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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단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작품은 중앙문예지에 일단 발표하고 조금 격이 떨어지는 잡지 등에서 청탁이 올 때는 그걸 다시 써먹곤 했는데 이번 부천문학에 실린 작품은 처음 발표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주간으로서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조금은 속 보이는 짓일지 모르겠습니다.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겪는 일인데도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다가 알람소리에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요즘 들어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긴커녕 찌뿌드드하다. 여자도 아니면서 갱년기를 겪는 덜 떨어진 남자가 있다는데 내가 그런가? 자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만 내처 잠을 자지 못하고 전립선이 헐거워져 그런지 오줌이 마려워 한번은 꼭 일어나야 한다. 새벽이면 주체하기 힘들었던 아랫도리의 열망도 예전처럼 강직하지 못하고, 무심코 벗어놓은 안경을 찾지 못해 사방을 헤매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희망 섞인 기대보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조바심이 앞서니…. 오십대 중반에 들어선 남자의 씁쓸한 초상이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른 새벽 다섯시. 어린이날이자 일요일. 고향에서 동창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사십삼 년. 언제나 날짜를 주말이나 공휴일로 잡는지라 서울에서 갔다 오려면 밀려드는 차량들 때문에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고향 가까이 사는 동창들보다 수도권에 사는 수가 많아 그 고생 끝에는 다음엔 꼭 서울에서 동창회를 하자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도, 언제 그랬냐 싶게 그런 고생과 다짐, 불평불만은 쏙 들어가 버리고 어김없이 고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하긴 이런 핑계로나 찾아가지 어디 쉽게 마음먹은 대로 다녀올 수나 있었던가.
디지털카메라와 요즘 읽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와 수첩을 챙겨 넣은 가방을 들고, 택시를 탄다는 걸 굳이 차를 가지고 따라와 ‘그녀와 재미있게 놀다 오셔’라며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중동역에서 전철을 타 사당역에 도착한 게 약속시간인 일곱시보다 약간 빠른 여섯시 오십분. 이미 도로 가장자리엔 25인승 노란색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그 버스 주변에는 스무 명 정도의 친구들이 간편복 차림으로 옹기종기 모여 잡답을 나누고 있었다.
나를 보자 손을 잡는 친구들을 제치고 아주 오래 전부터 동창회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선미가 두 팔을 벌려 덥석 안기부터 한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보는 정겨운 얼굴들. 나이에 비해 검은 게 거의 없이 하얗게 된, 숱이 적어 엊그제 파마를 한 내 머리를 보고 하는 말들이 무성했다. 아인슈타인 같아, 베토벤 닮았어, 꼭 대학교수 박사 타입이야,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머리까지 예술가 티를 내네, 전철 타면 일어서는 사람 많겠어.
맞다. 서울을 다니다보면 전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앉아있던 젊은이들이 일어선다. 한사코 앉지 않으려 해도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어 앉긴 앉는데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어쩔 땐 경로석에서 노인들이 부를 때도 있다. 서서 가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가라고.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누구나 하는 말을 실감케 하는 요즘이다. 내가 진짜 그렇게 늙어 보이나? 그런 가운데 나를 웃게 하는 소리가 비로소 들린다. 아녀, 아직 얼굴은 팽팽하고만, 주름이 하나도 없잖아. 그럼 그렇지, 하연이다. 내 영원한 첫사랑. 얼굴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아내를 새벽부터 빈정거리게 만든. 그 빈정거림 속에는 우려와 경고가 함께 섞였으리라.
동창회라면 만사 제쳐놓고 참석하는 수도권의 고정멤버들은 이번에도 얼추 다 보인다. 음식점이 잘 돼 부동산을 만만치 않게 장만한 알부자 희욱이를 비롯해서 건축을 하는 종도, 동창회장이자 공인회계사인 동우, 은행지점장인 윤호, 골프장 매니저인 태각, 노래방을 하는 용수, 중화요리 재섭, 식품도매상 홍민, 시내버스 기사가 된 표경, 굴삭기 수민, 사무집기를 만드는 동진이 등 남자들과 선미, 봉희, 경자, 향실, 보순, 정숙, 남현, 춘선, 하연이 등 여자들까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연이 된 짝과 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얼굴에 담고 나타났다. 다 그렇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런대로 살 만한 친구들이다. 좋아 선택을 했든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든, 주어진 시간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랑하고픈.
높은 빌딩 숲 사이의 거리는 휴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황사도 없어 봄기운에 바람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총무인 용수가 전화로 더 이상 참석할 친구가 없다는 확신이 섰는지 모두를 버스 속으로 몰아넣었을 때, 나와 한 동네에 살았던 영등포 일대에서는 회장님이라 불리는 춘상이가 BMW를 몰고 나타났다. 그가 차에서 내려 얼굴을 보임과 동시에 조수석에서 내리는,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경근이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아니 경근이가! 춘상이는 중장비사업으로 100억대의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에 반해 초등학교를 비롯해 그가 다니던 중고등학교에서 일등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경근이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서울 법대에 당연하다는 듯 들어갔으나 유신 치하, 운동권에 뛰어들어 이학년 때 제적을 당해 그때까지 쌓아온 불패의 신화를 멈춰야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직업도 갖지 못하고 술에 빠져 살다가 결혼도 하지 않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간경화까지 얻어 고달픈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러니 사법고시 합격 같은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틀림없이 나라의 큰 동량이 되리라던, 제적을 당했을망정 그의 천재가 그 제적마저 더 빛나게 하리라는 기대(운동권에서 활동하다 제적당하고 투옥된 경력이 오히려 정치권 진입을 순조롭게 하는)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 후로 그는 단 한 번도 고향에서나 동창들 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은둔하다시피 지내왔으니. 그가 동창회에 참석한 것만도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야, 차를 가지고 오면 어떡해. 어디에다 빨리 주차시키고 와.”
