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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다곤 신전 붕괴시키기 생활화>의 줄거리 :
삼손은 자기 눈알을 뺀 일에 대해서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갚으면서 생을 마감합니다. 눈알이 빠졌다는 것은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대상이 끼어들어 와 마음에 밀착하게 됨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느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이렇게 눈알이 뽑힌 상태에서 삶을 삽니다. 그러면 삶의 현장은 다곤 신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곤 신전 안에서 살았던 하루는 반드시 붕괴시키고 나서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다곤 신전 붕괴시키기 생활화
(사사기 16:23~31)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블레셋의 압제에 이스라엘 전체가 완전히 정복당하여 주눅이 들었을 때, 삼손은 그 압제에 혼자 저항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도 동조하거나 힘을 합쳐 돕지 않았으나 삼손은 혈혈단신으로 고군분투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삼손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다곤 신전 붕괴시키기 생활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다곤 신전을 붕괴시킨 삼손의 최후를 우리도 일상적으로 생활화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삼손이 다곤 신전의 중심 두 기둥을 왼손과 오른손으로 붙잡고 무너뜨려서 원수를 갚으려 했던 주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28절을 보면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이러한 이유에서 다곤 신전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현장마다 다곤 신전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다곤 신전과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내가 눈알이 뽑힌 상태에서 살았던 삶을 그냥 놔두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됩니다. 눈알이 뽑혀 다곤 신전에서 살았던 삶을 반드시 붕괴시키고 완전히 말소한 뒤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앞서 언급되었습니다만 눈알이 뽑힌 상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이유에서 삶의 현장이 다곤 신전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눈알이 뽑힌 상태는 육체의 시각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눈알이 뽑혔다는 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래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아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들릴라가 끼어들어 오려고 기를 씁니다. 삼손은 버티다 버티다 결국 들릴라에게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삼손과 하나님 사이에 들릴라가 끼어들어 왔듯이,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대상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이 들어올 수 있고, 건강이 들어올 수 있고, 자녀가 들어올 수 있고, 배우자의 문제가 들어올 수 있고, 승진 문제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 마음에서 첫 번째 자리이자 가장 친밀한 자리에 하나님 이외의 대상이 들어올 경우에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그 좋음과 나쁨을 하나님께 밀착해서 받는 느낌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게 밀착되어서 받는 느낌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삼손의 눈알이 뽑힌 상태가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사업 때문에 좋고 나쁨을 느낍니다. 이는 곧 마음이 사업과 밀착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건강이 좋고 병이 난 것은 나쁘다고 여긴다면 건강에 밀착한 것이고, 또 자녀가 합격한 것은 좋고 떨어진 것은 나쁘다고 여긴다면 마음이 자녀와 밀착한 것입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서 좋고 나쁨을 느끼는 대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대상은 내 마음과 가장 친밀한 대상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밀착한 대상으로부터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대상에 마음이 밀착해서 좋고 나쁨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좋고 나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삼손의 눈알이 뽑힌 상태는 바로 하나님에 대해서 느낌이 죽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를 다른 대상이 가로막고 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느낌이 없는 상태로 살았던 것이 다곤 신전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다곤 신전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없는 삶을 무너뜨리고 말소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일매일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하루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없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나와의 관계에서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고,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고, 유일한 주권자이시라는 것이 고려되지 않으면 나는 지금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죽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사업에 밀착된 상태입니다. 있음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도 있고 사업도 있는데 하나님의 있음이 고려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또한 좋음이라는 측면에서도 좋음은 사업이 잘 되거나 안 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느끼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사업이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음이 사업에 밀착돼서 좋고 나쁨으로 느낄 때 나오는 말과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는 말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느낀다면 ‘하나님이 있기에 사업이 안 돼도 나쁜 것이 아니고 잘 돼도 좋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이루시는 일이기에 이유가 있고 의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눈알이 뽑힌 상태입니다.
