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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모든 영역에서 보스를 아웃시켜라>의 줄거리 :
아직 실제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계속해서 가나안 땅과 관련된 내용들이 이어져 나갑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내게 주어지는 삶의 현장을 가나안 땅으로 만들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내 마음에 보스로 자리 잡는 존재를 마음에서 아웃시키면 됩니다. 즉 존재감 일등의 대상을 마음속에서 아웃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일등으로 실감하면, 그 영역은 곧바로 가나안 땅이 됩니다. 가나안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 책임이며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끌림을 받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보스를 아웃시켜라
(민수기 27:1~23)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7.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8.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13.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19.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20.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민수기 27장에는 크게 세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1~11절까지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할당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12~14절은 하나님께서 므리바 사건을 다시 언급하시며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이고, 18~23절에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모든 영역에서 보스를 아웃시켜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여기서 보스란 내 마음속의 존재감 일인자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고, 상황이나 문제 혹은 변수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내 마음속의 존재감 일인자를 우두머리라는 뜻의 보스에 비유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과 관련된 주제가 기록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말씀을 접하면서 우리는 가나안 땅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의 분배는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가나안 땅이란 지정학적으로는 지금 전쟁이 한창인 팔레스타인 땅을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 보자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주어진 가나안을 정복하여 실제 나의 땅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2025년 10월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실제로 약속의 땅을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고 약속의 땅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우리가 읽은 내용을 정리해 보면서 가나안 땅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가나안 땅이 상징하는 바는 죽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입고 들어가게 될 천국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지금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마음이 예수님을 옷 입고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가나안의 삶은 시작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가나안 땅을 실제로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강력하고 우선으로 실감하는 상태가 가나안을 사는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가나안 땅을 점령해 갈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몸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고 가담해야 하는 삶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영역들에는 보스라 불릴만한 대상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일인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삶의 영역이 바뀔 때마다 존재감의 일인자는 바뀔 수 있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보스가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세상의 대상이 보스가 된 상태에서는 가나안의 삶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독사의 새끼처럼 이 땅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존재감 일인자인 보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삶은 결코 가나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나안을 살기 위해서는 각종 삶의 영역에서 존재감 일인자인 보스를 쫓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보스를 쫓아냄으로써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장 먼저 느끼고, 가장 크게 실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삶의 영역은 가나안 땅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출근하면 마음에서는 상사나 사장님의 존재감이 일등입니다. 우리가 직장을 가나안 땅으로 살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보스가 되어버린 상사나 사장님을 아웃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대신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장 먼저 느끼고 가장 크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상사나 사장님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에는 5초도 10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부활 승천하심을 마음이 따라갑니다. 그러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존재감의 일인자로 실감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에서 하나님 있음에 대한 실감이 형성되면 내 몸이 처한 자리는 곧바로 가나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나안 땅을 점령해 가는 과정입니다.
일단 마음에서 하나님을 존재감의 일인자로 여기며 가나안 땅의 삶이 시작되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하나님 뜻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실감하는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의 형편과 상황과 조건은 세상 기준으로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습니다. 현재 있는 상태에서 나는 가나안을 살 뿐입니다. 그 가나안을 살아가는 방법은 마음에서 보스를 아웃시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일등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보스를 아웃시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이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일등으로 실감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일종의 파격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을 두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20세 이상 남자를 계수했던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가나안 땅의 분배는 제비뽑기로 하는데 남자가 가장으로 있는 집에 대해서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자체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여자는 계수되지도 않았고 소유된 물건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슬로브핫 가문의 사건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사회적으로 여자의 신분과 권위가 매우 낮게 취급되던 상황에서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매우 당돌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은 모세에게 나가 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었음을 전하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할당될 땅을 자신들이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딸들도 땅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 통념을 염두에 두자면 온 회중 앞에서 모세 앞에 나가 이러한 요청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자들 스스로가 인구수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고, 남자에게 소유되는 물건보다 좀 나은 처지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러한 사회 통념을 깨고 모세 앞에 나가 땅을 할당해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모세도 