용수가 손가락질은 하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하자 그들은 버스로 올라와 친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그들의 객관적으로 드러난 현 위치를 잘 알기에 얼굴도 뚜렷이 구별되는 듯했다. 빛나게 그리고 어둡게. 친구들은 어릴 적 별명을 부르며 자주 보는 춘상이보다 경근이를 더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긋지긋하게 공부를 못해 얻게 된 장 꼴통이란 뜻의 장꼴과 고개가 언제나 옆으로 틀어져 있다 해서 붙여진 경근이의 별명 삐틀이. 맨 뒤 창 쪽에 앉았던 나도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춘상이와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는 경근이의 손을 조금은 어색한 기분이 되어 잡았다.
“잘 왔네. 이거 얼마만이야?”
“그려, 잘 지내지? 지난번에 나온 책 진짜 재밌게 읽었네.”
세속을 떠나있지는 않았던가, 지난번에 나온 책이라면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포르노에 근접하다는 평을 들었던 작품이다. 불륜도 또 다른 사랑의 미학이라 우기며 메이저 신문사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를 하면서 남자들에게 공적1호라는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 책으로 나왔던 것이다. 병명을 알고서 본 탓인지 그의 얼굴이 더욱 검게 보이고 눈빛은 애잔했으며, 당당하다 못하여 거들먹거리는 인상까지 풍기는 춘상이와는 대조적으로 꾸부정한 게 미소마저 쓸쓸해 보였다. 그렇게 한바탕 떠들썩한 인사가 끝나고 따로 볼일이 있어 차를 몰고 간다는 그 둘이 버스에서 내리자 우리는 출발했다.
마이크 시험 중이라는 말이 들리면서 용수의 인사가 시작됐다. 옆자리는 사춘기의 내 머릿속을 온통 지배해버린 하연이의 차지였다. 일편단심 너를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지. 아직까지 아련하고도 소중한. 너도 그걸 알기에 이렇게라도 만나면 짝이 되는가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믿을 수 없는 바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형체도 없이 불쑥 생겨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고 엄청난 세기를 지녔다가도 언제 그랬냐싶게 시들해지며 영속성을 갖기가 아주 힘들다는. 난 먼 산과 들판을 응시했다. 그러나 보이는 풍경은 건성이고 싹수가 노랗다는 말이 자꾸 되뇌어졌다. 춘성이와 경근이를 보고 난 감상이리라.
어렸을 때 춘성이의 행동거지를 본 어른들은 한결같이 싹수가 노랗다고 했다.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그 떡잎이 싹수였으리라. 장래에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거나 살아갈 삶이 빤하다는 부정적인 뜻이었다. 그에 비해 경근이는 그런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않았거니와 굳이 ‘싹수’로 표현한다면 ‘있다’거나 ‘반듯’하다거나 ‘싱싱’하다고 했을 것이다. 4학년 때까지도 책을 읽지 못한 아이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춘성이를 맡아서 가르친 짝이 경근이었고 공부를 잘하는 축에 들었던 나도 찬웅이를 가르쳤었다. 여태껏 동창회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찬웅이는 춘천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하여튼 머리를 쓰는 일에는 젬병이었던 반면에 짓궂은 장난질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이가 또 춘성이어서 어른들이 보기에 커서 큰 인물이 되기는 예전에 틀렸다는 말을 싹수가 노랗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경근이는 요즘 말로 하면 ‘범생이’를 넘어 ‘엄친아’ 쯤 될 것이다.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까. 승승장구하던 그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경이에 찬 시선에도 시기나 질투 같은 시시한 감정은 전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평범하게 공부를 잘하는 축에 든다기보다 차원이 다르게 뛰어났었다. 그는 우리가 차라리 넘을 수 없는 벽, 아예 넘으리라고 생각조차 못할 산 같은 존재였다. 그런 친구가 청년 시절에 겪은 제적이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장년이 되어서도 기대했던 역할의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세월만 씹어대다 육체적인 질병에 자신이 씹어 먹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를 생각하면 짠하고 답답하고 우울한데 당사자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십여 년 전인가 딱 한 번 만났을 때 뭘 하며 먹고 사는가라는 말도 묻기가 조심스러운 내게 그가 내민 명함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혁신정당의 연구위원이라 적혀있었다.
