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국 서예
1960년 대의 서예론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서법론이 보편적이었다. 그런 가운데에 유희강의 개인전에서 서예론의 변화가 감지되기도 하였다.
1960년 대에는 서예인들의 개인전과 단체전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만 해도 개인전은 경제적인 여건이나 . 여러 사회적인 여건으로 쉽게 열 수가 없었다. 개인전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 것은 사회적인 여건에 변화가 왔음을 말한다. 경제 부흥으로 삶의 여유가 생기므로 서예 인구가 늘어났다. 서예인들도 취미 생활에서 벗어나서 사숙을 운영하거나, 작품 판매가 이루어지므로 서예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서예학원(서숙)이 나타난다.
(* 서예학원과 서숙은 엄격한 의미에서 성격이 약간 다르다. 전통적으로 서예을 공부하는 방법은 도제 제도의 형식을 많이 닮았다. 서숙은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에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서예를 배우는 경향이 있다. 학원의 공부 방법도 예전의 도제 제도와 비슷하지만, 학원이라고 하면 돈으로 지식이나 기술을 전수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김충현의 경우를 예로 하여 이 시대의 서예인을 보자. 1962년에 서울상업고등학교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후로는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이것은 전문 서예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만들어졌음을 말한다. 이때는 김충현 같은 대가들은 서숙을 열고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일반 서예인에게는 시기상조였다. 동방연서회를 동생인 김응현과 이끌면서 서예 강좌도 하였다. 서예 서적 출판도 하였으나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되어 일본 서책이 들어오므로 출판업도 접었다. 1969년에 동방연서회도 떠나고, 인사동에 일중묵연(一中墨緣)을 열고 후배를 양성하였다.
1972년도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인가받은 서예 학원이 7개소, 인가 받지 않은 학원이 10개소라고 하였다. 이제 서예인이 학원으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음을 말한다.
1960년 대의 한국 서예의 특징은 서예가가 서울에 편중되어 있었다. 서예인의 등용문이 국전이었고, 국전을 통한 등용의 기회가 지방 서예인에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개인전과 서숙(학원)이 나타나긴 하였으나 서숙의 수도, 전시회의 빈도가 적었다. 개인 서숙(오늘의 학원)을 가진 서예인도 아주 적었다. 이름이 있는 서예인도 대학에서 강사직을 맡아서(학과가 없었으므로 거의가 강시직이었다.) 서예를 가르치는 사람이 많았다. 대학에 서예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거의가 교양 수준의 서예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들이 대학에서 서예를 가르치므로 제자들이 모여서 서예 단체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국전을 통하여 등단한 서예인들은 생계를 위하여 서예 이외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은 60년 대까지는 전문 서예인(서예를 직업으로 하는)이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예는 취미 생활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개인전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 세계와 자신의 서예관을 표현한다는 의식도 모자랐다.
서울에서 열리는 국전은 심사위원과 응모하는 서예인이 서울에 집중함으로 지방의 소외가 심하였다. 지방의 서예인이 국전에 등단하기 위하여 서울의 서예인을 찾아다니는 일도 빈번하였다. 그런 형편이 되지 못한 서예인의 불만도 쌓여갔다. 이로서 서예인들의 갈등이 표출되는 시기도 1960년 대이다.
(*지방 서단에서는 명망이 있는 서예인들도 국전에 등단하지 못하였으므로 공공연하게 반국전파 서예인이라고 말하였다. 일반인들이 국전파 서예인을 더 높이 평가함으로 반국전파 서예인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국전이라는 좁은 등단의 문을 통과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자(서예인구가 많아지므로) 서예인이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도 더 어려워졌다. 특히 지방에서는 국전 추천작가의 타이틀을 얻게 되면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었으므로(많은 제자를 모을 수 있었으므로) 국전을 향한 열망은 뜨거웠다. 문은 좁고, 열망은 뜨거워지고------, 부작용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국전에서 소외된 인사들이 단체를 결성한 시기도 1960년 대 이었다. 1965년 4월에 일부의 서예인들이 모여서 ‘한국서예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손재형 계열의 일부 서예인을 제외한 많은 서예인이 참여한 단체였다. 대표적인 참여 인사는 배길기, 김충현, 김응현 등 반 손재형 계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유희강도 이 모임에 참여하였다. 서예가협회 참여 인물이 보여주는 성향은 이 시대의 서예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협회는 단체전도 열었고, 공모전도 열었다. 그러나 어떤 이념을 중심으로, 또는 같은 성향의 서예론을 설정하고 모인 단체가 아니었다. 친목 단체의 성격이 강하였다. 국전에서 제외된 서예인이 국전에 반발하여 모인 단체라고 볼 수 있었다. 서예가협회에 참여하는 인사도 지방 서예인은 적었다. 서울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서예사에서 서예의 중앙 집중화만 더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외에도 여러 서예인 단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어떤 이념이나 서예론을 앞세운 단체가 아니었으므로 일반적으로 서예사의 흐름에는 영향을 주지 못 하였다. 친목 성향(이념성이 없는)의 서예 단체 난립이 주는 부정적인 효과가 오늘의 서예계까지 악영향을 미치면서 서예의 발전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국전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중견작가로 자라나면서 서숙을 만들었다. 서숙(학원)의 수도 많아졌다. 서숙전이 많아졌다. 김충현, 김응현에게 글을 배운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결성한 동방연서회가 대표적인 서숙 출신의 모임이다. 활동도 아주 활발하였다. 서숙 출신 모임이 세력이 커지면 다시 문화 권력자로 변신을 하는 것도 우리 서예계의 슬픈 자화상이 되었다.
서예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더 많은 단체가 생겨났다. 개인전, 서숙전, 단체전이 많아지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아주 드문 현상이었지만 새로운 성향의 서예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를 따르는 추종자가 생겨남으로 국전 중심의 서예계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이로서 서예계는 돌파구를 찾으려 변화를 모색하는 조짐도 보였다.
60년 대의 서예계의 상황을 대강 살펴보았다. 이러한 경향은 70년 대도 계속하였다.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