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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기려 말고 지키려 하라>의 줄거리 :
산에 올라 이스라엘과 아말렉 간의 전쟁 상황을 내려다보는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기를 잡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의 전세가 기웁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된 동작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닛시' 즉 깃발이신 여호와를 빼앗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연출된 행동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선민의 각오는 승리가 아니라 지킴이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면 전쟁은 여호와가 직접 수행하셔서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이기려 말고 지키려 하라
(출애굽기 17:8~16)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이기려고 하면 그 자체가 이미 진 것입니다. 지켜내야 합니다. 전쟁을 하면 얻거나 잃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좋지 않다면 이기려 하기보다는 지키려 해야 할 것입니다. 지켜내는 것이 승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기려 말고 지키려 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은 은근히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아말렉과 전쟁을 벌입니다. 이때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전쟁터가 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면 이스라엘에 전세가 유리하게 되고,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에 전세가 불리해집니다. 우리는 흔히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쥐고 팔을 든 것을 기도를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모세는 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기도를 했다는 해석에는 큰 오해가 있습니다. 모세가 팔이 아파서 손을 내렸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이스라엘을 지게 하실까요? 모세가 전쟁을 위해서 기도했다면 결국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모든 장정들이 용기와 힘을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전쟁이 수행되는 긴 시간 동안 이 기도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야만 이스라엘이 이기고 그렇지 않았다면 졌을까요?
모세가 전쟁의 승리를 바랐다면 아말렉이 의식에서 목표가 된 것입니다. 이는 곧 모세의 마음에서 아말렉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의식과 신경을 다 빼앗아 가는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는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살펴봄에 있어서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이 기도를 했다가 그쳤다는 잘못된 선이해를 지워야 합니다.
15~16절을 보면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가 아말렉과 대대로 직접 싸우시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말렉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자리 잡기까지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여호와 닛시는 그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전쟁에서 직접 싸우시겠다 맹세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호와 닛시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여호와께서 직접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닛시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직접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여호와 닛시의 의미가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위해 직접 싸우신 첫 번째 전쟁입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전쟁은 요즘처럼 미사일을 쏘는 대신 창과 칼을 든 병사들의 육탄전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군대가 상대방을 향해 돌격할 때 맨 뒤에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듭니다. 결국 전쟁의 승패는 기수를 죽이고 깃발을 빼앗음으로 결정됩니다. 1871년에 있었던 신미양요는 미국이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이때 조선군은 패배하여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를 빼앗깁니다. 수자기는 조선시대 각 군영에 걸었던 대장기로서 폭이 4m쯤 되는 커다란 깃발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때 병사들을 지휘하는 용도로 수자기를 활용했습니다. 이렇게 빼앗겼던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는 2007년이 되어서야 임대식으로 국내로 반환되어서 보관하는 중입니다.
이처럼 전쟁에서 깃발은 상징성이 뚜렷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의 여호와 닛시는 전쟁에 임하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마음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갖고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이것은 삶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이기도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경쟁에서 이기겠다, 무엇을 이루어 내겠다, 모든 사람이 칭찬할 만한 성과를 내겠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기려 하지 말고 지키려 해야 합니다. 지켜야 할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당시 전쟁에 나간 자들이 군대의 깃발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가짐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진군을 위한 전쟁을 치를 장수입니다. 모든 전쟁에서 선민은 적군을 이김을 목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선민의 전쟁이란 당신 자신을 허락하셔서 갖게 하신 하나님을 깃발처럼 여겨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모든 전쟁을 이끌 여호수아에게 이것을 교훈으로 삼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이기려 하거나 이루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어진 하나님을 모든 삶의 현장에서 지켜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신 대로 직접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단 하나만 지킨다면 내가 직접 싸우겠다. 너희는 나 여호와를 반드시 지켜내야 할 깃발로 여겨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빼앗기지 않음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참 논리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르비딤에서 갈증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의 핵심은 여호와께 있음 시험을 제시하고 불합격시킨 것입니다. 7절에서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라고 했던 바와 같습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있음이시냐? 없음이시냐?’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마음에서 여호와를 빼앗겼습니다.