경근이가 죽을 쑤기 시작할 때부터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춘성이는 거칠기로 유명한 중장비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시골의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는 애당초 공부엔 뜻이 없었다. 그 당시 다른 아이들처럼 도회지로 나가 공장에 취직하거나 기술을 배울 생각도 하지 않고 하고많은 날 싸돌아다니거나 빈둥거리며 밥이나 축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모의 농사를 거들 그도 아니었다. 성실함이나 반듯함, 착한 이미지와는 아예 거리가 먼 그였다. 어른들이 말한 싹수가 노랗다는 말이 그때까진 어김없이 맞아떨어진 반거충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해 시골에 갔을 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힘도 없는 노인네의 뺨을 때린 천하에 둘도 없는 호리상놈이고, 어느 동네 어떤 처자를 자빠뜨려 망쳐놨다는, 하는 짓마다 싸가지 없는 짓만 도맡아 해서 혹 만나게 되더라도 아는 척하기도 싫은 불량한 놈이었다. 그러던 그가 군대를 다녀와 중장비 기술을 배워 불도저를 몬다는 소문이 돌더니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 사회생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땐 어느새 불도저 세 대를 가지고 중기업체 사무실을 직접 운영하는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돈이 사람의 품격을 만든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동창회나 친구들의 애경사에 거의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석하더니 그 범위를 넓혀 나는 얼굴도 내밀지 않는 재경군민회의 회장이라는 직함까지 거머쥐었으니 싹수가 노랗다는 말을 한 어른들이 안다면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어느 자리인지 기억나지는 않으나 그가 인사말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듣고서야 나도 새삼 그 옛날, 책을 읽을 줄을 몰라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경근이에게 배웠던 춘성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의 말솜씨는 조리 있고 매끄러웠다. 그때부터 눈여겨봤지만 실제로 그와 직접 얘기를 해봐도 어느 방면에서나 서당 개의 풍월도 아니었고 수박 겉핥기는 정녕 아니었다. 어쩔 땐 대학을 나온 나나 몇몇 친구보다 아는 것도 많고 달변이면 달변이었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짓도 좀 티를 내서 그렇지 옛날처럼 불량하지도 않고 어른들에 대한 예의도 바르고 친구들 간 의리도 누구보다 더 챙겼다.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창밖만을 응시하며 두 친구 더듬기에 여념이 없던 내게 하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내가 너무 심각했나? 하연이를 본 지도 작년 연말 송년회 때였다. 용수는 미리 준비한 떡과 김밥, 물과 캔맥주를 선미와 함께 돌리고 있었다.
“일은 무슨, 싹수에 대해 생각했어.”
“싹수라니?”
“떡잎.”
“떡잎?”
“크게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잖아.”
하연이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피식 웃었다.
“경근이?”
“안타깝잖아.”
병신이여. 하연이는 단 한마디로 경근이의 모든 걸 함축했다. 그 소갈머리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친구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대변한 말이기도 했다. 언젠가 선미가 경근이 얘기가 나왔을 때 한, 아무리 소신이 있어 데모를 하고 싶어도 부모형제를 생각해서 참고 고시부터 패스했어야 한다는, 일단은 출세해놓고 소신을 펼쳐도 늦지 않았을 거라는, 저만 바라보고 살아온 부모형제의 실망감을 어떻게 보상할거냐는, 심지어 그 특출 난 머리를 준 하늘을 배신한 거라는, 설령 제적을 당했어도 다른 사람들은 잘만 나가는데 어째서 혼자만 그렇게 사느냐는, 솔직히 검사 판사 돼서 우리 동창에게 도움을 주진 못할망정 짐이 돼서야 쓰겠느냐는. 그때 춘성이가 경근이의 생활비를 대준다는 말이 떠도는 시점이었다. 그 소문을 들은 우리들은 경근이의 완전한 추락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의 두문불출을 두고 더 이상 기대해봤자 말짱 도루묵일 거라 생각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붙어 앉아있구만잉. 그동안 보고자파서 둘이 어떻게 살았디야? 근디 아버지하고 딸 사이라고 혀도 믿겠어. 하연이 네가 혹시나 하며 기대하고 있을까봐 하는 말인디, 일찌감치 맘 돌려. 절대로 손해여, 저렇게 머리가 시어갖고 밤일이나 제대로 헐랑가 몰라, 이참에 바꿔버리랑게?”
용수가 먹고 마실 걸 한 아름 안기면서 너스레를 떨자 모두가 우리를 쳐다보고 웃으며 한마디씩 던졌다. 내비 둬, 너나 빨리 하나 꿰어 차라. 그 사람들은 공인된 짝꿍이여, 뭐라 하면 안 디야. 저 자식이 하연이한테 맘이 있는감만. 나도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썩을 놈들, 지랄허고 자빠졌네잉.”
그렇지만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나나 하연이나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동창들 가운데 아직까지 미모가 여전하고 가장 어려보이는 그녀다. 챙 넓은 모자에 연두색 잠바와 청바지를 입었는데 상큼한 쪽니는 여전히 매력적이고 남방 단추 사이로 언뜻 비치는 가슴의 골과 속살이 눈부셨다. 그녀도 뒤지지 않았다.
“그렁게 말이여. 웬 난리들이랴. 글고 희찬이 머리가 내가 보기엔 아주 멋있기만 헌데 괜히들 그려.”
일상에서는 서울말에 근접해 있어도 고향친구들만 만나면 사투리로 얘기를 해야 제 맛이 난다.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은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맥주 캔을 따서 하연이에게 건네고 나도 한 모금을 마셨다.