이러한 상황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기에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이름으로 할당된 땅을 딸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8~11절에서 이와 관련된 규정을 정해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슬로브핫의 다섯 딸이 땅을 할당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파격적인 일을 허락하신 이유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 취급을 할지라도 하나님도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마음이 있고,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할 수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러한 여자들은 가나안 땅을 직접 할당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통념보다 우선시되는 일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나선 상황에 매우 신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 통념을 깨고 가나안 땅을 요구한 것에서 마음의 보스를 쫓아내는 결단을 보신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있음을 우선으로 느끼고 강하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다섯 딸을 통해 이러한 자들만이 가나안 땅을 자기 몫으로 받는 자격이 있다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3장 26~28절을 보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세례입니다. 세례는 곧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십자가 죽음을 고백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크게 우선으로 실감하는 상태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에서 놀라운 점은 슬로브핫의 딸들에게서 드러난 믿음의 상태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자기 몫을 챙기는 다부진 딸들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땅에 대한 아까움과 아쉬움을 누그러뜨릴 수 없어서 통념을 깨는 파격을 감행한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상황은 가정이라는 영역의 보스에 해당하는 존재감 일인자가 없어진 상황입니다. 그러자 이 딸들은 이제까지 아버지가 가리고 있었던 하나님을 직접 느끼고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요구하는 파격적인 일을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통념적으로라도 이스라엘의 모든 여자들은 가장인 아버지나 남편 혹은 아들에게 귀속된 존재였습니다. 남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하나님을 실감할 때, 여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관계하는 입장과 위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받는 사람은 남자였습니다. 따라서 남자가 가장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는 가운데, 여자는 남자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가장으로서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들이 하나님을 실감할 때, 여자들은 그 실감을 토대로 해서 하나님을 믿고 관계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러한 통념을 깨뜨린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파격적인 사건은 모든 회중이 다 모인 앞에서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모든 여자가 깨어날 것을 촉구하십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남편의 이름으로 할당된 땅에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의 삶은 남편의 하나님 실감의 토대 위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너희도 나를 직접 대면하여 나에 대한 실감을 가져라.’라는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선민 여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가정이라는 삶의 영역에서 가장이라는 보스를 아웃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이 실감하는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관계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여자들은 직접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먼저 느끼고 가장 크게 실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까지 내 마음속에서 존재감 일인자 보스인 가장을 아웃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취지는 그다음에 곧바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므리바 물 사건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책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서 므리바 물 사건을 다시 상기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다른 대상과 구분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고, 모든 대상은 있게 된 것임을 구분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또한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이고, 모든 대상은 오직 그 좋음이 채워졌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재료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좋음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이로부터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므리바에서 이스라엘은 불신앙을 보이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모세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실감하고 있는 자로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이라는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의 패역함과 불신앙적 모습에 마음이 휘감겼습니다. 이 순간 모세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패역한 이스라엘이 보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세의 마음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제치고 존재감의 일인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실감하며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서 존재감 일등인 패역한 이스라엘에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화를 내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되는 문제입니다. 회사에 출근하면 사장님이 보스입니다. 마음에서도 사장님이 일등 존재감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서 존재감이 일등인 대상에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서 건강 문제가 일등이라면 집안에 다른 문제가 있든 말든 건강 문제에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나안을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몸이 아프고, 돈도 없고, 집안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마음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강력하게 실감한다면 그 상황은 가나안이 됩니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일등 존재감이기에 하나님께 반응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반응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이 가나안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도에서 모세에게 므리바 물 사건을 다시 언급하시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확고한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가장 먼저 실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 들어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므리바 물 사건을 다시 언급하심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진입해야 하는 모든 이스라엘의 마음에서 지도자 모세의 존재감을 아웃시키는 것입니다. 선민에게는 항상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지도자의 존재감을 마음에서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을 특정한 소수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인도해 나가십니다. 소수의 지도자를 통해 모든 선민 각자가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실감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실제 삶의 상황 속에서 가나안 복지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공포하는 지도자는 눈에 보입니다. 따라서 선민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지도자의 존재감을 실감하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선민들을 이끌던 지도자는 모세였습니다.