삼손은 눈알이 뽑힌 상태에서 원수 갚기를 간구합니다. 앞서 눈알이 뽑힌 것은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죽어버린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하루를 사는 동안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하나도 고려되지 않았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렇게 살았던 나의 삶을 붕괴시켜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없었던 삶으로 지워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대로 놔둔 채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또 반복한다면 눈알이 빠진 상태의 삶은 계속됩니다. 눈알이 빠진 것은 하나님의 느낌에 대해 죽은 상태에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토대 위에 또 내일을 살고, 그 토대 위에 또 모래를 살고, 그 토대 위에 또 글피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비장한 최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눈알이 빠진 상태에서 다곤 신전의 삶을 붕괴시키고 말소하라는 것입니다. 없애버리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오늘을 토대로 다음 날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현장을 왜 다곤 신전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다곤이라는 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다곤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여겨지던 바알의 아버지입니다. 블레셋은 가나안 족속들이 바알 신에게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모습을 보고는 한술 더 떠서 바알의 아버지 신을 섬겼습니다. 쉽게 말해 ‘자존심 상하게 가나안 족속들의 신을 섬기면 되겠느냐? 우리는 바알의 아버지 신을 섬기자! 풍요와 다산을 아들이 더 잘 다스리겠느냐? 아버지가 더 잘 다스리겠느냐?’라고 해서 섬겼던 것이 다곤 신이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입니다. 이 시기의 블레셋은 당연히 아버지 신이 더 잘 다스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다곤 신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다곤 신전은 비유적으로 풍요와 다산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곤 신전을 고고학적으로 고증해 보면 정확한 외형까지는 알 수 없으나 내부 구조를 보면 외벽 안쪽으로 가운데에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둥과 외벽 사이를 수없이 많은 대들보로 이었습니다. 마치 우산살처럼 대들보들이 중앙의 기둥으로 모이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들보 중앙을 중심으로 절반쯤은 비워두고 외벽과 대들보 중간 정도의 넓이로 빙 둘러서 지붕을 만들어 2층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평평한 지붕에 올라가서 중앙에 난 구멍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고, 아래층에도 모일 수 있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삼손이 잡혀간 다곤 신전은 기둥이 두 개 있었습니다. 다곤 신전의 외벽을 빙 둘러 가며 대들보가 우산살처럼 연결되어서 중앙의 두 기둥이 받치고 있었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였기에 삼손이 두 기둥을 허물어뜨리자 지붕도 무너집니다. 본문을 보면 무려 삼천 명이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고 합니다. 삼천 명이면 대략 200톤 정도에 이르는 무게입니다. 그 무게로 인해 건물이 허물어지면서 외벽까지 함께 무너졌고,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까지 몰살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을 다곤 신전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눈알이 빠진 상태에서 삶의 현장을 살았다면, 삼손이 다곤 신전을 무너뜨린 것처럼 나의 오늘을 무너뜨리라는 것입니다. 다곤 신전이 의미하는 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인생의 목표는 풍요와 다산입니다. 쉽게 말해 ‘부자 되고 싶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꼭 돈이 많아야만 부자가 아닙니다. 지식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인기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명예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부자 되기를 바람이란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모든 가치가 풍요롭기를 바라는 것이고, 다산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결실이 많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요와 다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들에 대하여 풍요와 다산을 목표로 해서 삽니다. 결국 내가 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풍요와 다산을 목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곤 신전의 두 기둥에 우산살처럼 얹혀 있는 대들보의 모습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관계를 떠받쳐 주는 두 기둥은 바로 좋음과 나쁨입니다. 다곤 신전으로 비유되는 관계에는 좋음의 기둥과 나쁨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관계를 하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조금도 내 마음에서 좋음과 나쁨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관계에서 제외됩니다. 