“애기 엄마 학원은 여전히 잘 되지?”
“어디, 요즘에 학원들 다 죽을 쑨다 그랴. 불황에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애들 학원비라고 아녀? 그나저나 신랑은 뭐하며 소일하시나?”
하연이의 남편은 그녀보다 일곱 살 위, 공직에서 은퇴한 지 오래됐다.
“요즘은 밖에도 안 나가고 완전히 방안퉁수 됐어. 텔레비전만 끼고 산다니께.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꼴 보기 싫어 죽겠어. 작은 애가 지금 몇 살이지?”
“이제 대학 들어갔어. 난 아직 한참이여.”
“그러게, 하긴 각시가 아직 오십도 안됐지?”
하연이도 아내를 만난 적이 있다. 부천에 볼일이 있다 해서 전화가 와 아내와 같이 나가 식사를 했었다. 그녀가 일곱 살 많은 신랑을 만난 데 비해 공교롭게도 나는 일곱 살 아래의 각시를 만났다. 하연이를 만나고 난 후 아내는 그랬다. 내가 너무 무시했나봐. 난 자기의 첫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매력이 넘칠까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골출신이고 나이가 있는데 하고 솔직히 방심했거든. 그런데 아니네. 이제 자기가 동창들 만난다면 긴장 좀 해야겠어. 내가 너무 자기를 낮게 평가했나? 그러며 동창들 만날 때 외박은 절대금지라는 엄명을 내렸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가 살아온, 살아갈 시간을 짐작했다. 우린 참 솔직하지 못했었다. 좋아하면서 그런 내색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사춘기를 보내고 이십대의 그 푸른 청춘에도 다른 여자들과는 너무 쉽게 만나 너무 쉽게 헤어지기도 잘했지만 어릴 때부터 한시도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은 하연이에게만은 유독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어렵사리 만나도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고 그 심정만을 알아주기만 바랐으니. 불뚝불뚝 솟구치는 욕정을 어쩌지 못하고 갖은 상상으로 관능적인 환영을 그리며 분출을 일삼았던 위대한 용두질은 언제나 허망했다. 왜 그랬을까. 두고두고 안타깝고 아쉬웠다. 그것은 만에 하나, 싫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백하지 않고 싫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라도 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그 시간이 그토록 짧을 줄 어찌 알았으랴)을 간직하고 살지만 싫다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그 사랑은 포기해야만 하는, 그 절망적 상황이 두려워 끝내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인연이 되지 못하고 또 다른 인연이 이루어져 이루어지지 못한 인연을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어둔 채 담담하게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제야 서로가 좋아했다는 걸 허심탄회한 얘기로 알게 되었지만 짓게 되는 웃음은 헛헛했다.
“자기는 좋겠어.”
“왜?”
“죽을 때까지 할 일이 있잖아. 각시도 그렇고.”
“만들면 되지 뭘 걱정이야.”
내가 할 일과 만들어서 할 일과의 차이를 왜 모르랴. 하지만 쉽게 말할 수밖에. 그러나 그녀는 대번에 반발했다.
“할 일이 있어서 하는 것과 할 일이 없어서 억지로 만들어 하는 그게 똑같아?”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듯하여 은근히 물었다.
“하연이 갱년기인가?”
“몰라, 사는 게 재미없어 죽겠어. 이렇게 늙어가는 게 억울하기도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내가 속삭였다. 우리 늙어가면서는 솔직해질까? 그녀의 눈이 빛났다.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게, 쥐도 새도 귀신도.
휴게소에서 한번 쉬었다가 시골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한 시간이 열한시. 목재 단층 건물이었던 우리가 다닐 때와 달리 이층 콘크리트로 변한 학교는 매년 보면서도 감회가 새로웠다. 휴일이라 해도 너무 고즈넉하여 교실 안이 아이들로 바글바글했던 사십 년 전의 풍경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요즘엔 입학생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다니. 아무리 도시에 몰려 살아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의 완벽한 성공이 완벽한 실패가 돼버린 아이러니의 역사를 우리가 살고 있었다.
느티나무 그늘 여기저기에 동창회라면 빠지지 않는 지방에 사는 친구들, 공무원인 이정이와 주홍이, 산판을 벌여 돈을 모았다는 점수, 정육점을 하는 건나, 부동산 중개인 준호, 애견센터 인상이, 서점주인 종모, 개인택시 춘돌이와 남순이, 정례, 혜자, 순영이, 영희, 기순이, 향란이, 연자 등 십 수 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경근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던 창운이가 그러니까 43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달리 귀가 크고 생김새가 쥐새끼와 비슷하다 하여 시앙쥐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순수하고 착하긴 하지만 어리숙하고 덜 떨어진 듯 보여 기회만 있으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던 창훈이. 아, 창운이도 아직 장가를 못 갔단다. 어릴 때도 작달막했던 그가 친구들과 손을 잡다가 내 앞에 서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누구…?”
아, 이놈의 흰머리. 그는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금세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 창운인가? 날세, 자네 담임을 맡았던.”
나는 그가 육학년 때 몇 반인 줄 모른다. 두 반밖엔 없었지만.
