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탤릭 표시, 큰따옴표 부분은 실제로 말하듯이 낭독 해주세요.
▶ BGM: https://youtu.be/2J-52RZ29d0?si=dcGMpFeweT2uLpZU
내가 너를 그릴 수 있을까
황경신
자정이 지나자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길었던 하루도 그들처럼 또 썰물처럼 밀려갔다. 빈 잔을 채우고 너는 말했다.
“스케치북을 보여줘.”
십 년쯤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가 고장 나던 날, 나는 그림 선생님을 만났다. 처음부터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조르려 만난 건 아니었는데 그 자리 끝에서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스케치북을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언제인지 어디선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여행길에서 무심한 충동으로 사버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 스케치가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스케치용 노트였다.
역시 무심한 충동으로 언젠가 사둔 6B 연필을 깎고 빈 페이지를 펼쳐 서투르게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 일주일쯤 되었을까.
세계를 2차원으로 보는 겁니다.
계획에도 운명에도 없이 나의 그림 선생님이 되어버린 (가엾은) 그분은 그날 그런 이야기를 했다.
2차원이라니.
나는 분명 바보 같은 표정으로 그를 보았으리라. 3차원 속에 살고 있는 3차원인 내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연필을 쥐고 스케치북을 펼치면 3차원의 세계가 조금씩 뒤틀리고, 금이 갔다. 그렇게 아주 천천히, 겨우 햇빛 한 줄기 비집고 들어올 만한 틈이 생겼고 나는 그 틈으로 2차원의 세계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점과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세계. 앞으로, 뒤로, 옆으로 뻗어갈 수는 있으나 아래와 위는 허용하지 않는 세계. 빛과 어둠의 세계. 오로지 그것만으로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그러나 또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 그러므로 마음이나 기억을 숨겨두기에, 너무도 적절한 세계.
내가 눈을 반짝이며 2차원의 세계를 둘러보다가 “뭘 그리면 좋을까”하고 묻자 너는 대답했다.
“나를 그려봐.”
“내가 너를 그릴 수 있을까?”
연필을 잡고, 나는 조금 망설이며, 부드러운 얼굴의 윤곽선을 먼저 그렸다.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어깨 위를 덮었고 이른 봄의 추위를 막기에는 너무 얇은 겉옷이 팔을 감쌌다. 너는 웃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너의 웃는 눈을 그리려 했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슬픈 눈이 되어 버렸다. 입술의 꼬리를 약간 치켜 올리려 했지만 왠지 그것도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그림을 보고 너는 웃었다.
“나네. 나 맞아.”
네가 본 것은, 그림 속 어딘가에 숨겨진 무엇이었으리라. 아마도 다른 이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우리가 함께 만들고 지키고 버티어온 시간이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나의 첫 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너를 다 그리진 못했지만 너의 일부를, 혹은 너와 나눠 가진 시간의 아주 사소한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약속을 그린 거라고 믿었다. 언젠가 내가 너를 잘 그릴 수 있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붙잡고 서투르게, 서투르게. 그리하여 그 질문, ‘내가 너를 그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당분간 의문형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어딘가에 담을 수 없는 것이 이렇게 많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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