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벼루에 먹 갈며
이영백
문방사우(文房四友)란 문인들이 가깝게 두고 친구로 여기던 네 가지 도구인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를 의미한다. 어린 날 서당에서 묵직한 돌벼루(石硯) 만났다. 뭉툭하고 마냥 무겁기만 한 돌벼루이었다. 서당 훈장님 앞에서 꿇어앉아 조신하게 먹을 갈아야 하였다. 좁은 서당 방안에 먹 갈면 묵향이 은은히 방에 가득 채운다. 코를 즐겁게 만든다.
벼루를 “연지(硯池)”라고 한다. 좋은 벼루 하나 마련하고, 좋은 글귀를 받아쓴다면 그렇게 행복해 할 일이다. 연지 곧 벼루는 먹을 가는 데 쓰는, 돌로 만든 문방구를 가리킨다. 연적의 물을 약간 연지에 붓고, 먹 막대 끝을 살살 돌려가며 평평한 벼루에다 먹 갈아서, 마침내 글씨를 쓴다.
연지의 이름으로 최초 고려시대에는 피로(皮盧)와 벼루를 동시에 사용하였다. 묵지(墨池 : 묵즙을 모으도록 된 오목한 곳으로 硯池라고도 한다)에 물을 넣어 두어 열흘이상 되어도 마르지 않는 것을 좋은 벼루로 친다.
먹은 원료에 따른다. 소나무를 태워 그을음을 받아 만든 송연먹(松煙墨), 식물의 씨앗으로 만든 유연먹(油煙墨), 주로 많이 사용하는 카본 먹을 양연먹(洋煙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먹에는 소나무 그을음을 재료로 한 송연묵(松煙墨)은 “숯먹”이라 하고, 목판본에 사용하여 진하다. 그러나 기름을 태운 그을음을 재료로 한 유연묵(油煙墨)은 “참먹”이라 하고, 금속 활자본으로 사용하여 색이 흐리다.
한때 뜻을 가지고 수묵담채화라도 배워볼 양으로 사군자 치는 책도 사고, 좋은 벼루와 진한 숯먹도 하나 산 적이 있다. 그때에는 가보쯤으로 여기고 비싼 돈 들이어 사두고만 있다. 이제 그 벼루와 먹 담은 상자를 통째로 내자가 어디다 깊이 치워버렸다. 또 찾아 장롱 위에다 갖다 놓아두었다.
내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민화나, 수묵담채화를 배우려는 뜻만 가지고 여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현대화된 볼펜에 의존하고, 시대에 따라 컴퓨터 자판기만 두들기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게으른 탓이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벼루에 팔이 아프도록 먹 갈고, 연지에 먹물 찍어 사군자라도 치고 싶다. 현완법(懸腕法)으로 입춘방을 쓸 때 은은한 묵향 즐기며 옛 시절이 새삼 그리울 텐데 아직 생각뿐이다.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