“아니, 그럼 선상님?”
“맞아, 죽지 않고 살다본께 자네를 보네 그랴.”
“아이고오, 선상님. 어떻게… 이렇게… 친구들은 선상님 오신다고 암 말도 안 허등만요. 이거 큰일났네잉. 여그서라도 절 받으시랑게요.”
그러며 그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그 광경을 본 친구들은 이미 자지러지고 있었고. 맞절 시늉을 하며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 이 사람아,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절이야.”
“아녀라우. 같이 늙어가도 선상님은 영원히 선상님이지라우.”
“그려, 근디 자네 시방 어디서 뭐하고 사는가?”
“익산서 청소하고 있구만이라우.”
“환경미화원? 근디 왜 결혼을 아직도 안 했어?”
“누가 올려고를 안 헌당게요.”
내가 중신할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라왔지만 그만 뒀다. 대책 없이 말만 뱉었다가 그 순진한 기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아직 손을 잡지 못한 인상이가 다가와 담임 행세에 파투를 놓고 말았다.
“야 희찬이, 넌 뭘 잘못 먹었간디 머리가 벌써 그렇게 시어뿌렸냐잉?”
그러자 창훈이 입이 쩍 벌어졌다.
“머시라고! 희찬이라고? 이 양반이 희찬이란 말여 시방?”
“양반이 머시여, 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잉. 희찬이여, 거짓말을 밥 먹듯이 허는 소설가 송희찬.”
“깜빡 속아부렀네잉. 그런디 소설가가 뭐하는 거시여?”
말 다했다. 이런 아이가 창훈이었다. 인상인 한술 더 떴다.
“거짓말만 혀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랑께.”
“약장수맨키로?”
“그려그려, 그렇게만 알면 돼.”
졸지에 내가 ‘약장수처럼’이 돼버렸다. 한바탕의 연극은 그렇게 끝났으나 또 하나의 상황극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바로 춘성이의 차가 도착하고 초등학교 때 최고의 천재인 경근이와 최고의 바보였던 창훈이가 만났으니.
“얼래래? 이게 시방 삐틀이 아녀?”
“누가 아니다냐, 너가 시앙쥐지?”
그 둘은 이내 손을 잡고는 바로 얼싸안았다.
“아직도 고개는 고대로구만잉? 대장 되었뿌렀제?”
“대장이라니?”
“장군 말이여, 최고로 높은 장군. 공부도 최고로 잘했응게.”
“공부 잘헌다고 다 장군 되간디?”
“그럼 아녀?”
“안 그런 거시등만.”
“그런디 얼굴이 왜 이렇게 누렇게 떠버렸디야?”
병색이 완연한 경근이를 보고 조심스러워서 아무도 하지 못할 말을 창훈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자 경근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쓸쓸히 웃었다.
“그렇게 됐구만잉.”
모두가 서로의 끌림에 따라 손을 잡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재회의 기분을 얼추 풀자 용수가 나서서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고 빤히 보이는 두런터 다리 밑으로 가라 재촉했다. 여자들은 벌써부터 학교 둘레 담장 가에서 나물을 캐느라 신들이 났다. 그것은 꼭 나물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린 추억과의 만남일 것이었다. 당시에는 별 뜻이 없었으나 차츰 세월이 흐르고 멀어지면서 아름답게 연상되어 새록새록 되새겨지는. 하연이도 달래 몇 뿌리를 캐가지고 자랑하고 싶은 듯 손에 들고 나타났다.
“캐는 사람들이나 캐게 놔두지 그걸 뭐하려고 캤어?”
“다 깊은 뜻이 있으니까 아무 소리 말어.”
“깊은 뜻이라니?”
그렇게 묻자 하연이 킥킥 웃으며 속삭였다.
“이게 남자한테 그렇게 좋다네.”
“그래서 신랑 줄라고?”
“아니, 자기.”
“진짜로?”
“그려. 이따가 고기 먹을 거 아녀. 그때 같이 싸먹어.”
“아무도 모르게?”
우린 히히 하하 웃었다. 그런 은밀한 대화가 기분을 한층 돋우어 주었다.
“가시내들 더럽게 말도 안 듣는구만잉.”