관계의 대들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과 대들보처럼 관계가 맺어짐으로써 내 삶은 관계가 집합된 구조물이 됩니다. 저 같으면 아내에 대한 관계가 있고, 자녀에 대한 관계가 있고,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여러분들에 대한 관계가 있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관계가 있고, 동창들에 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관계는 좋음과 나쁨의 두 기둥으로 유지됩니다. 내 마음이 이 관계로부터 좋음과 나쁨을 느낄 수 없다면 관계에서 제외됩니다. 내 마음에서 좋음과 나쁨을 느낄 수 없는 대상이라면, 삶의 현장이라는 구조물을 떠받치는 대들보에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사람과 관계를 맺든 사건과 관계를 맺든 관계의 대들보가 떠받치고 있는 이유는 내 마음이 그 관계의 대상들에 대해서 좋음과 나쁨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것은 때마다 다릅니다. 지금은 배우자에게 밀착하여 좋음과 나쁨을 느끼지만, 자녀가 눈앞에 있으면 자녀에게 마음이 밀착하여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또 사장님이 있으면 사장님에게 마음이 밀착하여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이렇게 관계의 대들보들은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내 마음의 중앙기둥에 얹혀서 구조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곤 신전으로 비유되는 삶의 현장입니다. 문제는 이 안에서 눈알이 빠진 상태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직장 상사를 만나면 직장 상사와 마음이 밀착하게 됩니다. 직장 상사가 칭찬하면 기분이 좋고, 나무라면 기분이 나쁩니다. 이런 식으로 대들보가 하나 만들어집니다. 또 부하 직원과 만나면 또 다른 대들보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관계든지 좋음과 나쁨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로부터 좋음과 나쁨을 느낌으로써 떠받쳐집니다. 이웃으로부터, 형제로부터, 자매로부터 좋음과 나쁨을 느끼면서 대들보가 떠받치고 있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라는 하나의 구조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곤 신전과 같은 일이기에 깡그리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역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좋음과 나쁨을 느끼지 못하는 대상은 관계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이란 모든 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세상일에 대해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마음이 죽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면, 세상에서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다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이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관계의 대상들로부터 풍요와 다산을 원합니다. 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람이나 사건의 관계가 다곤 신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마음이 밀착한 관계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에서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상태가 죽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는 좋음도 없고 나쁨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는 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한 좋음과 나쁨이라는 다곤 신전을 무너뜨렸다면, 내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으로부터만 좋음과 나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나쁜 일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만이 유일한 좋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느끼게 되면 사업이 안 되는 것은 좋음과 나쁨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눈알이 뽑힌 것처럼 마음이 사업에 밀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되면 기분이 나쁘고, 사업이 잘 되면 기분이 좋은 채로 살았습니다. 이것을 놔두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비장한 최후를 하루의 마무리로 가져와서 생활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자녀에게 밀착했다면 눈알이 뽑힌 상태입니다. 자녀의 상태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자녀라는 대들보가 내 삶의 구조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곤 신전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자녀에게 마음을 붙인 상태에서 좋고 나쁨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의 형통 여부에 따라, 자녀가 하는 일의 성과에 따라, 자녀의 풍요로움의 여부에 따라 내 마음에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면 완전히 다곤 신전인 상태입니다. 자녀와의 관계가 다곤 신전의 구조물을 이루는 대들보가 된 상태입니다. 나는 눈알이 뽑힌 상태에서 자녀에게 좌우되어 하루를 살았습니다. 이 상태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또 건강이 안 좋습니다. 마음이 건강 상태에 밀착해서 하루 종일 우울했습니다. 또 건강이 좀 나아진 것 같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것이 눈알이 뽑힌 상태에서 다곤 신전 안에서 살았던 삶입니다.
