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들어 보고 모습을 관찰해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친한 벗이 그의 평소 행동을 살펴보는 것만큼 자세하지는 않다. 나의 벗 윤유장(尹幼章)이 매양 고(故) 사간 이공 문오(李公文五)가 어질다고 말했는데, 윤유장이 사귀는 벗은 반드시 단아했으니, 그의 말은 거의 믿을 만하다. 나는 옛일을 회상하며 이공이 객사로 나를 찾아왔던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공의 아들 제임(齊任)이 윤유장이 지은 장록(狀錄)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봉령(鳳齡)이요, 문오는 공의 자이다. 우리 세종대왕의 별자(別子)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의 후예이다. 4대를 전하여 순천군(順川君) 이관(李琯) 및 그의 형 금천군(錦川君) 이함(李瑊)에 이르러 경술(經術)과 질박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 이중호(李仲虎) 선생이 학문을 창도하여 가르쳤는데, 선생은 세상에서 이소재(履素齋)라 불리며, 그 문하에서 수업한 자가 100여 명이었다. 금천공은 선생보다 세 살이 어렸고 순천공도 불과 여섯 살 차이였으니, 처음에는 뜻이 같고 도가 부합하는 벗으로 사귀었다. 그러다가 선생의 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스승으로 높여서 절실하게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자신을 낮추어 제자의 반열로 나아갔다. 이것은 오협(五挾)을 마음에 두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도를 구한 것이니, 하분(河汾) 이래로 이러한 기상은 없었다. 결국 순수한 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재상이 풍요(風謠)를 채집하여 문려(門閭)에 정표되었고, 일족의 일을 맡아보는 이가 행적을 기록하여 주동(鑄洞)의 지(誌)에 실렸으니, 가문의 법도를 완성하여 후세에 길이 드리우려는 것이었다. 아들 시중(時中)은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금천군은 일찍 몰하였으나 세 아들인 성중(誠中), 경중(敬中), 양중(養中)은 모두 명신이 되었다. 그 막내인 승지 양중은 바로 퇴계(退溪)의 제자로 자가 공호(公浩)이다.
서윤의 아들인 현령 유수(幼洙)가 진사 명귀(命龜)를 낳고, 진사는 진사 진일(震一)을 후사로 들였으니, 바로 공의 선고이다. 선비는 창평 이씨(昌平李氏)로 첨정 담(墰)의 따님이다.
공은 숙묘(肅廟) 16년 경오년(1690) 여름 4월 28일에 태어났다. 을미년(1715, 숙종4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를 거쳐 박사(博士)로 승진했다. 신축년(1721, 경종1)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중에 몸이 수척해진 탓에 습사(濕邪)가 들어 마비가 되는 병을 앓았는데, 거의 지탱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중년 이후로는 다리에 병이 들어 절하거나 꿇어앉지 못하자 벼슬길에 나아가려는 뜻을 끊고 오로지 병을 요양하는 데 전념하였다. 무릇 조정의 명이 있으면 모두 간절히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병조 좌랑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양사(兩司)의 벼슬로 간원(諫院)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이 되었으며, 헌부(憲府)에서는 장령과 집의가 되었다. 지방관으로 영남 도사(嶺南都事)에 제수되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 사복시 정에 제수되었는데 거듭 맡은 경우도 많았다. 22차례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외직으로는 3번 군읍(郡邑)에 부임하였다. 처음 벼슬자리에 나아간 것은 시원(試院)의 감찰(監察)이었는데, 시험을 주관하던 당시의 이조 판서가 한 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겼다.
가장 먼저 호서(湖西)의 정산 현감(定山縣監)에 제수되었는데, 4년 만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또 서변(西邊)의 송화 현감(松禾縣監)이 되었다. 그곳은 폐단이 쌓여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므로 적임자를 잘 선발하라는 명이 있었다. 마침 호서 관찰사를 지내 정산 현감 시절 공의 치적을 익히 알고 있던 이가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이모(李某) 같은 이가 없다.”라고 하며, 후보자의 명단에 올렸다. 그때 현에는 도적이 많아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었는데, 공이 계책을 세워 체포하고, 엄격하고 밝게 징계하여 다스리니 도적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웃 고을도 그 덕을 보았다. 송화현에는 그의 선정을 기리는 거사비가 있다.
을묘년(1735, 영조11)에 충청 도사(忠淸都事)가 되었다. 해운으로 쌀을 운반하는 직책을 으레 겸하였는데, 열군(列郡)에서 세력을 믿고 일을 완수하지 못한 자를 상주(上奏)하여 출척시켰다.
정사년(1737, 영조13)에 또 결성 현감(結城縣監)의 적임자를 고르는 선발에 뽑혔다. 결성은 작은 현인데 흉년이 들어 몹시 곤고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소생시켜 줄 수령을 기다렸다. 공은 권속을 대동하지 않고 필마로 급히 달려가서 월름(月廩)과 관수(官需)까지도 진휼하는 데 쓰게 하니, 이에 백성들은 함정을 벗어나 언덕으로 나온 듯하였다. 선정(善政)을 포창(褒彰)하도록 상주하는 어사의 서계(書啓)가 올라갔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다스리는 데 가장 꺼려야 할 것은 백성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너그럽게 대하고 부족한 것을 도와주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면 족하다.” 하였다. 얼마 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신유년(1741)에 헌부에 재직할 때 언관 중에 망녕되이 법을 위반한 이가 있어 상께서 친히 장전(帳殿)에 임하셨다. 공은 감히 병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이끌고 궐 밖에 당도하여 상소하기를, “저 사람은 간관이니, 되도록이면 가벼운 법을 적용하는 것이 성스러운 세상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근신으로서 죄인을 구원하려 한다며 상이 격노하였다. 이 일로 서변(西邊)으로 귀양 갔다. 얼마 후 대신이 해명해 주어 석방되었다.