용수는 나물만 보면 주저앉곤 하는 여자 친구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물고기 몰 듯 몰아갔다. 다리 밑에는 이미 커다란 천막을 쳐놓고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 찬혁이와 형석이가 물가에서 개를 잡아 끓이고 있었다. 개를 못 먹는 친구들을 위해서는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준비됐고. 이런 모임의 가장 중요한 일, 먹고 마시기에 앞서 용수의 사회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계보고 같은 거야 일상으로 있어온 일이고 중요한 안건은 회장 선출이었다. 지금까지 예로 보면 회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동창회의 성쇠가 좌우된다고 볼 수 있었다.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지만 회장은 회원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거부감이 들지 않는 친구여야 했고, 찬조금도 누구보다 많이 내야하고 회원들의 애경사에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는 열의를 지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어느 정도 재산을 축적한, 경제적인 여유와 시간이 있는, 동창회 초기부터 거의 빠진 적이 없이 참석한 친구가 적격으로 추천되어 추대되곤 했다. 아우를 수 있고 거부감이 들지 않는 첫 번째 항목은 많이 배워서도 제외되었다. 우리 시대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던 친구들이 이 할도 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형성된 묵계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다보니 그런 게 무의미해졌다. 다 사는 게 거기서 거기였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다 잘 사는 게 아니었고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지적 능력이 떨어진 것도 아니어서 열의만 있으면 되었다. 현재의 회장인 공인회계사인 동우는 2년 임기를 연임한 터라 회칙에 의해 새로운 인물로 뽑아야만 했다. 그는 몇 번이나 고사했다가 억지로 회장을 한 경우였다. 그에게 동창회장이라는 자리는 울며 겨자 먹는 자리였다. 해마다 열리는 동창회나 송년회는 물론이고 애경사가 생기면 그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어디서 하든 쫓아가야만 하는. 그때부터 회장이라는 자리가 동창들을 위한 봉사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 얼마나 귀찮겠는가 말이다. 결코 잘나서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선뜻 나서서 하려는 친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다음 회장은 춘성이가 맡아야 한다고 중론이 모아진 상태였다. 춘성이도 기꺼이 동의했다. 총무는 선출된 회장이 자신과 가장 소통이 잘되는 친구를 지명하면 됐다. 어떤 면에선 총무가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모든 연락을 총무가 맡아 하므로 그의 활약 여하에 따라 참석인원도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수가 지극히 형식적인 회의 막바지에 이르러 다음 회장 추천을 받는다는 말을 꺼내자 동우가 일어섰다.
“다음 회장에 춘성이를 추천합니다.”
이제 동의가 있고 다른 친구를 추천하는 이가 없으면 박수를 유도해 만장일치로 춘성이가 회장이 되는 일만 남았다. 만약 다른 친구가 춘성이 외의 친구를 추천할 경우 투표로 결정하게 돼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창훈이가 느닷없이 일어났다.
“지는요, 오늘 처음으로 동창회를 나와서 잘 모르겄는디요. 지금까지 경근이 저 친구가 한 번도 회장을 안 했다면서요. 했어도 진작 했어야 되는디 지금이라도 저 친구가 어떨란가 모르겄시유. 삐틀이 저 친구를 회장으로 추천할랑만요.”
모두가 웃었다. 어이없다는 웃음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들이었다. 너 지금 장난하느냐고, 장난치고 싶으면 조금만 참으라고 한 대 쥐어박을 태세들이었다. 역시 시앙쥐는 시앙쥐라고, 아직도 초등학교 시절인 줄 아느냐고, 이따가 여기 청소나 깨끗이 할 생각하라고, 그게 도와주는 거라고, 오줌을 싸고 싶은데 쌀 데가 마땅치 않아 겨우 참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경근이를, 동창회를 위해 조금도 기여한 바 없는 그를, 자신마저 추스르지 못하고 추락할 대로 추락해버린 루저를,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은둔자를, 어릴 때의 싹수만 믿고 최고의 바보가 최고의 천재를,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창훈이가 주제파악도 못한 채, 더군다나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없는 놈이 저하고 처지가 똑같은 놈을 추천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라는 눈치들이었다. 당사자인 경근이는 말도 못하고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참담한 심정일 게 빤했다. 그 뜻밖의 상황에 용수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창훈이의 추천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사회자의 입장. 그러자 창훈이는 그러한 분위기가 어째 이상하다 싶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와 눈동자를 함께 돌리며 눈치만 슬슬 살피다가 멋쩍어졌는지 혼잣말 비슷하게 내뱉었다.
“왜들 그려, 안 디야?”
누가 섣불리 나서겠는가. 일순 정적이 감돌던 그때였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당연히 되고말고.”
먼저 회장으로 추대된 춘성이었다. 그가 일어났다.
“저란 놈을 회장으로 추천해준 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초등학교 때나 그 이후에도 개망나니였습니다. 한마디로 싹수가 노란 놈이었어요. 그 말은 사람 구실을 할 놈이 아니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 저를 이렇게나마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 사람이 바로 경근이, 이 친구입니다. 자세한 말씀은 드릴 수 없으나 제 뒤에는 항상 경근이가 있었습니다. 잠시 그런 사실을 망각했는데 오늘 창훈이가 일깨워줬습니다. 저도 경근이를 회장으로 추대합니다. 경근이가 동창회에 지금까지 참석하지 않은 것도 잘 압니다. 솔직히 회장 자격도 없어요. 그렇지만 동창회의 존재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회원들 간의 친목도모에 있잖아요. 우리가 동창회를 할 때마다 사십여 명이 넘지 않습니다. 우리가 졸업할 때 몇 명이었습니까. 백이십 명이었잖아요. 나머지 팔십여 명은 어디로 갔습니까. 안 나오다 보니까 미안해서 못 나오는 겁니다. 면목이 없는 거예요. 이번 기회에 처음 나온 경근이가 회장으로 추대된 걸 안다면 지금까지 망설이던 친구들이 나올 것 아닙니까. 오히려 아주 잘됐습니다. 만약 경근이가 회장이 된다면 저는 자청해서 총무가 되어 동창회를 이끌어나가겠습니다.”