선민이 반드시 지켜내야 할 깃발인 하나님을 빼앗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가 되었다는 것일까요? 치열한 삶의 현장을 사는 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이 깡그리 날아간 상태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과 전쟁하듯이 치열하게 삶의 현장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선민이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켜내고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민의 싸움 방식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이기려 하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뜻의 여호와 닛시가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깃발을 잃으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깃발을 지켜내면 나의 깃발이신 하나님이 직접 싸우십니다.
이제 우리는 여호수아가 싸우는 동안에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팔이 아파서 내린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간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여호와 닛시가 여호와께서 직접 싸우심의 조건임을 염두에 두면 모세는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싸우시겠다고 자발적으로 맹세하셨습니다.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기에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가 뜻하는 대로 하나님을 지켜야 할 깃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것은 곧 마음에 제단을 쌓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지킬 수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전쟁에서 이기고, 손을 내리면 전쟁에서 밀렸던 것은 7절의 말씀대로 교훈을 위해 시청각 교육을 하시듯이 의도적으로 연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주권이 땅에 내려와 발로 딛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손에 쥔 모세를 가리킵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여호수아로부터 이스라엘의 장정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저도 하나님의 지팡이이고 여러분도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들었다는 것은 모세의 마음이, 여호수아의 마음이, 이스라엘 장정들의 마음이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발을 떼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은 강렬해집니다. 그리고 존재감이 강렬해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발을 뗀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수행하십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을 지켜냄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켜냄이란 하나님의 존재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유지하려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지 않고 땅에 머물러 있으면 지키려 하지 않고 이기려 하게 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내릴 때 이스라엘이 아말렉에게 밀렸던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아말렉을 적으로 보고 싸우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선민이 아말렉을 보면서 이기고자 했다면 이미 선민다움을 잃고 진 것입니다.
깃발은 그 군대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민의 정체성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선민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아말렉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소유하고 지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서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와 같은 다양한 전쟁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이미 그것들이 내 마음에서 존재감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렇다면 선민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는 이미 전쟁에서 진 것입니다.
선민은 전쟁에서 이기려고 하면 집니다. 삶에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은 아말렉입니다. 그러한 모든 문제와 대치하여 전쟁을 치러야 할 때 이기고자 한다면 이미 진 것입니다. ‘이 문제를 꼭 이기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이 문제를 어떻게 넘어가야 할까?’라고 고민할 때 이미 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 종교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패배자의 신음에 불과합니다. 선민이라면 이기려 말고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켜내야 합니다.
여기서 ‘전쟁통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켜낼 수 있겠는가?’라는 실질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켜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존재의 크기를 비교해 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주 만물 중에 아말렉은 티끌과 같은 존재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고, 그러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믿음이 진짜라면 전쟁통이라고 해서 하나님보다 아말렉을 우선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말렉과 싸우고 아말렉의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감을 잊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만난 배 위에서 풍랑의 존재감에 짓눌려 두려움에 발광하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질책하셨습니다. ‘너희가 당연하다. 하나님을 믿어도 폭풍 속에서는 두려움에 떨만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다윗과 골리앗을 생각해 봅니다. 골리앗은 거인이고 전사로 키워진 군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 앞에 나가는 다윗은 체구도 작았고 목동이고 소년이었습니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전군은 골리앗의 존재감에 짓눌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가 자기들의 하나님이심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크기만큼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에서 티끌만큼의 존재감만 느껴도 골리앗의 존재감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전쟁통에서 이 존재감을 제대로 느꼈던 것은 다윗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능력을 보고 골리앗 앞에 나갔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무한하심 중에 극히 일부만을 가지고도 골리앗보다 큼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싸우셨고 다윗은 사울과 이스라엘 전군을 짓누른 골리앗을 조약돌 하나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도 조약돌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태산같이 느끼며 짓눌려서 질식합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감 중에 극히 일부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그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란 