공은 법도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훈계와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였다. 미목은 수려하고 언어는 간략하고 신중히 하였다. 항상 순천군(順川君)이 남겨 주신 훈계를 벽에 써놓고 자신을 단속하며 말하기를, “둥글면 흐르고 모나면 걸린다. 바라는 바는 안은 모나게 하고 밖은 둥글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둘째 아들 제현(齊顯)이 벼슬하여 하대부(下大夫)가 되어 근시(近侍)의 반열에 들자, 공이 경계하기를, “내가 신하가 되어 불충한 점은 매양 엄한 하교를 받들고서도 병 때문에 조정에 분주히 달려가지 못한 것이다. 너는 마땅히 신명을 다 바쳐 나의 뜻에 힘써 부응하라.” 하였다. 병자년(1756, 영조32) 여름 5월 15일에 고종하니, 향년 67세였다.
첫째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현령 문유(文猷)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둘째 부인은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하귀(夏龜)의 딸이다. 모두 숙인(淑人)에 증직되었다. 셋째 부인은 숙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만정(萬鼎)의 딸이다.
남 숙인은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제언(齊彥)이다. 제언은 공보다 앞서 몰하였으며 장경(章慶)과 전경(全慶) 두 아들을 두었다.
권 숙인은 2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제현으로 지평이고, 작은아들은 제임(齊任)이다. 지평에게는 아들 둘이 있으니, 큰아들은 완경(完慶)이고 작은아들은 어리다. 큰딸은 심창석(沈昌錫)에게 시집갔고, 작은딸은 오형(吳珩)에게 시집갔다.
구 숙인의 묘는 파산(坡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있다. 공이 몰한 지 7일 만에 권 숙인이 또 몰하여 세 분의 묘를 같은 자리에 썼으며, 남 숙인의 묘는 별도로 조성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근원이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아 / 源泉不渴
반드시 그 흐름을 볼 수 있다네 / 必觀其逝
저 공 같은 이는 / 有若夫公
순천군의 후세로 / 順川之世
선조의 유훈이 밝게 빛났으니 / 遺訓炳烺
벽에 써 두고 마음을 밝혔다네 / 炤壁不昧
마음을 다해 조상의 법도를 따르고 / 心心祖軌
감히 소홀히 하거나 태만히 하지 않았다네 / 不敢荒怠
병으로 조정에 오르는 길이 막히니 / 病阻登廷
머뭇거리며 삼가고 조심하였다네 / 躑躅若厲
지방 고을에 선정을 베푸니 / 施之下邑
백성이 거사비를 세웠다네 / 去思攸計
이것은 전하기에 족하리니 / 是足以傳
백성에게 베푼 혜택 때문이라네 / 維民普惠
집에서는 모범을 보여 / 在家垂範
자손들이 잘 계승하였다네 / 子承孫繼
왕족의 훌륭한 혈통 타고났으니 / 天潢玉派
어찌 후손이 번성하지 않으리오 / 曷不濟濟
[주-D001] 윤유장(尹幼章) : 유장은 윤동규(尹東奎, 1695~1773)의 자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소남(邵南)이다. 17세에 성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자수(訾水), 열수(冽水), 패수(浿水), 대수(帶水)의 〈사수변(四水辨)〉을 지었고, 저술로는 《소남유고(邵南遺稿)》가 있다. 《順菴集 卷26 邵南先生尹公行狀》[주-D002]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 : 세종의 열 번째 서자로 신빈(愼嬪) 김씨(金氏) 소생이다. 요절하여 세종의 2번째 서자인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아들 강양군(江陽君) 이숙(李潚)으로 후사를 삼았다. 《璿源綱要》[주-D003] 오협(五挾) : 협귀(挾貴), 협현(挾賢), 협장(挾長), 협훈로(挾勳勞), 협고(挾故)를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공도자(公都子)가 등경(滕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까닭을 물으니, 맹자께서 말씀하기를, “귀한 신분을 믿고 물으며 재주를 믿고 물으며 나이 많음을 믿고 물으며 공로가 있음을 믿고 물으며 친한 것을 믿고 물은 것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등경도 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었다.” 하였다.[주-D004] 하분(河汾) : 수(隋)나라 말엽에 왕통(王通, 584~617)이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왕통은 용문(龍門) 사람이며, 자는 중엄(仲淹)이다. 문제(文帝) 때 태평십이책(太平十二策)을 올렸으나 쓰이지 않자 물러나 하수(河水)와 분수(汾水)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졸하자 문인들이 문중자(文中子)라고 사시(私諡)를 올렸다. 《資治通鑑 卷179 隋紀》 《舊唐書 卷190上 文苑列傳上 王勃》[주-D005] 이조 판서 : 대본에는 ‘天官家宰’로 되어 있으나, ‘家’는 ‘冢’의 오자이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6] 헌부에 …… 갔다 : 영조 17년(1741) 5월에, 김복택(金福澤)의 처벌을 언급하던 지평 이광의(李匡誼)를 두둔하였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받아 평안도 삼화부(三和府)로 정배되었다. 《承政院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