상황이 돌변했다. 그 상황은 춘성이가 경근이를 회장으로 그럴싸한 명분을 대며 밀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춘성이의 오늘을 있게 한 이가 경근이었다는, 검사 판사는 되지 못했어도 개망나니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 장본인이 우리가 사시로 바라본 경근이었다는 데 있었다. 용수가 그제야 제 할 일이 뭐라는 걸 깨달았는지 물었다.
“그럼 춘성 씨는 추천에서 사퇴하겠습니까?”
“네.”
조금도 주저치 않고 춘성인 대답했다.
“또 다른 분 추천하실 분 없습니까?”
“없당게로.”
신이 난 시앙쥐 창훈이가 못을 박듯 말했다. 그때 경근이 일어섰다.
“아닙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춘성이의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춘성이 스스로 오늘에 이른 거지 저는 별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경근이는 부정하나 그 둘의 관계에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분명히 있긴 있었다. 그런 경근이의 말을 중간에 끊은 건 춘성이었다.
“어허, 아무 소리 말고 친구, 그냥 혀. 내가 도와줄텅게.”
“그리고 저는 건강하지도 못합니다.”
그때 춘성이가 아니, 이 사람이, 하면서 고함을 뻑 질렀으나 경근인 멈추지 않았다.
“일 년을 살지 아니면 육 개월을 살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왜 그려! 자네 절대 안 죽어! 왜 내 말은 안 믿고 그런 돌팔이 말은 믿느냔 말이여!”
저게 무슨 말인가. 죽다니? 경근이의 건강이 그토록 안 좋단 말인가. 상황이 다시 한 번 돌변했다. 모두가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까지 들리지 않던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염소 울음까지 들렸다. 춘성이가 다시 일어나 경근이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경근이 이 친구 건강이 좋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믿는다면 경근이의 건강도 믿어주십시오. 이 친구 안 죽습니다. 다시 한 번 경근이를 회장으로 추천합니다.”
그러며 춘성이는 용수를 재촉했다.
“그러면 더 이상 추천해주실 분 안 계시지요?”
“네!”
그제야 사회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 용수가 얼떨결에 묻자 모두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용수는 차기 회장으로 경근이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박수가 쏟아졌다. 이에 얼굴이 처음 볼 때보다 더 시커멓고 노랗게 변한 경근이가 ‘이거 참’을 몇 번 연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 마음은 항상 고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창회가 열릴 때마다 춘성이가 그렇게 졸라대도 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오지 않았습니다. 천하의 불효자식이 된 것이지요. 저는 제적을 당하고 감옥에서 나왔을 때 죽은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모든 의욕도 그때 사라졌습니다. 대의를 위한 명분도 자기만족이 없으면 생겨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비난하는 소리도 저의 실체가 없는데 제대로 들리겠습니까. 잠깐 잠깐씩 저 중국의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을 떠올리며 나를 추슬러 보려고도 했지만 끝내 저를 설득하지 못하고 영혼이 없는 껍데기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실 오늘도 춘성이에게 끌려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을 보고 사십 년 넘게 못 본 척하고 지냈던 고향을 보니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창훈이가, 우리가 그토록 업신여기고 깔보기만 했던 저 시앙쥐가 제 뒤통수를 때려줬습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회장직을 수락합니다. 창훈이가 기억하는 저의 모습이 저를 힘들게 한 건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변명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회장직 수락의 변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뭐 대수이겠는가.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동창회의 본령은 뭐니뭐니해도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 소주와 맥주와 막걸리가, 개고기와 돼지고기와 닭고기가, 야채와 과일과 떡이 차고 넘쳤다. 거기에 아련한 추억이 실체가 되어 술자리를 넘실거리고 그리운 이야기가 넘쳐흘렀다. 대부분이 흙을 일구는 농사꾼의 자식들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일 년 열두 달을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살리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어떻게 네가 소설가(버스를 몰 줄, 공인회계사가, 은행지점장이, 골프장 매니저가, 노래방이란 게 있지도 않았는데, 짜장면을 생전 처음 먹고 토하던 네가 중화요리를, 도대체 중장비라니, 공무원이, 정육점을, 공인중개사가, 환경미화원이, 애견센터라니)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기운이가 물에 빠져죽을 줄, 그 노래 잘하고 인물 곱상하던 춘원이가 알코올에 쪄들어 영등포역에서 노숙을 하다 죽을지를, 연자나 종덕이가 암으로 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별할 줄, 한철이가 이혼하고 순영이가 일찍이 과부가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하물며 우리들의 우상이 농판(룸펜)이라니!
결론은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수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싹수의 색깔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싹수에 색깔이 있을 리가 없고 설령 색깔이 있을지라도 수시로 변한다는. 따라서 싹수를 보고 판단하는 게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는 것이었다.
“어때 맛있지?”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하연이가 정력에 그만이라는 개고기를 열심히 먹고 있는 내게 사이사이 돼지고기와 함께 달래를 넣은 쌈을 입에 넣어주며 물었다. 어찌 맛없다고 할 수 있으랴. 돌멩이를 싸주어도 맛있을 판인데. 나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눈꼴 시려 못 봐주겠네, 해도 우린 마냥 좋기만 했다.
“그러니까 이제 개고기 그만 먹고 돼지고기 먹어.”