믿음 자체가 겨자씨 한 알만 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있음의 무한하심에 대해 겨자씨 한 알 만큼이라도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있는 삶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높이 든 것은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감이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반대로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내렸다는 것은 마음이 땅에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팡이가 땅에 닿듯이 마음이 땅에 닿아 있는 한 누구도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마음이 땅에 있는 한 여호와는 더 이상 나의 깃발이 되실 수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높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기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땅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땅으로 내려와 싸우십니다. 반대로 모세의 손이 점점 내려와 지팡이가 땅에 닿으면 이스라엘은 지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아말렉을 마주하고 이기려고 한다면 이미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은 놓친 것입니다. 선민임을 포기한 것이기에 선민의 전쟁에서 진 것이고 지켜내야만 하는 깃발이신 여호와를 뺏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무한하신 하나님 크기에 맞추어서 점점 더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느낄 수 있을까요? 마음이 하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길이 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다가도 종종 내려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여 지팡이를 쥔 손을 내렸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다가도 삶이 복잡해지면 어느덧 마음이 땅에 내려와 있습니다. 그렇기에 삶이 힘듭니다.
십자가는 이 땅의 존재감으로 채워진 내 마음이 죽는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마음은 반드시 이 세상 것들의 존재감에 정복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여호와 닛시의 의미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땅을 떠나야만 합니다. 모세가 땅을 디뎌야 할 지팡이를 하늘로 든 것처럼 우리 마음은 반드시 하늘로 들려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쥐듯이 내 마음을 쥐고 하늘로 올라가실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보좌로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면 깃발이신 여호와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싸우시겠다는 맹세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깃발로 지켜내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 맹세를 수행하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머물러야 하는 구체적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상황들은 치열하고 강렬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저절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 빨려 들어감은 십자가에서 막혀야 합니다. 내 마음과 세상 사이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다가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라고 멈추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죽었다면 내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의욕도 가질 수 없고, 계획도 못 세우고, 의지와 결단을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 대신 나의 마음은 이제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있음을 가능한 한 크게 확보하고 존재감을 늘려야 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머무는 시간만큼 무한하신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으로 수용하는 크기가 커집니다. 몸이 세상에 살면서도 십자가를 기억함을 통해 마음이 세상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반대 방향으로 주체성을 활용하면서 마음은 하나님께로 갑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수많은 아말렉이 나를 공격할 때 여호와 닛시를 기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내가 지켜내야 할 깃발입니다. 7절에서 책에 기록하여 교훈하라고 말씀하셨듯이 그 교훈을 받아들여서 절대로 마음이 십자가 너머의 세상으로 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해 바라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바라면 마음은 세상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이미 마음이 땅에 닿아 하나님의 존재감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을 찾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바깥으로 나온 마음은 진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에 불과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반드시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손을 높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시고, 다시 내렸을 때 이스라엘이 지게 하신 하나님의 연출의 의도를 분명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 의도대로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점점 더 커질 수 있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며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세상에 빨려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 현장에서 내가 지켜야 할 깃발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의 몸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의식에서 놓치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삶은 건성건성 살게 됩니다. 삶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신경만 쓰게 됩니다. 내가 건성건성 사노라면 하나님께서 직접 싸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여호와 닛시의 의미를 이루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기려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얻으려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미 당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어주신 하늘 아버지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감을 지켜냄으로써 맹세하신 대로 삶 속에서 역사하시며 이겨나가시는 하나님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업이 망해도, 직장에서 잘려도, 몸이 죽게 되었어도, 자녀들이 말썽이라도, 내가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하는 자가 아님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삶 속에서 예수님 붙잡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마음이 머물게 해주심으로 하나님의 존재감을 키우며 하나님을 나의 깃발로 지켜내는 자임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