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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화평한 사람 관계의 비법, 거룩함>의 줄거리 :
모든 사람과 화평하지 않거나 또 거룩하지 못하면 주를 못 보리라 하십니다. 주를 못 본다는 말씀의 의미는 다시 오시는 주님과 화평하지 못하여 영영 이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구원에서 배제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부터 주님을 못 만나고 있기에 재림 때도 못 만나는 것이지요. 거꾸로 주님을 지금 보는 사람은 반드시 모든 사람과 화평합니다. 왜냐면 거룩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화평한 사람 관계의 비법, 거룩함
(히브리서 12:14~29)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구원에서 떨어져 나감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이어갑니다. 이러한 본문의 주제어는 거룩함입니다. 14절을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함이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는 비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불행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중에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화평하지 못하고 불화하면 삶이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지 못한다면 재림하시는 주님과 불화하게 되어서 주님이 나를 환영하고 나도 주님을 환영하는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다면 구원에서 영원히 배제된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징계를 피할 생각을 하지 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징계를 잘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징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 존재의 특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았어도 저주에 길들여진 존재의 속성이 단숨에 버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격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징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징계를 잘 받아들이면 유익이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익의 결과로 이르게 되는 최종 목적지에 대해 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심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가 살펴본 14절을 보면 거룩함에 참여한 자의 증거로써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이 언급되며 다시 한 번 거룩함을 따를 것에 대한 요청이 이어집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중에는 거룩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람과 화평할 때는 나도 거룩하지 않게 될 수 있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노파심에서 모든 사람과 화평함 뒤에 거룩함을 따르라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다만 내용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에 목적이 있으며, 그 결과가 모든 사람과의 화평함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거룩함은 유지되어야 하며 오히려 거룩함이 유지될 때만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이 없으면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과 화평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고 제대로 믿었다면 거룩함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참여했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고, 거룩함에 참여하게 되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려운 이유는 실제로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람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갈등은 내가 화평을 이루지 못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화평할 마음의 준비가 없다면 내가 화평하고 싶어도 화평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모든 사람과’라는 표현이 어떻게 보자면 무척 거슬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없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니 더욱 난처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까지 믿음에 대해 언급해 왔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예수님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거룩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는 다양한 성격과 기질과 형편과 신분과 지위의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이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동해시에 사시는 사모님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위하여 매주 모여서 공부하신다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이분들의 초청을 받아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의 시골 예배당 형편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배당에서는 사모님들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고 중요합니다. 그야말로 죽자 살자 사모로서의 역할을 해나가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한 분이 말씀하시는데 ‘목사인 남편은 마치 나를 5분 대기조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손님들이 오시니 식사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또한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이런 말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편이 목사이지만 아쉬움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겠는가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8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지구 위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잘 맞는 커플은 단 한 커플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만해질 때 남편과의 관계를 잘해 나갈 수 있는 비결이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남편과의 관계도 제대로 될 수가 없다. 문제는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남편 목사님들이 물으셨어도 아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라고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비결로 거룩함을 언급합니다. 거룩함이란 쉽게 말해 세상에 속하지 않음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란 마음 채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은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려는 흡입력이 24시간 작동합니다. 그 흡입력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거룩함이고 세상에 속하지 않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14절에서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는 기쁨과 만족을 위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바라고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 채움을 위한 욕구는 잘못이 아닙니다. 그 욕구가 사람을 거룩하지 않게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 대상을 욕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세상 안에 있는 대상을 욕구할 수도 있고,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욕구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함의 차이가 생겨납니다.
거룩함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닌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하게 바라고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일에 대해서는 작든 크든, 사소하든 중대하든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랍니다.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이 거룩함이 있다면 나타나는 증거가 모든 사람과의 화평함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함이 어떻게 모든 사람과의 화평을 이루게 하는 것일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리로 뭉친 관계는 겉으로는 화평해 보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으로 뭉친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뭉친 관계도 화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 화평함이 아닙니다. 화평함이 아닌 역적모의이고 도발입니다. 사람이 서로 좋아해서 일어난 거짓 화평의 대표적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일치단결했고 화목했습니다. 인류가 가장 화목한 상태를 보였을 때 나타난 일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강력한 형태의 반역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화평은 작당입니다. 의리로 뭉치고, 정으로 뭉치고, 사랑해서 뭉쳐도 결국 하나님께 반역하는 작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런 경우조차 드뭅니다. 의리로 뭉쳤다가도 등을 돌리고, 부부관계 또한 화평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좋아서 시작하지만, 이윽고 미워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을 떠올려 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듣던 군중들은 분노가 폭발하여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요청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과 화평을 이룰 수 있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라면 화평을 이루지 못한다면 거룩함이 없는 것이고, 거룩함이 없다면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고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인간의 속성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실존 상황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단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려 했을 것입니다. 몸을 보존해야만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몸을 보존할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마음으로 하늘을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을 보면 이러한 상태에서 나온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 보여준 모든 사람과의 화평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모든 사람과의 화평이란 내가 남을 좋아하고, 남도 나를 좋아함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치던 자들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원수와도 화평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거룩함이 바로 그들과의 화평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하늘을 바랐습니다.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나를 돌로 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에게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음료를 대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의를 베풀든 적의를 품고 돌로 치든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바랄 수 없습니다. 오직 마음의 바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거룩함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거룩함이 유지될 때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화평을 이루어도 상대방은 원수의 모습을 띨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평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반대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엉겨 붙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사람을 향한다면 그 사람을 통해 만족하고 싶다는 것인데 이것은 영적인 간음입니다.