28절을 보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삼손이 눈알을 뽑힌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릴라가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손은 들릴라가 끼어들어서 눈알이 뽑힌 상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또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은 관계의 구조물인 다곤 신전입니다. 관계의 대상들이 전부 풍요와 다산을 원하고 있을 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물 안에서 나도 그 사람들과 똑같이 눈알이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그 삶은 반드시 지워버리고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잠자기 전에 다곤 신전을 붕괴시켜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한 것과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2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눈알이 빠진 상태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권자 되심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삽니다. 이것은 마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라고 말하는 상태와 똑같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눈알이 빠진 상태에서 다곤 신을 섬기는 자들과 똑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풍요와 다산을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불러다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여기서 재주를 부리게 했다는 것은 춤추게 했다는 뜻으로서 조롱거리로 만들었음을 의미합니다. 삼손은 눈알이 빠진 상태에서 더듬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은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놋줄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막대기로 찌르고 주변에 방해물들을 놓아서 걸리게 했습니다. 삼손은 움직일 때마다 막대기에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일어나고 더듬거리기도 하면서 조롱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토록 삼손을 조롱하고 싶어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손은 이스라엘 전체 중에 블레셋의 압제를 개의치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고작 나귀의 새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생각하기만 해도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그랬던 삼손이 이제는 눈알이 빠지고 놋 줄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그 대단했던 삼손이 조그마한 방해물에 걸려 자빠지고 넘어지는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구조상 어쩔 수 없이 풍요와 다산을 원하며 다곤 신을 섬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알이 빠져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라는 느낌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눈알이 빠진 상태이기에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만이 느낌의 대상이고 그 느낌에 반응하며 삽니다. 바로 이 상태가 삼손이 걸려서 넘어지고 자빠지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눈알이 빠져서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볼 수 없습니다. 사업이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싫습니다. 자식이 형통하면 좋고 불통하면 싫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넘어지고 자빠지는 것이고, 마귀와 귀신들이 바라볼 때 조롱거리가 되는 모습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와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압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알이 빠져서 놋 줄에 묶여서 넘어지고 자빠지는 것을 보는 것과 똑같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산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웃들이나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넘어가는 처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그들의 믿는 신이 나를 그들에게 던져 넣는 것처럼 눈알이 뽑혀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삼손이 하나님과 밀착했을 때 블레셋을 개의치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한 상태에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개의치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개의치 않는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밀착한 사람은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고,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느낍니다. 이것을 충분히 느낄 때 나는 하나님이 내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삼손의 눈알이 뽑힌 상태는 내 마음이 세상 사람이나 문제나 사건에 밀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죽어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에 대해서 좋고 나쁨의 두 기둥을 세워놓고 다곤 신전을 건축하며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밀착하여 느끼는 좋고 나쁨의 두 기둥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끌어안고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루를 돌아보면서 다곤 신전의 삶을 살았던 것을 반드시 찾아내서 무너뜨리고 붕괴시키고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절대로 오늘 살았던 다곤 신전의 터 위에서 내일의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삼손은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에 삼천 명이 넘는 블레셋 사람들과 방백들을 죽였지만 블레셋의 지배력과 영향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한 일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한 사람 한 사람, 선민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완전히 이 세상의 삶의 현장인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도록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삼손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하신 일이란 다곤 신전의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내 삶의 현장을 붕괴시키는 비결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세상에 대하여 좋음과 나쁨을 느끼는 두 기둥을 무너뜨림으로써, 더 이상 내 삶은 다곤 신전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밀착하여 하나님에게서만 좋음과 나쁨을 느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내는 그릇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다곤 신을 섬기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산해 나갈 때, 내 삶의 현장은 다곤 신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알이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죽어버리고, 하나님에 대해 소경이 된 상태에서 살았던 삶의 구조물을 뚜렷이 떠올리며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무너뜨리고 잠자리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 기둥을 무너뜨리며 다곤 신전을 붕괴시킨 비장하고도 장렬한 삼손의 최후가 매일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의 하루를 매듭짓고 마무리 짓는 최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가능한 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지언정 다곤 신전이 되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