이때는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으로부터 38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20세 이상은 다 죽었고 20세 이하였던 자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모세만 보면서 38년을 살아왔습니다. 이들에게 모세의 존재감은 대단하고 강력하게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예견하셔서 므리바 물 사건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믿음 없음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함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세대에게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서 가정의 보스인 아버지의 존재감이 제로가 되고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먼저 느끼고 가장 크게 실감하면서 사회적 통념의 절대적인 두께를 뚫는 파격을 수행합니다. 지금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8년 동안 지도자 모세의 존재감은 매우 컸습니다. 실상 선민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보다는 보이는 모세의 존재감을 더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모세에게 흠을 만들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이제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가야 할 이스라엘의 마음에서 모세의 존재감이 제로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적 지도자들의 운명이자 딜레마인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자기 사상이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엄연한 있음인 하나님과 천국과 예수님과 십자가의 효능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사실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부활도, 승천도, 우편에 계심도 사실입니다. 다만 문제는 실감하는 것입니다. 설악산이 사실이고, 동해가 사실인 것처럼,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실감하지 못합니다. 영적 지도자란 이처럼 세상 것만 실감하고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는 선민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실감할 것을 종용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실감하라! 하나님을 실감하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실감하라는 말에는 동의하면서도 정작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영적 지도자의 존재감이 마음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흠을 허락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민은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먼저 느끼고 가장 크게 실감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모세를 동행하지 못하게 하심을 통해 이들로부터 지도자 모세의 존재감을 제로로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지도자들의 운명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스스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다 보면 교인들이 하나님보다 목사를 좋아하는 상황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에게 흠을 허락하신 이유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보다 하나님을 실감함이 약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는 딱 한 번 실수를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선민이 모세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더 강하게 느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어느 순간이 되면 자기가 가르친 선민 앞에서 하나님의 라이벌이 됩니다. 그럴 때는 자기 존재를 부인하고 납작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선민의 마음속에 자기 존재감이 제로가 되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제는 모세를 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자.’라고 여길 수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참 어렵고도 심오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다만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므리바 물 사건을 다시 언급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가 모세의 자리를 대체하게 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열 명의 정탐꾼과는 다른 의견을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14장 8~9절을 보면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는 표현이 특징적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 대해 영이 머무는 자라고 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다른 정탐꾼들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의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마음속에 보스가 되어 들어오는 가나안 족속들을 아웃시키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우선으로 실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호수아에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여호수아를 영이 머무는 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머물 때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체로 접하는 일들만을 실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의 오감이 되어 주시면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없는 하나님을 보이는 어떤 대상보다도 더 강력하게 실감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 예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성령이 임하셨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은 계셨고, 원래부터 천국도 있었으며, 예수님은 천국에 올라가셨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들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실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상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더 강력하게 실감하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들지도 않지만 분명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하늘을 확연하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 대해 영이 머무는 자라고 하신 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을 하나님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게 실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렇게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을 실감하는 문제에 대해서 성령님이 임하셔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령님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실감하는 것은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선물로 받는 것이지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으로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주 보는 대상이 되시면서 하나님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실감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수아가 모세와는 달랐던 점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뜻을 받는 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대면하며 실감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제사장 엘르아살이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어디로 가야 하느냐 가지 말아야 하느냐에 대해 제사장 엘르아살은 제비 뽑아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여호수아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 뜻대로 움직여 갑니다.
대중들이 볼 때 여호수아는 바보 같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바보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모세는 직접 하나님의 뜻을 하달받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모세가 행하는 것처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중들이 볼 때 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의 말만 따르는 자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절차를 통해 영도자이자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능가할 수 없도록 한계를 만드십니다. 이것은 제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일뿐 백성들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사장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의 마음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능가할 수 없는 존재들로 국한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영역에서 보스처럼 여겨지는 어떤 존재감의 일인자도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우선으로 실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상황을 역전시켜야만 합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존재감의 일인자가 되시는 영역은 무조건 가나안 땅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실감하는 동안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것들이 됩니다. 실감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뜻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고 움직이시며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렇게 내 마음속 보스를 아웃시킴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을 가나안 땅으로 바꾸어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있음보다 더 강하게 실감하는 모든 보스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아웃 되게 함으로써 모든 삶의 영역을 빠짐없이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