“개고기가 남자한테 끝내준다잖아.”
“그럼 달래 먹고 개고기 먹고 어떻게 하려고?”
“오늘 실험해봐야지.”
“각시한테?”
“아니, 우리 솔직해지기로 했잖아.”
“진짜?”
“귀신도 모르게, 감쪽같이.”
먹을 만큼 먹고 배를 한껏 채운 우리는 학교운동장으로 가서 이젠 배가 빨리 꺼지도록 열심히 뛰어야만 했다. 언제 우리가 건강을 위하여 운동이라고 해본 적이 있었던가. 배는 부르고 술은 얼큰하여 모두가 몸을 사리는데 용수는 기어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공을 차고 밧줄을 당기고 줄넘기를 넘게 만들었다. 처음엔 다들 마지못해 뛰었으나 나중엔 재미가 넘쳐 뛰었다.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모두가 기진맥진하여 잔디밭에 퍼졌을 때, 몸은 비록 녹초가 되었으나 모두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이제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새로운 회장이 된 경근이를 선두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손을 잡았다. 한 사람, 한사람의 손을 잡을 때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무궁한 이야기가 곡진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경근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년에도 오늘 참석한 친구들 모두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서울로 올라갈 때도 나와 하연인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다만 올 때는 내가 창 쪽에 앉았지만 갈 때는 의뭉한 속셈으로 하연일 그쪽에 앉게 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땐 어둠이 창밖을 점령하고 있었다. 몇몇 술꾼들을 제외하곤 모두가 곯아떨어져 조용했다. 누구 하나 우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나는 하연이 손을 깍지 끼어 잡았다. 과감한 스킨십의 암시였다. 내 심장과 하연이의 심장이 심하게 고동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남이었다. 남의 것이 탐나고, 더 갖고 싶고, 더 맛있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오늘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서로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그리고 알아주기만 바랐다. 내가 너를 원하고 있다는 걸. 결혼 전에도 서로는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를 움직이게 할 결정적인 고백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연이 되지 못하고. 그때의 머뭇거림이 오늘의 우리로 존재했다. 그 선택 아닌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그런데도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으리라고 했는데.
나는 갈등했다. 잠이 든 체하고 있었지만 오는 내내 고민했다. 오늘 그냥 헤어지지 말자는 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게 되면 하연인 순순히 내 말에 따라줄까. 불순한 의도에 대한 방패막이는 귀신도 모르게라는 말로 충분했다. 이야기 도중에 받은 메시지는 그야말로 오케이였다. 그러나 그게 농담이었다면…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말이나 듣게 된다면… 나는 뭐가 되는가. 하연이도 몸짓이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잠이 든 체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오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났다. 이제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할까, 말까. 하연인 눈은 떴으나 말이 없었다. 내가 쳐다보자 그녀도 쳐다봤다. 내가 눈길을 거둘 때까지 그녀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차가 멈추고 실내등이 환하게 켜졌다. 사당역이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오는 내내 깍지 낀 손을 그녀가 먼저 풀었다. 나는 또 못하고 말았다. 병신같이! 나의 싹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항상 머뭇거리다가 기회를 놓치고 마는.
내년에도 모두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나자던 경근이는 제 스스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회장이 되어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춘성이는 경근이의 절망을 이렇게 얘기했다.
“고문을 받고 고자가 된 거야. 개새끼들이 그렇게 만들어놓고 몇 푼 쥐어준 게 내 사업자금이었다. 더러운 돈으로 무엇을 하겠느냐고 내게 던져줬다. 오냐, 네 씨하고 바꾼 돈인데 뭣을 못하겠느냐.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살았다. 그때 사귀는 여자도 있었단다. 그런데 남자로서 가장 치명적인 그 일을 당하고 별 수 없이 여자가 떠나가자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거야. 간간히 새롭게 마음을 다질 때도 있는 것 같았지만 오래 못 가더라. 술로 살았다. 결국 병원에서 얼마 가지 못할 거라 해서 그나마 동창회에 참석했던 거야. 생전 가도 죽어라 말을 안 듣더니 그땐 희한하게 선뜻 따라나서더라고. 다행히 생각지도 못했던 동창회장이 되어 친구들을 찾아다닐 때 처음으로 얼굴에 생기가 돌더라. 그전에는 말끝마다 죽고 싶다고 하더니 그 후부터 악착같이 살아야겠다고 했는데 죽어버린 거야.”
아, 치욕의 궁형을 당하고도 집념의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을 언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너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나도 너를 비난하는데 동조한 면이 없지 않다. 미안하다. 얼마나 세상이 야속했느냐. 그런데도 넌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내 책을 읽었다니, 그때 그 얼마나 참담했을까. 미안하다, 친구여.
춘성이는 그야말로 친구를 위해 마지막까지 모든 걸 알아서 처리했다. 경근이가 오늘의 그를 위해 비록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해도 ‘싹수가 노란’놈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었다.(102매)
첫댓글 사실과 소설을 어떻게 구별할지 ㅋㅋ ^^~
재미있어 단숨에 쭉~ 잘 보았네요~감사~
박 선생! 동창회 간다는 설정만 그렇고 다 픽션이라는 것만 알아줘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