탈하여 다른 길을 걷는 것은 사도에게 있어서 매우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12절에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이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 받는 것을 면하기 위한 것으로 있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고난의 흔적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자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고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복음으로 말미암은 고난들이 곧 예수의 흔적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과 동족의 위험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2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지금 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말하는 것은 바른 복음의 전파로 말미암은 고난의 표임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러한 고난보다 더욱 괴롭게 만드는 일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바른 복음에서 이탈하여 다른 복음으로 변질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여러 가지 일로 분쟁하고 분열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이 이런 저런 문제들로 있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고, 오히려 나와 같이 바른 복음으로 말미암은 고난의 흔적들이 교회와 성도 가운데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흔적들은 어떤 것입니까? 혹 복음과 상관없는 할례의 흔적은 아닙니까? 복음과 상관없는 자기 자랑과 그런 자랑으로 말미암은 분쟁과 분열의 흔적은 아닙니까? 우리는 진리 안에서만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진리로 말미암아 세상을 살아가다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그런 흔적들이 즐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손해도 보고, 인간 관계가 끊어지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그래서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생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고(갈6:8), 하늘의 상급까지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가? 복음과 진리로 말미암은 흔적들을 가지고 있는가? 바울처럼 자신의 육체에 이러한 흔적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그런 흔적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마음에 그런 흔적들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따름으로, 말씀을 따름으로 인해 받게 되는 상처들! 하지만 이런 우리의 눈물을 주께서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6절과 17절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오늘 본문 18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하고 있는데, 앞에서 말한 모든 내용은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성부와 성령 하나님이 빠질 수 없습니다. 다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 가운데 있기를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의 은혜 없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어떤 것이라도 우리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도록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