본문 15절에서는 ‘쓴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쓴 뿌리란 신명기 29장 18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쓴 뿌리는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자를 가리킵니다.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바라는 상태입니다. 또 본문 16절에서는 이와 같은 예로 에서가 언급됩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자였습니다.
쓴 뿌리는 믿는 자들 중에 존재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애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것들만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거룩함과는 반대 입장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기에 이들을 새삼스럽게 쓴 뿌리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 중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지 않는 쓴 뿌리와 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보이는 것들을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쓴 뿌리로 여겨지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과 어울릴 때는 그 회중 자체가 더러워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하는데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보이는 것들만을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거룩함을 지킴으로써 화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족이나 직장 동료와 사이가 좋다고 해서 꼭 화평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 좋음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바라는 동안에 생겨난 사이 좋음이라면 화평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마음에 담고 애착이 생겨난 것이라면 영적 간음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반입니다.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일은 인간이 하나님께 보일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악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이삭은 이삭대로 서로가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함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어떤 관계도 화평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화평은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원수와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원수는 없어져야 할 대상입니다. 혹은 원수가 마음을 돌려서 적의가 호의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바람은 화평이 아닙니다. 행여 적의가 호의로 변할지라도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원수를 담는 일 자체가 영적인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간음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이유는 16절에 ‘음행하는 자’라는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향해서도 아무런 바람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사물이나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서도 어떠한 바람도 가질 수 없습니다. 거룩함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제가 올해 책을 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문서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그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만 이러한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책을 열심히 써서 출판하면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바람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에 대한 징계를 주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책을 못 읽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할 때면 때때로 그 행동의 결과로 세상에서 나타날 결실들을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했으면 그것으로 끝나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만 말하고 행동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했으니 이제는 이렇게 되겠지’라는 바람은 옳지 않습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 뜻대로 하고 거룩함을 지켰으면 이제는 남편이 나에게 잘하겠지. 이제는 자식들이 형통하겠지.’라고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11절에서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소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명확해집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을 향해 경주하듯이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바라면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점점 더 명확해집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서도 그 결과를 이 세상에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으니 풍성한 결과를 바라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바람은 언제나 하늘에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바람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22~24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온 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천만 천사가 있는 곳,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 등을 비롯한 모든 하늘의 상황을 우리의 거룩함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눈에 보이는 것에 둘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바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바람은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온 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등이 모두 하늘의 상황을 가리키듯이 우리 마음은 하늘에 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피 뿌림의 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게 바로 거룩함입니다.
오직 내 마음이 24시간 작동하는 바람은 배우자를 보든, 자녀를 보든, 누구를 만나 관계하든지 하늘을 향해 지속될 수 있어야 합니다.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럴 때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호의적인 사람과의 작당을 피하고, 원수일지라도 상관없이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오직 마음의 바람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닌 하늘을 향할 때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화평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거룩함이 화평의 비법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람 관계에서 이 거룩함의 비법을 따른 화평을 이룰 수 없다면 주님을 보지 못하고 구원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시온 산,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 등을 비롯한 모든 하늘의 상황은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할 현실입니다. 여기서 ‘장자들의 모임’이라는 표현이 사뭇 어색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써 맏아들이 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놔두고 장자들의 모임을 언급할 수 있을까요?
내가 장자로 언급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과 내 마음이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순서를 매길 때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서열이 예수님에 이어서 둘째, 셋째, 넷째로 이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장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첫 번째로 동시에 만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첫 번째로 상대해 주시는 사람들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거룩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몸으로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관계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그 누구도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에 있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있어도 만족과 기쁨에 도움이 되지 않고, 없어도 만족과 기쁨에 손해가 아닙니다. 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시온 산이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장자들의 모임이고 교회이며 천만 천사가 모여 있는 하늘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관계를 내 마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을 때 그들과 우리는 진정한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진짜 도움을 줄 수 있고,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줄 수 있습니다.
설령 그들이 나를 원수로 취급할지라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중에 그 원수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작당할 수 없습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좋아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나를 좋아함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을 이야기해 줌으로써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도 상관없고 나를 싫어해도 상관없습니다. 배우자의 성격이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내 기쁨과 만족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 기쁨과 만족은 시온 산이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며 나를 장자로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가 있으면 배우자가 어떻든 원수가 어떻든 상관이 없습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진정으로 유익이 되는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또한 이 모든 사람과의 화평이 곧 나의 평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평강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모든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화평한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화평한 거룩한 사람은 누가 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으며 심지어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로 쳐 죽이는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습니다. 이 화평을 더 늦지 않게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붙잡기에 목숨을 다함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누구를 만나든 화평함에 도달하는 은혜에 이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